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악어 사냥 (6) >
물으면서도 이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얼빵하던 놈과 눈앞의 사내는 외모부터 풍기는 기세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아무리 내가 암살자로 볼 꼴 못 볼 꼴 다 봤다지만 사람이 변해도 정도가 있지.
"그래, 나다.”
그가 이를 아드득 갈며 말했다. 이때부터는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소미 쓰레기통 뒤지면서 사랑의 징표 운운하던.......그놈이 너라고?”
"저 자가 수석사제님을 음해하는군요.”
임택의 좌우에 선 사내들이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그가 수석사제 자리에 오르며 상당한 이미지 세탁이 이루어진 것 같았다.
"닥쳐!”
그가 사납게 외치며 권총구를 내 이마를 향해 정조준했다.
"하루도 그 일을 잊은 적이 없다. 그때는 테일리시님을 뵙기 전이라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를 것이다.”
"당찬 사내로다.”
우르술라가 흡족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 메모리카드, 노트, 다이어리, 어디 뒀나.”
"버렸어, 파쇄해서.”
“그걸, 그걸 파쇄했다고!”
그가 침을 튀기며 눈을 망둥이처럼 부릅떴다.
"네가 모시는 분 아니냐. 그런 짓이 폐가 된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냐.”
"시끄러, 나는 진소미님을 향한 일체의 삿된 욕망을 버렸다! 그분은 감히 나 따위의 애욕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나는 어디까지나 내 재산권을 행사하려는 것뿐이야.”
"퍽이나.”
거짓말 센서가 마음속에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못 보던 새 거짓말실력도 많이 느셨구만.
하긴 사랑으로 출발한 감정이 그리 쉽게 바뀌겠어. 암만 뒤틀린 사랑이라고 해도 사랑은 사랑이지.
여전한 면모도 있었다.
소미를 향한 집념.
저 타오르는 집념이 정신과 육신을 개조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면, 팬심이 공히 신앙의 영역에 접어들었다고 인정 해줘야할 것 같다.
"네가 뭔데 내 충심을 비웃나.”
그가 몸을 부르르 떨며 권총을 꽉 쥐었다. 상당한 마력이 그의 발을 중심으로 동심원처럼 방출되었다.
"주군.”
아길리는 고개를 돌리며 나를 나직하게 불렀다. 나는 알고 있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오호라. 지구에도 꽤 하는 자들이 있지 않느냐.”
우르술라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들이 언급한 건 임택이 아니었다. 다수의 적대적인 기운이 차량을 타고 이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어이, 준비해라.”
나는 임택과 두 사내에게 말했다.
"곧 적습이다.”
"적습이라고?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임택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길리가 허공에서 다가트의 성물을 끄집어내는 걸 보고는.
나도 울토르의 대검을 불러들였다. 헤아릴 수 없는 원령을 집어삼킨 창백한 날이 음울한 마력을 흩뿌리며 소환되었다.
“대, 대체 너희들은 뭐냐?”
그가 당황해서 물었다. 나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그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마력을 개방해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이 태풍을 맞은 듯이 정신없이 휘날렸다. 그는 간신히 자리를 지켰으나, 좌우 두 사내는 마력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진소미가 보내서 왔다. 너희가 엘 드라고 카르텔과 싸우고 있다던데, 지금 다가오는 놈들이 그놈들이냐?”
"진소미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오직 라힐님 뿐인데...당신은.......설마 당신이......”
임택이 입을 쩍 벌리며 실어증이 온 사람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그 설마가 맞다.”
나는 씩 웃으며 긍정했다.
"그리고 소미를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네 생각보다 많아.”
그는 충격을 받은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잠시 후 이를 꽉 악물더니, 구십도로 허리를 꺾으며 외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귀인을 몰라보고 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한 거 알면 됐다. 잡담은 나중에 나누고, 일단 불청객부터 처리해보지. 이런 규모의 습격을 받는 게 종종 있는 일인가?”
“적의 규모가 얼마나 됩니까?”
그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저 노련한 눈빛은 여전히 생경하다. 내 머릿속에서 그때 그의 이미지를 비우기 전에는 적응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마흔, 아니, 쉰인가.”
"많이도 왔군요. 최근 테일리시님이 바빠지신 후로 엘 드라고 놈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대규모 습격도 몇 차례 있었지만, 지금처럼 안가가 직접 공격당하는 경우는 처음입니다. 아무래도 정보가 중간에서 새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쿵.
그가 가게 바닥을 발로 힘껏 찼다. 합판으로 만든 비밀문이 달그락거리며 윤곽을 드러냈다. 그는 문을 기민하게 열어젖혀 감춰진 공간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정부는 뭘 하고?”
"정부는 물자를 지원해주는 게 전부입니다. 진소미님께서는 일반인이 나서봤자 피해만 키운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임택의 손을 따라 다른 두 사내가 라이플과 탄통을 착착 이어받았다.
이어서 방독면, 방탄모, 방탄복, 장검, 야시경이 등장했다.
마지막으로 나온 건 소미 굿즈였다. 소미의 얼굴이 프린트된 포스터를 방탄복 사이에 끼워 넣자 모든 무장이 완료되었다.
무장을 완료하고 엄폐물로 이동하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삼십 초 가량.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훈련 상태만 놓고 보자면 어지간한 크록 전사를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옵니다.”
