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악어 사냥 (12) >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염두에 두고 있다고요?”
산자부 장관이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반문했다. 그는 이 이야기가 핵폭탄에 버금갈 중차대한 외교적 사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간 신종 마약의 공급원을 찾기 위해 국내의 첩보역량을 총동원해왔습니다만, 수많은 물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술법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낼 수 없었습니다. 허나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기반이 되는 땅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만약 저들이 미군기지를 거점으로 삼고 있다면 땅에 관한 의문이 모두 해소됩니다.”
"다른 나라도 아닌, 우리의 제일가는 우방국이 우리 땅 한가운데에서 협잡질을 벌이고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말씀에 책임을 지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하나의 가능성만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산자부 장관이 까칠하게 나오는 건 이해한다. 한미동맹은 정치적으로 너무 민감한 사안이라고. 선출직 공무원이 이걸 건드린다는 건 정치적인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하지만 난 한국의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정보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귀국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저희가 알아서 잘 해보겠습니다.”
"저희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요.”
김의호 대통령이 나서서 말했다.
“국민의 안전이 달린 일입니다. 국정원장께서는 공화국과 잘 공조해서 배후를 낱낱이 밝히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국정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황국만이 넘어서야 할 유일한 난관일 줄로만 알았다.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봤자 술법에 무방비하다면 에사인의 먹잇감에 불과할 테니.
그러나 과천 인근에서 벌어졌던 교전은 이러한 가정을 근본적으로 뒤집어놓았다. 지구상의 어떤 나라는 기술만이 아니라 술법적으로도 첨단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에 의해 세계정세는 향후 더욱 혼탁해질 것이다.
나는 회담을 마친 후 곧장 호텔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자 우르 황자, 우르술라, 아길리가 거실에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모인 김에 룸서비스도 시킨 듯 빈 술병과 접시가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아, 왔구나.”
우르술라가 소파에 앉은 채 고개만 뒤로 젖혀 알은척을 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느 것부터 듣겠느냐?”
“좋은 소식부터 듣죠.”
"네게 초대장이 왔다.”
우르술라가 두 손가락으로 엽서를 집어 내게 보여주었다. JSY 엔터테인먼트의 이름으로 보내진 예선 결승무대 입장권이었다.
"마침내 올 게 왔군요.”
엽서에는 똑같은 초대장이 여럿 들어있었다. 가족이나 지인들을 모조리 동원하라는 의도가 읽혀졌다.
동봉된 안내책자에는 초대석의 위치와, 결승무대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화려한 폰트로 쓰여 있었다.
- 당신의 손으로 미래의 스타를 만들 수 있습니다!
90여 명의 연습생이 참가하고, 경연 결과에 따라 최대 60여 명이 짐을 싸게 될 무자비한 프로젝트였다.
"이곳 인간들도 꽤나 유혈이 낭자한 취미가 있지 않으냐.”
우르술라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오디션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테일리시가 잘 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쁜 소식은 뭡니까?”
“아무래도 우린 그 애를 응원하러 가지 못할 것 같다.”
“다른 일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마그나크록이 북진을 시작했다는구나.”
그녀가 어조가 너무 태연자약한 탓에, 나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뒤늦게야 이해했다.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주군. 방금 본국에서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카룩카이 님께서 수도를 방비하기 위해 군대를 집결시키고 계신다고 합니다.”
수도에 전력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는 오르기, 료헤이, 이네스, 카룩카이, 크롱크, 막시무스, 끽해야 여섯뿐이다.
아르세니오는 힘을 모조리 잃었으니 전력 외인 상태고.
장군급 전력 여섯 명 가지고는 마그나크록은커녕 불사신인 마그나크록의 장군들을 감당하기도 벅찰 것이다.
"당장 돌아가야겠습니다.”
"우린 이미 준비를 마쳤느니라.”
그 말 그대로였다. 그들은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마친 뒤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았다.
나는 소지품을 가방에 쓸어 담은 후 일행과 함께 호텔을 나섰다.
아직 대한민국에서 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었다. 회담 일정도 남아있었고, 경제전문가도 찾아야했다.
장기적으로는 미국과 멕시코가 한반도에 드리운 그림자에 대한 조사도 해봐야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테일리시였다. 그녀의 오디션 결과에 대한민국과의 협약 전체가 달려있었다.
- 미안하다, 본국 사정이 좋지 않아 급하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 본선 일정에는 꼭 참여하도록 하마.
