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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21화 (121/205)

121화. < 악어 사냥 (7) >

나는 소미의 포스터에 경배하는 사제들을 바라보며 지구가 실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해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지금 이 순간도 내 손이 닿지 않는 어딘가에서 무시 못 할 강자들이 세력을 규합하고 있을 터였다.

소미의 말마따나 포탈은 열리지 말았어야했다. 그랬더라면 마법이나 술법이 삶을 바꿔놓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됐겠지.

그러나 일단 열린 이상 최선을 다해 경주하는 수밖에 없다. 뒤처진다면 이 못생긴 것들에게 지배당하는 미래가 기다릴 뿐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임택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정부요원으로 추측되는 인물에게 이곳의 상세주소를 가르쳐준 다음 전화를 끊었다.

"곧 국정원에서 처리반이 올 겁니다. 교전이 벌어질 때마다 정부와 협동해서 뒷수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눈을 언제까지나 속이진 못할 텐데.”

“안 그래도 촉이 좋은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중입니다. 이래서는 얼마 못 버틸 것 같다고 정부에 하소연도 해봤습니다만, 그쪽은 우리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더군요.”

정부가 바쁘긴 하지, 깡패 같은 주변국들에게 두들겨 맞느라.

임택이 더러워진 마체테를 시체의 옷에 비벼 닦았다.

다른 사내들은 땅에 널브러진 무기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유용한 장비가 많아보였으나, 대곡도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병사들이 써 먹을 순 없을 것 같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데, 후회는 없나?”

임택이 나를 스윽 올려다보았다.

어떤 의미의 질문이냐고 묻는 듯했다.

"당장 오늘 저녁에도 우리가 없었더라면 꽤 위험했잖아. 아직 젊은 나이겠다, 집안에 쌓아둔 돈도 많겠다, 아이돌 덕질이나 하면서 아무 걱정 없이 살던 시절이 그립지 않느냐는 말이야.”

"저는 좋아서 덕질을 한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너보다 소미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물론 처음은 좋아서 시작했던 게 맞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감정이 점점 집착으로 변해가더군요. 저는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그쪽은 절 바라봐주지 않으니까요. 나중에 가서는 관심을 끌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게 사생이잖아.”

“예, 저는 버러지였죠.”

임택이 담담하게 고백했다.

"진소미님은 저 같은 놈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제 손을 잡으시며 용서한다고 말씀해주셨을 때, 못난 임택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대신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뜬 새로운 임택이 태어났습니다. 지금 저는 과거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그분을 섬깁니다.”

"또 오버하는 건 아니고?”

"그분을 향한 사랑에는 지나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얼마나 사랑하건 그분께서는 그 이상을 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임택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에사인은 사랑하는 만큼 힘으로 돌려준다.

숭배의 보상이 명확한 에사인 신앙은 머지않아 지구상의 모든 이념과 종교를 휩쓸어버릴 것이다.

"지금 저는 그분의 소명을 받들어 세상을 보다 살만한 곳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누구도 가진 것으로 차별받지 않고, 쓸쓸히 죽지 않을 권리가 있는 세상 말입니다. 그분의 이상향을 세우는 데 보탬이 될 수만 있다면 저는 당장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이다.

이토록 강력한 결의를 가진 자라면 과연 수석사제가 되고도 남을 만하다.

임택은 소미가 강해질수록 덩달아 강해질 것이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제2의 아길리를 노려볼 법도 했다.

"며칠 후 소미가 귀국한다. 그때 널 만나고 싶어 할 테니, 죽지 마라."

그의 움푹 들어간 눈이 기쁨으로 빛났다. 그는 내게 다시 한 번 구십도로 허리를 꺾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돌아서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발목어림까지 찬 신경가스의 바다 속에서, 우르술라가 붉은 머리카락을 허리어림까지 늘어뜨린 채 서있었다.

문제는 그녀의 후드집업이 손에 들려있었다는 거.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매끄러운 상반신을 하얗게 비추었다.

"누, 누님, 뭡니까, 대체?”

나는 잽싸게 돌아서며 항의 아닌 항의를 했다.

우르술라가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너희들처럼 무기를 허공에서 끄집어내는 재주가 없지 않느냐. 모처럼 마음에 들었던 옷이 잡것들의 오물로 못 쓰게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원래 흰색이었던 후드집업이 빨갛게 물이 들어있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지근거리에서 튀는 피를 피할 재주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여기 눈이 몇 개인데.

"우선 이거라도 걸치시죠.”

나는 입던 셔츠를 벗어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자상하기도 해라.”

그녀가 셔츠를 걸치는 동안 나는 바닥에서 대곡도를 하나 챙겼다. 칼날에 새겨진 주술표식에 어떤 힘이 담겨있는지 연구를 해봐야할 것 같아서.

사제단과 접선한 후 우리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우르 황자가 대기실에 얌전히 앉아있는 게 보였다.

"아, 드디어 왔군.”

그가 대기실 의자에서 일어나자, 그의 곁에 앉아있던 젊은 여성이 따라 일어섰다.

"저들이 아까 말했던 일행이다. 이제는 가봐야 할 것 같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인연이 닿는다면 언제든지.”

"그러면 휴대폰 번호라도...”

여성이 우르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번호를 달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이미 관심부터 떠나있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성을 남겨두고 우리에게로 걸어왔다.

"왜 그렇게 쳐다보나?”

“저분은 누구시냐?”

“잠깐의 말상대였다. 질서의 궁에서 보아온 여인들과 달리 이곳 처자들은 무척 적극적이더군. 덕분에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 되었다.”

"한국어로 대화가 되던?”

