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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23화 (123/205)

123화. < 악어 사냥 (9) >

포탈, 그리고 던전.

두 단어를 결합하니 자연스레 미스테리가 풀렸다. 엘 드라고는 한국 어딘가에 포탈을 뚫어둔 게 틀림없다.

"미친놈들...”

욕이 절로 나왔다.

유통문제는 마약업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어떻게 하면 자기네 상품을 들키지 않고 운송할 수 있는가.

국경을 넘기 위해 땅굴을 파거나, 해경의 눈을 피하려고 잠수함을 동원하는 일 정도는 예사라고 들었다.

포탈을 뚫어두면 그런 문제가 일거에 해소되고 만다. 심지어 무장병력조차 적시적소에 투입할 수 있다.

그야말로 마약업계의 혁명이랄까.

아니, 운송업계의 혁명인가.

황국이 그러하였듯, 포탈은 앞으로 전략적인 요충지로서 긴요하게 다뤄질 것이다. 엘 드라고는 그런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곳곳에 던전이라는 이름의 뒷구멍을 뚫어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위치는? 지명은 들은 게 없나?”

"난 몰라, 이제 아는 건 다 말했다고!”

그가 팔다리를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계단 아래에서 남자 여럿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력을 연마한 자들은 아니었으나,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때려눕힐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엮이면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나는 이후 행동을 잠깐 고민했다. 이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말했다시피 어차피 죽을 놈이다.

이놈이 팔아치운 마약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한둘도 아니겠지.

그렇기에 더욱이 이대로 죽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아직 놈은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남아있었다.

"따라와라.”

"이거 놔, 놓으라고!”

나는 그의 멱살을 쥐고 옥상 모서리로 끌고 갔다. 그리고 훌쩍 뛰어내려 도로 위에 착지했다.

놈은 손에 닿는 건 닥치는 대로 쥐며 반항했으나, 그저 익스티아로 마력만 쌓았을 뿐 아무런 단련도 하지 않은 자는 일반인과 다를 게 없었다.

물론 총 든 일반인을 기준으로.

"계속 날뛰면 다리 하나 뽑고 가마.”

나는 놈을 질질 끌다시피 해 거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가 조수석에 던져 넣었다.

"안전벨트 매라.”

"너 지금 사람 납치하고 있는 거 알아? 납치죄가 약팔이보다 더 나쁜 건 알고 있냐?”

나는 차문을 쾅 닫은 후 운전석에 앉았다. 몇몇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이쪽을 쳐다보긴 했으나, 유홍가 뒷골목인지라 이 정도 소란은 대수롭잖게 여겨지는 것 같았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

나는 백미러로 후방을 살피며 차갑게 말했다.

"철없는 마약쟁이 뒤치다꺼리나 할 정도로 한가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부모님은 너 같은 놈이 죽어도 울어주실 테지. 최소한 인간이 아닌 것들한테 개죽음당하진 말라는 거다.”

"어, 어디로 데려가려는 건데.”

그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경찰서 유치장.”

"뭐? 내가 미쳤다고 경찰서에 가?”

"카르텔 눈 피해서 숨어살 자신은 있냐.”

"애초에 무슨 죄로 유치장에 들어가는데? 밀가루 팔아먹은 게 죄는 아니잖아.”

"잠깐 들어가서 머리 식힌다고 생각해, 그놈들이 너한테 관심을 거둘 때까지만.”

"나는 안 가, 아니 못 가.”

그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경찰서 들어가면 난 그날부로 아빠한테 맞아 죽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럼 어쩌려고?”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일본으로 날라야지. 마침 신주쿠에 아는 형님이 몇 있어. 예전부터 내 와꾸면 먹히고도 남는다고 그러셨으니까."

그가 다리를 달달 떨었다. 다시 불안증세가 도진 것 같았다.

"에이 씨, 며칠이면 나도 재미 즘 보는 거였는데, 하필 오늘 이 지랄이 나서. 이렇게 된 거 별수 없네, 뭐. 당장 짐 싸서 공항으로 달려가는 수밖에.”

"그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말 안 해도 그럴 거거든.”

그가 조수석에서 내렸다. 그는 떠나려는 듯하다가, 갑자기 창문턱을 쥐며 내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아저씨, 오지랖 부리는 것도 좋은데 옷 좀 잘 입고 다녀. 패션 존나 쉰내 난다고.”

