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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27화 (127/205)

127화. < 악어 사냥 (13) >

요새도시로 파견되었던 주력군이 수도로 돌아왔다. 주력군이 돌아와 전열을 가다듬을 동안 마그나크록의 군대는 고작 산 한두 개를 넘었을 뿐이었다.

차를 타고 사흘이면 닿을 거리였다. 놈이 늑장을 부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참모들끼리 의견이 갈렸다.

마그나크록이 여유를 부린다는 둥, 전쟁이 목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둥 다양한 의견이 나왔으나, 참고할만한 의견은 카룩카이에게서 나왔다. 그는 마그나크록의 장군 출신답게 저쪽 사정을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야생 크록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 먹거리를 전적으로 수렵에만 의존하니 한데 뭉쳤을 때 대군을 먹일만한 방법이 마땅치 않지.”

"십만 군대도 못 먹일 만큼 보급사정이 열악한가?"

"방법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일꾼들이 부족에 남아서 식량을 조달하니까. 문제는 원정에 나서는 경우다. 정글에 흩어진 부족들이 원정 중인 군대가 어디에 가 있는 줄 알고 식량을 가져다주겠나.”

"미개하구만.”

“부정하지 않으마.”

카룩카이가 고향 디스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자기 부하를 산 채로 잡아먹던 크록 장군을 떠올려보면 저쪽에는 사회를 떠받치는 제도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하긴 그런 게 있었더라면 부족이 아니라 왕국을 만들어 살아가고 있었겠지.

덜컥.

박이나 비서실장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참석자들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돌린 후, 내게는 찻잔과 함께 고이 접힌 종이를 넘겨주었다.

"료헤이 님의 전언이에요.”

시대가 어느 때인데, 편지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걸 보면 미개하기로는 우리도 만만찮았다.

정기호와 소미가 자리를 비운 탓에 요새도시는 료헤이가 맡아 관리하는 중이었다. 매사 꼼꼼하고 빈틈이 없어 행정업무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는 소문이 예까지 돌았다. 쓸데없이 예민한 게 꼼꼼하다고 포장이 된 게 아닐까 싶다만.

- 요청한 대로 난민과 말라붙이를 전력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 후술할 두 가지 이유로 기한 내에 임무 완수가 어려우리라 전망된다.

- 우선 말라붙이는 아직 우리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들은 씨족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우리 측 공무원들의 통제를 따르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종족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고, 자신들이 크록보다도 더 우수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기반이 주어진다면 스스로 자신들의 나라를 세울 수 있으리라고 여긴다.

- 인간은 사정이 더 복잡하다. 현재 요새도시에는 황국에서 넘어온 출신과 과거를 알 수 없는 걸인들이 득시글대고 있다. 이들 중에서 쓸 만한사람을 추려내려면 선별작업에만 몇 달이 걸릴 것이다.

-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우리가 선별하는 게 아니라 저들이 먼저 지원하게끔 하는 거다. 전쟁에 나갈 용병을 구한다고 하니 전투경험이 있는 전사 2천 명이 하루 만에 몰려들었다. 최소한 무기 정도는 들려놓아야 할 것 같아서 남는 공사자금을 무기와 갑옷을 만드는 데 돌리는 중이다.

나는 빈 종이를 꺼내 료헤이에게 답신을 작성했다. 기나긴 녀석의 편지와 달리 내가 써넣은 건 한 문장뿐이었다.

- 말라붙이는 나중에 따로 대화를 나눠보기로 하고, 인간은 선별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첩자가 끼어있어도 괜찮다. 범죄자가 섞여있어도 된다. 어차피 그들에게 맡길 임무는 전투가 아니었다.

필터링은 전쟁이 끝난 후에 해도 되고.

그들은 일단 공화국이 어떤 나라인지, 어떤 자들이 이 나라를 이끄는지 한번 보고 겪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의 손에 의해 마그나크록이 쓰러진다면, 그 위업은 첩자들의 입을 타고 내륙 곳곳으로 전해질 것이다.