나는 메신저로 테일리시에게 귀국소식을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읽음 표시가 떴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가 에신으로 돌아갈 때까지 답신을 주지 않았다.
포탈을 통해 에신으로 돌아오자, 난리가 났다는 게 곧바로 피부로 와 닿았다. 요새도시를 짓느라 썰렁해졌던 수도가 정신없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인구 대부분은 무장을 갖춘 크록 병사였다.
철그럭, 철그럭.
카룩카이와 막시무스가 검은 갑주를 걸친 정예 크록 전사들을 대동하고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방금 소식을 보낸 것 같은데, 벌써 돌아올 줄은 몰랐다, 라힐.”
"나도 네가 마중 나올 줄은 몰랐다.”
"전사들은 마그나크록이 문명화되지 않은 크록들을 이끈다는 사실을 너에 대한 중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사태를 한시라도 빨리 바로잡아 신앙의 중심을 세워줘야만 한다.”
나도 공감한다.
태양은 결코 둘일 수 없다. 마그나크록과 나, 둘 중 하나가 쓰러지기 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추종자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기용가능한 병력은 얼마나 있지?”
“5만이다. 여기에 더해서 료헤이 일병이 3만 명 규모의 인간과 말라붙이 군대를 편성하는 중이다. 하지만 인간과 말라붙이는 아직 전장에 투입하기 이르다고 생각한다.”
“5만이 전부라고 생각해야겠군.”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남쪽 성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남쪽 망루에 마련된 지휘소에는 이네스가 먼저 와있었다. 그녀는 지도를 탁자 위에 잔뜩 늘어놓은 채 무언가를 분석하는 중이었다.
"라힐.”
이네스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별일 없나?”
"전황을 묻는다면, 그렇다. 내 머릿속을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하겠다.”
"머리가 왜?”
"마그나크록이 북상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후 강렬한 부정적인 감정이 내 머리를 헤집고 다닌다. 소멸한 영혼의 잔존기억에 불과할 뿐이라는 건 알고 있으나, 괴로운 건 어쩔 수 없군.”
이네스는 무수한 황국인의 기억을 짊어지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생전에 마그나크록을 악의 상징으로 여기며 두려워했을 것이다. 우르 황자조차 악몽을 꿀 정도였다고 하니 말 다 했지.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없고?”
“우선 마그나크록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예민하다는 걸 말해두고 싶다. 그는 우리의 정찰병이 자신을 염탐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군세를 다 회복하기도 전에 무리하게 군대를 이끌고 올라올 리가 없지.”
크롱크의 정찰병은 저들과 동족인 데다가 카멜레온처럼 주변 환경과 색깔을 맞추는 위장술까지 지녔다.
황국의 성읍까지 유유히 드나드는 암행의 달인들을 감지해냈다는 건 분명 메모를 해둘만한 지점이었다.
"저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최대로 잡아도 10만을 넘기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병력의 질은 우리가 압도하지만, 저들의 장군에겐 불사의 능력이 있다. 마그나크록을 빨리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병력피해가 극심해질 거다.”
"알고 있어, 울토르도 그것 때문에 고전했었지.”
크록의 전술은 단순했다. 불사의 힘을 믿고 들이대서, 지휘관의 모가지부터 날려버린다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이기 이를 데 없는 전술이었다. 특히 규모가 큰 전투일수록 지휘관의 부재는 큰 차이를 낳기 마련이었다.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건 마그나크록이다. 십만 군대를 합쳐놓은 것보다 마그나크록 한 명이 더 위협적이라고 본다. 만약 성벽을 끼고 싸울 생각이라면, 마그나크록이 성벽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누군가가 그를 막아야만 한다.”
지휘관들의 시선이 자연히 내게로 향했다. 흐름상 내가 나서야 하는 타이밍이겠으나, 나는 그 역할을 정기호에게 맡겨보고 싶었다.
하지만 정기호가 아쉽게도 미국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에, 나는 이번 작전의 수혜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만 했다.
"우르.”
“말하라.”
“마그나크록을 상대할 수 있겠냐?”
황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이냐고 표정으로 묻는 듯했다.
"너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했잖아. 지금이 그 기회라고. 네 악몽의 근원과 당당히 맞서는 거지.”