그가 가운뎃손가락을 쑥 들어 올리더니, 건들거리며 거리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차를 몰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예상과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행동이었다.

클럽 MD들의 생리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그 하나만 놓고 봤을 때는 인생 견실하게 사는 부류는 아닐 것 같다. 걸친 옷가지나 장신구도 벌이만으로는 감당이 힘든 수준이었다.

아마 지금껏 부모 속을 엄청 썩였겠지. 그랬는데도 정신 못 차리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걸 보면, 이번 생에는 효도할 팔자가 아니라고 봐야겠다.

나는 차를 적당한 곳에 세운 뒤 다시 그의 흔적을 쫓았다. 그는 인적이 거의 없는 골목 구석에 틀어박힌 채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예, 형님.”

그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밤공기에 얹혀왔다.

"아니,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웬 미친놈이 술 처먹고 와서 물건 달라고 난동을 부리더라고요. 예, 예, 그래서 형님 말씀대로 즉시 보고 드리는 겁니다. 혹시 형님이 미친놈 하나 때문에 절 오해하실까봐요, 헤헤.”

그의 통화상대는 한국인 총판일 터였다. 발이 넓고 사업센스가 좋은, 조직으로 치면 중간급은 되는 인물이다.

“물건요? 물건은 그대롭니다. 제가 목숨 걸고 지켰다는 거 아닙니까. 저 아시잖아요? 깡다구 빼면 시체인 거. 종로는 제가 이렇게 꽉 잡고 있으니 걱정 마십쇼, 예...예? 지금 오신다고요?”

그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저는 기분이 좀 그렇잖습니까. 저 안 믿어주시는 거 같아서. 진짜로 오실 것까진 없겠는데요.”

멍청한 놈. 차라리 물건을 뺏겼다고 했으면 빌어볼 수는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씨발.”

그가 전화를 끊은 뒤 나직하게 욕을 내뱉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바닥에 떨어뜨리더니, 발로 거칠게 밟아 박살내버렸다.

그는 휴대폰을 완전히 뭉개버린 뒤 골목 반대편으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성의하게 건투를 빌어주었다.

- 띠리리리리.

약 5분 후, 나는 임택에게 받아둔 국정원 처리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안녕하십니까, 라힐 대통령님. 국정원 대테러보안국 이진기 과장입니다. 어떤 용무로 전화를 주셨는지요?

- 차량을 추적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물론입니다. 차번이 어떻게 되나요?

짙게 코팅된 그랜저 한 대가 골목길 앞에서 서행하는 게 보였다. 나는 그랜저의 번호판을 확인한 후 그에게 불러주었다.

- 며칠 동안 이 차가 어디로 다니는지 추적해주시면 됩니다. 차에 탄 인물 동선도 추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국정원장님께도 따로 보고를 올리려는데, 괜찮으신지요.

- 당연합니다. 결과에 따라 공조도 필요해질 겁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땐 새벽 2시가 넘어있었다.

휘이잉.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

난데없이 안면으로 휑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갈 땐 꺼뒀던 불이 대낮처럼 환했다. 커튼은 좌우로 쫙 젖혀졌고, 테라스는 활짝 열려있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냐?”

범인은 우르 황자였다. 그는 테라스에 몸을 기댄 채 캔맥주를 홀짝이는 중이었다.

게다가 그는 홀몸이 아니었다. 위압적인 덩치를 가진 사내가 그의 곁에 서있었다. 나는 뜻밖의 인물을 발견하고는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너는 또 거기서 뭘 하고 있냐.”

거구의 몸에 직각에 가까운 어깨를 가진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정기호였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나란히 서서 맥주를 대작하는 중이었다.

"간만이다.”

“이게 다 뭐냐? 취하지도 않는 걸 뭣 하러 퍼마시고 있어.”

"기분이지.”

우르가 갑자기 남은 술을 단번에 들이켜더니, 빈 캔을 거꾸로 들어 머리 위에서 흔들어보였다. 나는 얼굴을 감싸 쥐며 정기호를 타박했다.

“......대체 얘한테 뭘 가르친 거야.”

"대한민국의 문화.”

