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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29화 (129/205)

129화. < 악어 사냥 (15) >

료헤이는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마그나크록과 정면에서 맞서라는 요구는 나를 위해 목숨을 걸라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승진의 대가치고는 과하군.”

그는 검을 검집에 돌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답은 들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5만 정규군을 도시 앞에 쫙 깔아두고, 용병들은 성벽 위에 올려놓았다. 용병들을 감시하기 위해 정예 전사단 하나를 도시 안에 배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그나크록의 군대가 나타난 건 해가 지평선 너머로 기울어갈 무렵이었다.

아군이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마그나크록의 초월적인 크기는 충성스러운 크록 전사들에게조차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놈은 누가 봐도 크록의 유일신에 걸맞은 자태를 지닌 에사인이었다. 반면 그와 맞선다는 나는 촘촘한 송곳니도, 기다란 꼬리도 없는 한갓 인간에 지나지 않았으니.

때문에 나도 평소 억누르고 있던 마력을 마음껏 개방했다. 밝고 푸른 아우라가 저녁노을을 뒤덮을 듯한 기세로 퍼져나갔다. 나는 5층 높이의 목조 지휘탑 위에서 대검을 쳐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개진하라!”

크록 장군들이 전열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진형을 갖춘 크록의 대군은 무엇으로도 깨부술 수 없는 철벽의 군대 같았다.

적들은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보급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란 첩보가 있었다. 공격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서로를 잡아먹느라 병력 수가 줄어들 테니, 그들로서는 야전을 감수하더라도 오늘 내로 승부를 내야만 했다.

쿠우웅.......

마그나크록이 걸을 때마다 천지가 뒤흔들렸다. 마치 산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발끝으로 느껴지는 놈의 중량감에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마그나크록! 마그나크록!”

적의 전사들이 눈을 붉게 빛내며 주둥이를 벌렸다. 십만 군대가 내지르는 소리가 들판 전체를 압도했다.

질 수 없다는 듯이 우리 쪽에서도 선창이 나왔다. 누군가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짖자, 이윽고 전군이 하나가 된 듯이 한 목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라힐! 라힐! 라힐!”

아군 전사들의 눈도 붉게 물들어갔다. 그들은 거칠게 발을 구르며, 차가운 대기에 거친 콧김을 뿜어냈다.

"전진하라!”

전사들이 발을 맞춰 걸어 나갔다. 전열보병의 머리 위로 상체가 한참이나 솟아난 거구의 크록이 보였다. 막시무스는 일 킬로미터 밖에서도 눈에 띌 만큼 존재감이 독보적이었다.

우리가 대형을 유지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반면, 저들은 오와 열도, 두서도 없이 미친 듯이 내달렸다. 종교적인 광기에 휩싸여서도 군기가 유지된다는 게 우리와 그들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콰콰쾅.

검붉은 불꽃이 적진 사이에서 드높이 치솟았다. 도열한 K-2 탱크의 주포가 잇달아 불꽃을 내뿜었다.

그것을 신호로 각종 중화기가 성벽 위에서 무자비한 화망을 구축했다. 크록들은 화망 안에 들어오는 족족 산산이 박살 나 흩어졌다.

그러나 크록 중갑병들은 탱크의 주포에 직격당해도 쉽게 죽지 않았다. 개중에는 나무 방패에 마력을 덧씌워 포격을 막아내는 놈도 있었다. 적으로 만나니 크록이 얼마나 성가신 종족인지 뼛골이 시리도록 체감이 되었다.

“크롱크.”

나는 지휘부에 참석 중인 크롱크를 불렀다.

"마그나크록한테 탄 낭비 하지 말라고 전달해라.”

공을 세울 욕심인지, 마그나크록에게로 포탄 일부가 새고 있었다. 그런 무모함은 피해를 주기는커녕 놈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큼.”

크롱크는 연락병에게 전언을 하달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전선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임팩트의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콰지직.

마침내 두 군대의 선봉이 부딪혔다. 중갑주가 우그러드는 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허공으로 옥수수 알갱이처럼 튀어 올랐다.

"마그나크록! 마그나크록!”

라인을 따라 피보라가 솟구치는 게 선연히 보였다. 적들은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방패의 벽을 향해 몸뚱어리를 아낌없이 내던지며, 시체를 쌓아서라도 전선을 돌파하려 들었다.

