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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28화 (128/205)

128화. < 악어 사냥 (14) >

속이 너무 투명하게 들여다보여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뉴 텍사스는 우리에게 들이닥친 위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은 듯했다.

“무척 관대한 제안이로군요. 우선 자리에 앉으시죠. 우리가 어떻게 협력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건지 자세히 들어보고 싶습니다."

나는 헤인스에게 의자를 하나 권했다.

"각하께서는...”

"헌데 앞서 말씀하신 폭격기 말입니다.”

나는 헤인스의 말을 일부러 끊었다.

정보의 불평등은 관계의 불평등을 만든다.

우리가 뉴 텍사스를 모르듯이, 뉴 텍사스도 우리를 아직 모른다. 우리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에신어조차 구사할 줄 모르는 자를 전권대사로 보낸 건 뉴 텍사스의 명백한 실책이었다.

아니면 그들의 대통령 콜린 무어의 오만함일지도.

실책이건 오만함이건, 그런 실수는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값을 치르게 되기 마련이다.

"분명 현대과학의 정수가 담긴 위력적인 무기겠죠. 하지만 숲을 불바다로 만든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애꿎은 땅만 못쓰게 되는 게 아닌가요?”

“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적의 주둔지를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게 핵심입니다.”

"저희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적의 주둔지를 초토화시킬 수 있습니다. 잡병들을 견제할 수단은 저희에게도 많아요. 잡병들을 쓸어담는다고 해서 끝날 전쟁이 아니라는 게 문제인 거죠.”

이곳은 지구와 다르다. 병졸의 피해는 전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폭격기가 쓸모가 있어지려면 마그나크록이나 그의 장군들을 땅에 패대기칠 위력은 되어야 한다.

“UA가 파견한다는 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의는 감사하지만,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술법을 막아낼 방비책이 없다면 애먼 사람만 죽어나가게 될 겁니다.”

헤인스는 내 박정한 말을 듣고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물론 저희도 술법에 대한 대응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저희가 보내드린다는 폭격기는 평범한 폭격기가 아닙니다. 대마법 방호진을 관통하기 위한 탄두를 탑재한, 주술적인 첨단무기죠.”

"그런 무기가 있다면 동부전선으로 보내는 게 순서 아닙니까?”

동부전선이 아직 팽팽하다는 첩보를 들었다. 역병지기 오림이 홀로 동부전선을 틀어막고 있다지.

미사일 따위로 에사인을 때려잡을 수 있었다면 동부전선은 진작 황국의 패배로 끝났어야만 했다.

"동부전선은 현재 소강상태입니다. 저희나 황국이나 국운을 걸고 총력전을 벌이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귀국은...”

“저희도 총력전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럴 것 같았더라면 진소미 장군을 에신으로 불러들였겠죠."

우리는 총력전을 벌이는 중인 게 맞다. 그러나 굳이 그에게 사실을 일러바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언급했다시피 정보의 불평등은 관계의 불평등을 야기하니까.

"그리고 어디까지나 우의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황국을 결코 허투루 보지 마시길. 군대를 다른 곳에 돌릴 여력이 있으시다면 먼저 당면한 전쟁부터 끝내는 게 옳습니다. 저희가 병력을 아래로 내릴 수 있는 것도 서부전선을 정리해두었기 때문이죠.”

너희와 달리 우리는 일개 방면군을 정리했다. 우리가 너희보다 더 강하다.

라는 말을 외교적 수사로 에둘러 표현하면 이런 식이 된다.

“......충고의 말씀 감사히 들었습니다. 콜린 무어 대통령께 각하의 선의를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별말씀을,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사태가 여의치 않으시다면 저희 쪽에서 군대를 내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곳 정세가 워낙 급변하지 않습니까.”

마침내 헤인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게 될 줄은 몰랐겠지.

반면 보고 싶던 모습을 보았기에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붙들어매는 중이었다.

그러게 왜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버릇없이 숟가락만 꽂으려고 드나.