"부디 담배만은 손대지 말게 해라. 똥폼 잡는 건 너하고 료헤이면 충분하니까.”

"듣자하니 너는 담배보다 더한 걸 쫓으러 뛰쳐나갔다던데.”

"그래. 익스티아라고, 들어본 적 있을 거다. 남미에서 들여온 마약성 중독물질인데, 지금 이것 때문에 대한민국이 온통 난리다. 카르텔이 뒷문으로 포탈을 열었더라고.”

“놀랍지는 않군. 우리보다 에신에 먼저 진출한 나라들이 포탈을 활용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

"그렇지. 진작 생각했어야 해. 진작 생각했다고 해서 막진 못했겠지만.”

나는 정기호가 건네는 캔맥주를 건네받았다.

"그나저나 네가 왜 여기 있는지 대답을 안 해줬는데. 넌 지금쯤 방위요새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항명이라면 어쩔 테냐.”

"......."

"농담이다.”

나는 정기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늠은 농담을 너무 진지하게 해서 농담 같지가 않았다.

"소미가 말했을 텐데. 곧 아부다비에서 UFC 컨텐더 결정전이 열린다. 여기서 이겨야 챔피언에게 도전할 자격이 생기지."

"그런 게 이제 와서 의미가 있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널 만나기 전까지는.”

정기호가 악력으로 빈 캔을 우그러뜨렸다. 곱게 포개진 캔이 티테이블 위에 딱지처럼 쌓였다.

"사람 마음을 사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돌이켜보니 내게도 팬이라는 게 있더군.”

"하지만 머지않아 에신의 존재가 널리 알려진다면 격투기는 인기를 잃게 되지 않을까. 저편 세상엔 초인들이 드글대니 말이야.”

“그때가 되어도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그들의 챔피언과 우리 챔피언 중에서 누가 더 강할지.”

정기호가 호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격투기는 황국에서도 인기 스포츠라는 걸 말해두고 싶군.”

우르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둘은 벌써부터 죽이 척척 맞는 중이었다.

"좋아, 잘해보라고. 챔피언을 장군으로 둬서 나쁠 건 없을 테니.”

"그리고 크롱크가 네게 소식을 전해달라더라. 동부전선을 정찰해온 결과다.”

정기호가 티테이블 위에 올려둔 종이를 가리켰다. 종이에는 크롱크 특유의 비뚤비뚤한 글씨로 에신어가 잔뜩 쓰여 있었다.

- 라힐 님께.

- 에신 동부지역은 대부분 뉴 텍사스의 영토.

- 경계가 너무 삼엄하여 영상기록을 남기지 못함.

-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있음.

- 복수의 에사인이 뉴 텍사스와 관련되었다는 증언을 확보.

“......뭐냐, 이건?”

"네 예상대로 뉴 텍사스는 제2의 황국이 되고자 한다. 역병지기가 간신히 전선을 유지 중인 것 같으나, 에사인 숫자에서 밀려 오래는 못 버틸 것 같다는군.”

역병지기 오림은 다섯 번째 권능이다. 실체가 없이 병마를 몰고 다니는 특성 때문에, 본인의 힘과 별개로 상대하기 까다롭기로는 첫손에 꼽히는 자였다.

"좋지 않은데.”

나는 팔짱을 끼며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미국은 역시 미국이랄까. 도대체 어디서 그 넓은 땅을 채울 인구를 구했는지 모르겠으나, 에사인을 벌써부터 여럿 거느릴 정도라면 형세가 굳어졌다고 봐야 한다.

"일단 뉴 텍사스와 손을 잡기로 한 건 잘한 일 같다.”

"그게 그렇지가 않아. 말로는 세계평화다 뭐다 듣기 좋은 소리를 떠들지만, 하는 행동을 보라고. 이미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군대를 만들어놨잖아. 우리도 어서 두 번째 에사인을 배출하지 못하면 잡아먹힐 수밖에 없어.”

"그래서 네가 악어 사냥을 준비하라고 한 게 아닌가?”

"그렇지.”

"이네스가 전해달라는군.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정말이냐?”

정기호가 뜸을 들였다. 챔피언을 언급할 때엔 미동도 않던 그의 투기가 찌릿찌릿하게 고조되고 있었다.

“그래, 마그나크록의 소재가 파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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