"주로 듣는 쪽이었으나, 간단한 회화는 문제없다.”

“......네 가면을 가지고 왔어야 하는데.”

그녀는 우르에게 반한 게 분명했다. 그저 잘생긴 얼굴과 조각 같은 몸매, 이국적인 분위기, 사기적인 두뇌를 가지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을 뿐인데 말이지.

...이런 놈들이 활보하는 세상이 마법이 허용된 세상보다 더 두렵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냐.”

"많은 진전이 있었다. 올라가서 얘기하지.”

우르는 우르술라를 흘끗 쳐다보더니, 그녀가 내 셔츠를 입고 있음을 눈치 챘다.

"첫 번째 아내는 어쩌자고 여기서 정분을 내는 것이냐.”

"그거 헛소문이야, 믿어.”

우리는 내 방으로 룸서비스를 불러 식사를 함께했다. 다들 음식이 입맛에 맞아 다행이었다.

특히 아길리와 우르술라, 두 여성은 한식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김치를 두고 발효음식에 관한 진지한 논의가 오가기도 했다.

“박병철 장관이라는 자는 무척 합리적인 인간이더군.”

식사가 끝나갈 무렵, 우르가 서두를 열었다.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하마. 대한민국은 뉴 텍사스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차관을 주겠다고 한다. 삼백억 달러 이상의 지원금도 서면으로 약조했다. 다만 원조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에신의 존재를 이 세계에 널리 알린 이후를 전제로 한다. 자기들은 예산을 동의 없이 전용할수가 없다면서.”

"그렇지, 여긴 민주주의 국가니까.”

"민주주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누구도 특출하지 않으니 누구도 나서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제도라고 해야겠더군.”

“더 정확히는 서로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거지. 웃기게 들리긴 하겠지만 우리에겐 그만한 제도도 없다고.”

"장기적인 원조를 전제로 한 인적교류도 논의했다. 우리더러 쓸 만한 마법사와 주술사를 키워달라는 소리다.”

"당연하겠지. 안 그러면 다른 나라에게 잡아먹히고 말 테니까.”

소미의 사제단만으로는 타국의 도발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게 증명되었다.

미쳐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따라잡으려면 대한민국도 국가차원에서 마법사와 주술사를 양성해야만 한다.

"어떻게 우리의 존재를 사해만방에 알릴 셈일까?”

우르술라가 젓가락질을 멈추며 물었다.

“원한다면 내가 나서서 춤이라는 것을 춰볼 수도 있겠다만.”

그녀가 지그시 웃었다. 나는 그녀가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열렬한 마음의 소리를 고이 접어두었다.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두긴 했습니다. 첫 번째는 저 같은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공표하는 겁니다.”

"오호라.”

우르술라가 입술을 오므리며 추임새를 넣었다.

"하지만 이건 차선입니다. 실은 최악에 가깝죠. 우리는 가급적 이 나라에 부담을 덜 지울 방법을 생각해내야만 합니다.”

나는 김의호 대통령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주제에 공중파의 힘을 빌리자는 건 계약을 파기하자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판을 깔아준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뭇매를 맞게 될 테니.

"둘째로, 전파를 탈 수 없다면 소셜 네트워크 등의 뉴미디어를 통해 어떻게든 에신을 이슈화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행동에 옮길 방법이 뾰족하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어려운 단어가 많군.”

"나중에 설명해 줄게. 지금은 고를 수 없는 선택지라고만 이해하면 돼.”

바야흐로 뉴미디어의 시대다. SNS나 아이튜브 같은 새로운 플랫폼의 힘이 기존 미디어의 영향력을 압도하고 있다.

어떻게든 이 뉴미디어의 힘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좋겠으나,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내게 그런 창구가 있을 리가.

“세 번째는 뭐냐?”

우르 황자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세 번째 방법이 마지막인데, 내가 일군 결실이 아니라서 조금 꺼려지긴 한다.”

"어서 말해보려무나. 남이 일군 결실을 따먹는 게 왕의 일이 아니더냐.”

우르술라가 턱을 괴며 나를 채근했다. 아길리는 숟가락과 것가락을 양손에 쥔 채 눈빛만 반짝였다.

“소미나 테일리시의 인지도를 활용하는 겁니다. 소미 인기야 잘 아실 테고, 테일리시도 못 보던 사이 엄청나게 유명해졌더군요.”

"설마 너보다도 유명하다는 것일까?”

"저는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음, 이렇게 설명 드리죠. 닷새 전에 테일리시가 출연한 오디션 영상의 조회수가 1억이 넘습니다.”

우르술라의 눈동자가 둥그래졌다. 우르도, 아길리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예, 엄청나죠. 중복집계를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숫자입니다.”

- 전 세계 사람들이 지금 피노키오 아빠가 된 심정으로 소녀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다는 거 아니겠냐.

- 1년차 신인이 1등까지 하면 그건 정말 역사를 다시 쓰는 거고.

이상민이 테일리시에게 존함 운운할 때만 해도 호들갑이 심하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JSY 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한 오디션이 현재 세계인의 핫이슈임엔 분명했다.

만약 테일리시를 통해 대중에게 단계적으로 에신을 개방할 수 있다면.

그녀의 좋은 이미지와 공화국을 엮어서 우리를 선역으로 포장할 수만 있다면.

"이 방법을 쓰려면 테일리시가 1등을 하는 게 그림이 더 나올 겁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인지도를 사용하는 걸 동의해줘야겠죠."

"일단 나는 찬성이다.”

무얼 떠올렸는지, 우르술라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 바보가 1억 인간들의 앞에서 소원을 비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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