며칠 뒤, 정찰병이 마그나크록의 군대가 속도를 내고 있음을 알려왔다. 보급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한 모양이었다.

덩달아 진영의 분위기도 긴박해졌다. 그들의 행군속도로 미루어 조우하기까지는 약 일주일이 남아있었다. 나는 이때부터 바깥에 마련된 막사에서 일과와 숙식을 같이했다.

디데이 엿새 전, 늦은 시간에 막사에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하얀 머리카락과 귀여운 보조개를 가진 소년이었다.

"아르세니오, 네가 여긴 웬일이니?”

"전쟁이 났잖아요. 저만 뒷짐 지고 구경할 순 없죠.”

아르세니오가 씩씩하게 오른팔을 돌려보았다. 그는 퇴원해서 지금은 물리치료와 마법사 훈련을 겸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무의식중에 팔을 특정한 각도 이상으로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객기 부리지 마라. 넌 아직 더 쉬어야 해.”

“짐이 안 되게 할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거예요.”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라도 빨리 마법을 배워서 어엿한 마법사가 되는 거야.”

"그 일은 너무 오래 걸려요. 저 같은 아이라도 당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어요?”

"아르세니오...”

"절 황자님의 종자로 임명해주세요. 그러면 귀찮게 해드리지 않을게요.”

아르세니오가 간절한 어조로 부탁했다. 아무래도 진짜 방문 목적은 이것이었던 것 같다.

그의 말마따나 귀족이나 노련한 전사들은 종자를 전장에 대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시동이나 할 재목이 아니었다. 앞날이 창창할 마법사를 최전선에 내보내 죽도록 만드는 건 국가적인 손실이었다.

“표정 보니까 안 들어주실 것 같네요.”

"그래, 이유는 너도 알고 있겠지. 황자는 내가 싹싹한 애로 골라서 시중을 들도록 하게 하마.”

"제가 아니면 안 되는데...”

아르세니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왜?”

"최근에 황자님하고의 관계가 점점 소원해지고 있어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죠. 힘을 잃은 저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고아에 불과하니까요. 백날 천날 노력해도 예전의 그 힘을 다시 되찾을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당장 다른 쓸모라도 증명하지 못하면 금방 버려지고 말겠죠.”

"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가 의식이 없을 동안 우르가 널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황자님이 절 살리려고...노력했다고요?”

아르세니오의 하늘색 눈동자가 큼직하게 떠졌다.

"그래, 다른 사람이 봤으면 너희가 서로 가족인 줄 알았을 거다. 가족한테도 그렇게는 못하지 않나? 자기 대신 살려내라는 말까지 했으니까. 네가 모르고 있는 걸 보니 밝히고 싶지 않았나 본데, 괜히 내색하지 말고 잘해줘. 너희 둘 관계는 아무 문제없으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라힐 님.”

아르세니오가 미소를 지으며 막사를 달려서 빠져나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이상한 의문이 들었다. 황자와 아르세니오가 어떤 관계인가 하는.

예전의 황자는 지금처럼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삼상회라 불리는 귀족집단의 우두머리로서, 황제를 대리해 피도 눈물도 없는 철권통치를 주도했다.

아르세니오는 그런 황자를 무장해제시키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 나는 아르세니오의 존재가, 그가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더럽혀진 내게도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삼았다.

황자는 아르세니오를 구원의 표식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아르세니오는 황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는 왜 황자에게 매달리고 있을까?

두 사람에 대한 의문은 곧 뒷방으로 밀려났다. 그것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박이나 실장이 다녀간 탓에 책상 위에는 군무와 관련 없는 서류들도 가득했다. 나는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서류더미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문득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수선한 발소리도.

나는 고개를 들어 입구에 드리운 천 사이를 투과하는 태양광을 쳐다보았다. 어느덧 날이 밝아있었다. 앉은 자세로 밤을 새워몬 건 또 간만이었다.