유난히 강한 크록 전사, 특히 적의 장군이 있는 곳은 여지없이 아군 전열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전열을 쐐기 삼아 놈들은 집요하게 전선을 들이받았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좌익이 위험합니다! 크룩크 님이 전사했습니다!”

아래로부터 신호를 받은 연락병이 다급히 보고했다. 나는 그가 보고하기도 전에 전선 일각이 무너져 내리는 걸 감지했다.

방금 적의 장군에게 아군 장군의 목이 날아갔다.

이게 놈들의 전술이었다. 불사신을 앞세워 장군급 요인을 저격하는 것.

때문에 섣불리 일대일 대결에 응하지 말라고 사전에 지시를 내려두었으나,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겠지.

"좌익에 예비대 2천을 투입해라.”

"알겠습니다, 큼.”

"마그나크록이 옵니다.”

오르기가 경고했다. 그는 수석마법사의 자격으로 내 옆에 배석해 있었다.

마그나크록은 자신의 부하들까지 가차 없이 짓밟으며 달려와, 전선의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발바닥을 치켜들었다. 그의 발그림자가 전사들의 머리 위로 짙게 드리우는 게 똑똑히 보였다.

“손을 쓰겠습니다!”

오르기가 앞으로 나서며 주문을 영창했다. 거대한 얼음기둥이 빛살처럼 뻗어나가 마그나크록의 발목을 강타했다.

전차의 주포에 직격 당해도 끄떡없던 거체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오르기는 용기를 얻어 얼음기둥을 잇달아 시전했다. 그는 예전보다 훨씬 실력이 무르익었다. 마법을 난사하다시피 쏟아 붇는데도 마력이 막힘없이 순환하고 있었다.

"크르르르......."

마침내 마그나크록이 우리를 향해 주의를 돌렸다. 분노에 찬, 횃불 같은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 벌레 같은 놈들이.

천둥 같은 사념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놈은 곧장 우리를 향해 돌격해오려 했으나, 한 사내에 의해 저지당하고 말았다.

료헤이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마그나크록의 경로를 가로막았다. 그의 장검이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발했다. 무시하고 지나치다간 몸이 성하지 못할 거라는 경고였다.

"야마모토 료헤이 병장이다, 잘 부탁한다.”

스으윽.

그의 검극이 선전포고를 하듯 마그나크록을 향했다. 마그나크록은 불문곡직하고 언월도를 료헤이의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성벽만큼이나 기다란 창대가 수직으로 서자 그 끝을 한눈에 담을 수조차 없었다.

울토르조차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던 공격이다. 저 중량에 마력에, 위치에너지까지 실린다면 그야말로 땅을 허물 위력이 나올 것이다.

료헤이는 마그나크록의 전심전력이 담긴 참격을 앞두고도 눈썹조차 까딱 않았다. 그가 그러리라고 여겨 발탁하긴 했다만, 저 간담 앞에서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크롱크, 누님께 전언을 보내라. 협공을 준비하시라고.”

"알겠습니다, 큼.”

언월도가 대기를 가르며 내리꽂혔다. 료헤이는 장검의 역날을 왼손으로 받든 채 방어자세를 취했다.

쩌어엉.

소닉붐이 희뿌연 연기의 모습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충격파에 휘말린 크록 전사들이 도미노처럼 우수수 넘어갔다. 덩치가 작은 소형 크록들은 몇십 미터나 날아가기도 했다.

이 모든 광경을 관측병이 비디오카메라로 담고 있었다. 역사에 길이 남길 자료를 만들기 위하여.

"주군, 두 번째 공격이 옵니다. 료헤이 님을 보조하겠습니다!”

오르기가 다급하게 말하며 주문을 영창했다. 그러나 그의 마법은 마그나크록에게 닿지 못했다.

적의 진용 한가운데에서 눈부신 전격이 뿜어져 나와 얼음의 창을 격추시켰다.

“...적에게 마법사가 있습니다.”

오르기가 곤혹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적의 마법은 심지어 오르기의 마법을 상쇄하고도 힘이 남아돌아 아군 전열에 피해를 입혔다. 어마어마한 전격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밀집한 군대를 숯덩이처럼 태워버렸다.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마그나크록과 무관한, 독립적인 힘을 다루는 강대한 존재가 나타난 이상 작전의 수정이 불가피했다.

"크롱크, 여긴 네게 맡기겠다.”