마그나크록의 모가지는 온전히 우리의 위업이 되어야만 한다. 설령 마그나크록을 당해내지 못해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시체 위에 남의 잔칫상을 차려줄 순 없었다.

아무래도 미국은 저쪽 세계에서의 버릇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국제경찰을 자처하며 다른 사람 미끼에 입질하는 버릇.

헤인스와 만난 지 다섯 시간쯤 흘렀을 때였다. 료헤이가 규합한 용병부대가 드디어 최전선에 도착했다.

내가 집결시킨 정규군의 숫자는 5만.

용병부대는 그 절반이 넘는 3만에 달했다.

급조한 부대의 규모가 이렇게나 크다는 건 난민 숫자가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뜻이다.

나는 아길리와 함께 용병부대의 사열에 나섰다. 병사용 갑옷을 입은 채 암행하는 비공식 사열이었다.

"...료헤이가 분발했는걸."

얼마 둘러보지 않아도 료헤이가 일 처리를 잘했다는 걸 알겠다. 그 꾀죄죄하던 난민들이 제법 군인 티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제식훈련을 시킬 시간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군기만큼은 정규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용병들은 행군이 고되었는지 여기저기 퍼질러 앉아 숙영지를 시장통으로 만들어버렸다.

용병들의 사이사이 유난히 눈에 띄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병사들과 달리 자신만의 갑옷을 걸쳤다. 무기도 제각각이었는데, 마력이 부여된 고가의 무구임이 분명했다. 그들은 척 보기에도 계급이 높아 보였고, 그것을 증명하듯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바닥에 주저 앉은 병사들을 걷어차고 다녔다.

"저자들은 누굽니까?”

“장교입니다. 장교를 따로 선발할 시간이 없어서 이름이 알려진 모험가나 방랑전사들을 선임했다고 들었습니다.”

모험가는 전사들과는 결이 다른 족속들이다. 전사는 귀족이나 에사인의 밑에서 조직생활을 하지만, 모험가는 문자 그대로 새처럼 대륙을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들은 명예를 중시하지도 않았고, 에사인을 열심히 따르지도 않았으며, 오직 타고난 실력을 갈고닦아 부를 축적하는 걸 인생 제일의 목표로 삼았다.

그들이 공화국의 부름에 응한 이유는 료헤이가 용병 일의 보수를 후하게 책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장교 중에 제가 알만한 이름도 있습니까?”

“쌍날의 메르, 큰주먹 오웬 정도가 유명합니다만, 스트리아 출신의 싸움꾼이라 주군께서는 모르실 것 같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하긴 내가 알 정도로 유명한 모험가가 이런 변방에 몸을 의탁하러 올 리가 없겠지.

아길리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지휘막사에 도착했다. 활짝 열려있는 천막 안에 료헤이가 보였다.

그는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비단으로 일본도를 닦는 중이었다. 마치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누구냐?”

두 명의 초병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모험가가 아니라 난민 중에서 징발해온 자들이었다.

“들여보내라.”

료헤이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그는 투구를 썼는데도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나는 아길리와 함께 지휘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막사에는 도검 거치대와 좌선용 다다미 한 장 말고는 아무것도 둔 게 없었다.

나는 투구가리개만 들어 올려 료헤이를 바라보았다. 료헤이는 칼날에 앉은 먼지 한 가닥까지 꼼꼼히 닦아낸 뒤에야 비로소 내게 눈길을 주었다.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나.”

"너 일을 꽤 잘하더라.”

"시키니 했을 뿐이다.”

“시켜서 한 것치고도 잘했어. 일본에서도 상당히 높은 지위였다지? 그쪽이 널 중용했던 이유를 알겠던데.”

“......너답지 않군.”

"나다운 반응은 어떤 거기에?”

"사람은 잘 부리지만, 칭찬에는 인색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지난 행적을 잠시 돌이켜보았다. 과연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추켜세운 적은 드물었던 것 같긴 했다.

"반성하도록 하마.”