"대통령님, 방문객이 오셨습니다.”

초병이 막사 입구를 슬쩍 젖히며 보고했다.

"박이나 실장이면 오늘은 파업이라고 전해주세요.”

“뉴 텍사스 국가안보 보좌관이신 콜턴 헤인스 님이십니다.”

이 타이밍에 콜턴 헤인스가?

마침 대한민국에서 미국과 불미스러운 일로 얽혔던 탓에 그를 만나기가 껄끄러웠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금발머리의 훤칠한 사내가 천막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크록으로 가득한 숙영지 안에서 홀로 값진 양복을 걸친 모습이 무척 이질적이었다.

오늘 그는 통역사도 한 명 대동했다. 안면이 낯익은 걸 보니 우리 쪽에서 붙여준 통역사인 모양이었다.

"대통령 각하, 간밤에 강녕하셨습니까.”

"예, 덕분에.”

"근래 대한민국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일로 들르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경제 협력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뉴 텍사스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는 것만 밝혀두겠습니다.”

"그렇군요.”

헤인스가 우호적인 미소를 지었다. 전형적인 정치인의 미소였다. 대한민국의 정치인과는 지향점이 같아 대화를 나눌 만했으나, 헤인스처럼 밑도 끝도 없는 자를 상대하려면 심력소모가 상당했다.

"그걸 여쭈러 오신 건 아닐 테고,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으십니까?”

"보아하니 에신 공화국은 전쟁을 준비하는 중인 것 같군요.”

"예, 보시다시피.”

"상대가 마그나크록이라는 오래 묵은 에사인이라고 들었습니다. 각하의 역량을 의심하는 건 아니나,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공화국으로서는 벅찬 상대이지 않을까 저어됩니다.”

장담할 수 없는 상대인 건 맞다.

그러나 헤인스가 우리나라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물어본 건 아닐 터였다.

"달리 신경이 쓰이는 점이 있으십니까?”

"괜찮으시다면 뉴 텍사스 대통령께 전권을 위임받은 대사의 자격으로 조언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각하께서 부재중이신 사이 모든 서류상의 절차가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에신 공화국이 이제 정식으로 UA의 일원이 되었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헤인스가 만면에 희색을 띠며 악수를 건넸다.

UA란 에신에 진출한 국가들을 아우르는 세계정부의 준말이었다. 가칭이라고는 하는데, 별 일이 없는 이상 이 이름으로 쭉 갈 것 같긴 했다.

"좋습니다. 기대가 되는군요.”

"현 시점에서 공화국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는 회원국이 군사적인 도발에 직면했을 때 UA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UA의 이름으로 회원국을 보호하고, 파병여부를 의결합니다. 공화국이 비상임이사국 지위를 지니고 있는 이상 대통령께서도 이사회에서 발언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거 솔깃하게 들리는군요.”

"원하신다면 전술폭격기를 출동시켜 적군이 주둔 중인 숲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한 마디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헤인스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과연 대단하군요. 한마디만으로 수천억을 호가하는 전략무기를 내 손처럼 부릴 수 있다니.”

수천억에 호가하는 전략무기가 이미 에신에 들어와 있다는 점이 거슬린다.

이쯤이면 뉴 텍사스가 미국의 전초기지인지, 미국이 뉴 텍사스의 숙주인지도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조건이 없지는 않습니다. 아주 사소한 조건입니다만.”

나는 헤인스의 다음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앞서 오르세니오가 보여주었듯이, 본심은 항상 뒤에 나오기 마련이다.

"에신은 지구와 달리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불안정한 국면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상호협의가 오갔다는 가정하에, UA는 회원국에 군대를 파병해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고자합니다.”

"여기다 미군기지라도 만들자는 건가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대한민국과 미국의 협력관계를 에신에서도 재현해보자는 것입니다.”

헤인스가 예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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