나는 대검을 들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건 료헤이의 목숨을 붙여두는 것이었다.

쩌어엉...

대지가 또다시 격동했다. 언월도가 무자비한 위력으로 료헤이를 두들겼다. 료헤이는 이번에도 굳건히 선 채 놈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마법까지 대처하지는 못했다. 새끼줄처럼 꼬인 갈래번개가 그의 옆구리로 쇄도했다.

나는 대검을 냅다 집어던졌다. 재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다. 전격을 집어삼킨 검이 폭죽처럼 성대한 불꽃을 튀겼다.

"큭......."

전격으로 충전된 검자루가 따끔따끔했다. 적 마법사의 수준은 오르기를 상회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초월적인 영역에 반 보 접어 들었다고 봐야했다.

"료헤이, 마법사를 네가 맡아라. 처리할 수 없다면 시간만 끌어도 돼.”

료헤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이탈했다. 그의 팔이 정상이 아닌 것 같아 걱정이 되었으나, 그는 버티는 재주로는 나 이상의 독종이다. 그가 해낼 수 없는 일이라면 내 부하 누구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마그나크록이 언월도를 다시 치켜들었다. 나는 숨을 들이키며 대검에 전심전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각성한 후 내가 맞닥뜨린 최고의 상대였다. 힘을 아껴둘 필요가 전혀 없었다.

막아낼 수 있을까?

놈이 내 공격을?

태산 같은 놈의 참격을 직면하고도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아직 나는 한 번도 전력을 다해본 적이 없었다. 두 팔에 깃든 에너지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다는 불패의 권능을 머금은 팔이었다.

"하아!”

언월도와 대검이 맞부딪혔다.

반경 오십 미터 안의 모든 것이 가랑잎처럼 쓸려나갔다. 우리는 누구도 서로를 밀어내지 못했다.

백중세였다, 자로 잰 듯한.

나는 숨도 돌리지 않고 반격을 감행했다. 마그나크록은 언월도로, 때로는 불사의 능력으로 내 공격을 받아냈다. 전장의 지형이 검압에 휩쓸려 시시각각 바뀌었다. 우리는 몇 달 전 울토르와 마그나크록이 벌였던 격돌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우르술라가 난데없이 마그나크록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숨어있던 것처럼.

우르술라는 나와 재회할 때도 순간이동을 하듯 공간을 열어젖히며 등장했었다. 공간을 주무르는 게 그녀 고유의 권능이었다.

우르술라는 단검을 빼든 든 채 마그나크록의 머리 꼭대기로 이동했다.

불사신을 살해할 수 있는 세 가지 무기 중 하나.

이케이드를 살해함으로서 효용을 증명한 바 있는 그녀의 독문무기가 마그나크록의 두개골 안으로 쑤욱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아!”

거대한 에사인의 쩌렁쩌렁한 비명이 천지를 떨쳐 울렸다. 우르술라는 마그나크록이 사납게 몸부림을 치는 와중에도 균형을 유지하며, 단검을 몇 차례고 거듭해서 찔렀다. 이윽고는 그녀의 몸 전체가 머리카락과 같은 핏빛으로 물들고야 말았다.

"아하하하!”

우르술라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예까지 들려왔다.

나도 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우선 놈의 밑동을 후려쳐 자세를 무너뜨렸다. 비틀거리는 놈에게 최후의 일격을 선사하기 위해, 나는 카룩카이에게 선물받았던 마그나크록의 송곳니를 꺼냈다.

이것 또한 불사신을 살해할 수 있는 세 가지 무기 중 하나였다.

"멈춰라.”

갑자기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후드를 깊이 뒤집어쓴 검사였다.

"마그나크록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

그가 고풍스러운 검을 뽑아 내 턱을 겨누었다.

그는 크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도 아니었다. 새파란 전격이 그의 전신을 휘감아 흐르고 있었다.

인간 이상의 무엇,

그는 에사인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상식선으로는, 그리고 크롱크의 정찰 결과로도 마그나크록은 독립된 세력이어야만 했다.

별안간 이네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우리는 서부의 오지를 개척하며 수많은 미지의 신과 종족을 맞닥뜨렸다. 우리는 그들을 정복했으나, 곧 그 많은 의식을 하나의 방향성 안에 담아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그나크록이 정글 깊숙한 곳에서 칩거했던 게 설마 에사인끼리의 연대를 위해서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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