"괜찮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곧잘 하지만, 사람을 쓸 줄은 모르는 일본 관료들보다는 백배 나으니.”

나는 의자를 하나 가져와 앉았다.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기에 자연히 내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형국이 되었다.

“널 찾아온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는 급조한 용병부대의 쓸모에 대하여 의견을 구해보고 싶어서.”

“그런 이유였다면 내 보고를 기다렸어도 됐을 텐데.”

"두 번째 이유 때문에 안 돼. 그건 네 프라이버시를 지켜줘야 하는 거라.”

“...좋다. 용병부대의 쓸모에 대해 물었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전력 외다. 이런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느니 차라리 혼자 싸우는 걸 택하겠다.”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용병들로는 광기에 충만한 야생 크록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건 직접 확인했던 바였다.

"두 번째, 너 승진했어.”

"승진이라고?”

“일을 잘 처리해줬으니 보상이 따라야겠지. 이제부터 넌 두 계급 승진해서 병장이 되었다, 료헤이 병장.”

"감흥은 없군.”

"승진했으니 하는 말이다만, 슬슬 네 애매한 포지션을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넌 균형의 에사인의 계시가 내려올 때까지 날 지켜보고 싶다고 말했었지? 어때, 계시가 있었나? 날 지켜볼 시간은 충분히 가졌던 것 같은데.”

료헤이는 대답 없이 수염이 까슬까슬한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수염이 무척 어울리는 얼굴형을 지녔다.

면도를 단정하게 한 것보다 저렇게 듬성듬성 수염이 돋은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로.

"계시가 있었다.”

료헤이가 검을 들어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그는 거울처럼 잘 닦인 칼날에 자신의 턱수염을 여러 각도로 비춰보며 말했다.

"균형의 계시는 아주 내밀하지. 그분은 결코 성도의 입을 빌려 계시를 내리시지 않는다.”

"성도의 입을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어느 날 너무 눈에 밟혀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불균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 닥쳐오기 전엔 모른다. 앞산의 능선일 수도 있고, 일그러진 해안선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이 눈에 밟히다 못해 잠을 이루기 힘들어질 정도로 심해진다면 그것이 바로 계시다.”

...그건 그냥 편집증 아니냐?

나는 료헤이의 엄숙한 표정 앞에서 차마 반문을 하지 못했다.

"내겐 오래전부터 눈에 밟혀온 게 있다. 세계를 이루는 힘의 불균형이다. 나는 한때 그 균형을 되찾아줄 사람이 천황일 것이라 여겼으나, 알다시피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지. 나는 너와 진소미 님이 힘을 합친다면 이 세계에 진정한 균형을 되찾아줄 것이라 여기고 있다.”

그가 칼날에서 시선을 거두어 나를 쳐다보았다.

"만족할만한 답이 되었나?”

"한 가지만 더 묻자. 알다시피 지금 일본 사정이 좋지 않다. 부패의 에사인에게 안에서부터 잠식당하고 있지. 네 일본 국적이 말소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만약 모국에서 널 다시 부른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나는 그들에게 빚진 게 없다. 꼭두각시에 불과한 환생자를 내세워 신의 아들을 참칭했을 때부터 그들은 나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는 일본을 거론하는 것조차 불쾌해하는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를 믿고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져 갔다. 나는 이쯤에서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야겠다고 결정했다.

"료헤이, 알다시피 나는 공화국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는 대답 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침묵으로 신뢰를 표현하는 그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다수 에사인의 집합체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구상이지. 꼭 에사인이 아니더라도, 나를 따르는 장군들은 국민적인 선망의 대상이 될 거다. 함께 후대에 길이 남을 업적을 하나하나 이뤄가면서, 공화국이라는 사회 자체에 대한 신망을 키우는 역할이다. 나는 내 구상 안에 네가 들어왔으면 한다.”

"어떻게 말이냐.”

"마그나크록의 공격을 막아라.”

나는 그를 마주 쳐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로켄의 일격도 받아냈던 너라면, 마그나크록의 언월도도 멈추게 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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