"그렇다면 에사인을 쓰러뜨린다는 위업이 내 몫이 된다. 위업에 따를 권능도 내 몫이 되겠지. 그래도 괜찮겠나?”
"김칫국 마시진 말어. 혼자 독식하기에는 만만찮은 위업이니까.”
"두고 보아라. 곧 네 백성들 모두가 내 위대함을 깨닫게 될 테니.”
황자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자신감만큼은 정기호 못지않았다. 나도 주눅 들어 있는 것보다는 당당한 게 더 보기 좋았다.
"내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거라.”
우르술라가 목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불길한 마력으로 충만한 단검을 허리춤에서 꺼내 오른손으로 쥐었다.
“이케이드를 쓰러뜨린 단검이다. 다음 제물은 울토르가 될 줄 알았다만, 마그나크록이라면 대체품으로 손색이 없지 않겠느냐.”
과거 울토르의 등을 찌르려던 형제의 손에 들렸던 단검이 바로 저것인 모양이다. 불사의 육신에도 충분히 위해를 가할 수 있을 만큼 사이한 기운이 흘러넘치는 무기였다.
“누님도 활약을 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불사신을 쓰러뜨릴 수 있는 무기를 가진 자는 총 세 명이었다.
나, 카룩카이, 그리고 우르술라.
신화 속 존재의 피를 손에 묻히게 될 유력한 후보군이었다.
"막시무스, 그건 어떻게 됐지? K-2 전차.”
"위대하신 분이 명령이 내려진다면 언제라도 전장으로 뛰쳐나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 뉴 텍사스에게 받은 원조금으로 K-2 전차를 오십 대 구입했다. 정비와 승무원 교육을 포함한 사후지원 일체를 보장받는 조건이었다.
지능이 높은 암살형 크록들이 속성과정으로 승무원 교육과정을 마쳤으나, 아쉽게도 아직 실전에 투입해볼 기회는 없었다.
“50대 모두 출진대기하라고 해라. 전차를 앞세워서 개전한다.”
120밀리 활강포에서 쏘는 포는 장군급 개체에게도 충분히 대미지를 줄 만큼 강력했다.
무엇보다도 전차가 가지는 그 압도적인 덩치.
크록 사회에서 몸의 크기란 곧 권력이었다. 얼마나 많은 크록들이 고기 한 점 제대로 못 먹어 빌빌대고 있던가.
반면 전사계급은 음식을 독점하는 것도 모자라 동족포식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크록들은 전차의 덩치를 가진 성능 이상으로 위협적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기병에게 허망하게 무너진 아즈텍 군대처럼.
“라힐, 알고 있겠지만 이번 전쟁에서 이긴 자가 크록을 통합하게 된다.”
이네스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크록의 유일한 종족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면, 마그나크록에게 부여됐던 권능 일부가 네게 이전될 것이다. 누가 마그나크록을 쓰러뜨렸건, 누가 영광의 관을 쓰건 상관없이.”
"라힐이 불사신이 된다는 말이더냐?”
이네스는 우르술라의 질문에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봅니다. 불사의 권능은 마그나크록의 고유한 능력입니다. 정확히 어떤 권능이 옮겨갈지 장담할 순 없으나, 여러 정보로 추측건대 한 가지만은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어떤 것인지 몹시 궁금하구나.”
"악어의 소유권입니다.”
"악어라고?”
반문한 건 나였다. 뜬금없이 지구에서나 쓰이는 단어가 나왔기에.
"그렇다, 이곳 말로는 가록이라고 하지. 가장 뛰어난 전사들만이 타는 게 허락된 대형 파충류다. 전승에 의하면 가록은 마그나크록이 자신의 살을 떼어 첫 번째로 만든 종으로서, 크록보다도 억세고 강하지만 지성이 없어 탈것 신세로 전락했다고 전해진다.”
기억난다, 마그나크록의 악어기수들.
검은 비늘을 가진 크록들 중에서도 가장 무시무시했던 녀석들이었다. 안장 위에서 중병기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은 악어가 아가리로 산산이 찢어발겼다. 인마일체라는 단어를 유감없이 보여주던 병종이었다.
심지어 카룩카이도 첫 만남에서 악어를 타고 나타났었지.
"실로 그의 안목이 정확하다.”
카룩카이가 입을 열어 촘촘한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크록의 진정한 역량은 가록을 탔을 때 발휘된다. 그들을 네 아래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불패의 에사인에 걸맞은 군대가 탄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