아길리가 짤막하게 말했다. 사제단원들은 예상 진입점을 향해 총구를 조준했다.
이십 평 남짓한 공간에 터질 듯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쨍그랑.
별안간 유리창이 터져 나가더니, 작달막한 막대기가 연기를 내뿜으며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막대기는 핀이 나간 소화기처럼 빙그르르 회전하며 백색 연기를 사방팔방으로 뿌려대었다.
가스 수류탄.
화생방 체험을 해봤을 때 말고는 본 적도 없는 물건이었다. 이런 위험한 무기가 대한민국 복판에서 터지는 상황이 마법보다도 훨씬 초현실적이었다.
물론 신경가스 따위로는 우리를 어쩔 수 없다. 마력은 기본적으로 몸에 해로운 물질을 중화하려는 성질을 갖기에.
"기분이 나쁜 연기로구나.”
우르술라가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며 말했다. 아길리는 뿌연 연기에 휩싸인 채 기침을 콜록거렸다.
“주군, 가급적 연기를 마시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생각이 바뀌었다.
평범한 가스탄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주술이 가미되어 있었다.
코로 들어오는 순간 기도 안쪽이 따끔따끔해졌다. 내게 이 정도 자극을 불러일으킬 정도면 웬만한 전사들은 가스를 맡는 것만으로도 무력화되고 말 것이다.
생각해보니 엘 드라고 카르텔은 멀쩡한 밀가루를 마약으로 바꾸는 기적의 연금술을 구사하는 놈들이었다.
그들이 주술적인 화학무기를 사용한다하여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철컥, 철컥.
이어서 카메라 셔터음과 흡사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소음기를 장착한 소총이 격발되는 소리였다.
총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납탄이 허공에 멎은 채 뱅글뱅글 돌아가는 게 보였다.
총알은 내가 두른 마력을 어쩌진 못했으나, 마력과 상충반응을 일으키며 연기 속에서 번쩍번쩍 푸른 불꽃을 튀겼다.
총알조차도 주술적 가공을 거친 물건일 줄이야.
탕, 타타탕.
사제단의 응사도 시작되었다. 임택은 사격 중간에 마력을 집중해 작살 같은 공격마법을 쏘아 보냈다. 저들은 즉시 방어마법을 전개해 맞섰다.
나는 지금 벌어지는 전투가 인류가 머지않아 맞이할 미래라는 걸 직감했다.
테크놀로지와 주술력이 결합된 하이브리드형 전장.
전술적으로나 무장으로나 이들은 내 군대보다 한참 앞서있었다.
잠시 후 전면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며 거구의 돌격병들이 난입했다. 크록을 작아보이게 만들 정도로 무지막지한 덩치를 가진 자들이었다.
마치 성벽을 허리에 감은 듯한 두터운 세라믹 방탄판.
고글이 장착된 방탄모는 머리 전체를 완전히 감싸고 있어 흡사 면갑을 연상시켰다.
놈들의 주무장은 초승달처럼 휘어진 대곡검이었다. 대곡검의 날에 주술적인 표식이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
나는 테일리시가 왜 무리한 일정을 쪼개서 직접 사냥을 다녔는지 깨달았다. 이런 괴물 같은 놈들을 대한민국 군대에게 맡겼다간 대참사가 불가피했다.
사제단의 총격이 빗발쳤다. 그러나 급소를 정확히 맞추지 않는 이상은 치명상을 입히기 힘들어보였다.
놈들은 흡사 갑주를 씌운 코뿔소 같았다. 놈들은 대곡검을 바닥에 늘어뜨린 채 온 몸으로 총탄을 받아내며 저벅저벅 걸어왔다.
“하아!”
아길리가 자리를 박찼다. 그녀의 양손도끼가 가장 앞장선 전사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놈은 아길리의 일격에 반응해 방어자세를 취했다.
뻐어억.
대곡검이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우그러들었다. 놈의 나무등걸 같은 팔도 함께 휘어졌다.
아길리는 비틀거리는 놈에게 확정타를 꽂아 넣었다. 그녀의 도끼는 세라믹 방탄판, 몇 겹에 달하는 방탄섬유, 두터운 몸통과 뼈를 단숨에 쪼개고도 힘이 남아 바닥까지 뭉개놓았다.
크르르르.
다른 놈이 흡사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내게 쇄도해왔다. 나는 울토르의 대검으로 놈의 복부를 단번에 꿰뚫었다.
흡사 바위에 검을 박아 넣은 것만 같았다. 장비의 방호력도 방호력이지만, 피골조차도 돌처럼 단단해 도저히 살아있는 생물 같지가 않았다.
우르술라는 맨손으로 싸웠다. 그녀가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허벅다리를 뻗을 때마다 카르텔 돌격병들이 건물 벽을 부수며 나가떨어졌다.
저런 흉포하기 짝이 없는 모습마저 아름답다고 느끼는 걸 보면 나도 아직 사회화가 덜 된 게 분명했다.
적들은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사상자를 남겼다. 일단 건물 안에 들어온 눔은 다 죽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바깥에서 조준사격을 하던 놈들은 돌격병이 전멸하자 타고 온 차량의 시동을 걸고 빠르게 내뺐다.
"하, 겁쟁이들 같으니.”
우르술라가 쓰러진 돌격병의 머리를 운동화로 짓누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녀는 간만에 피 맛을 본 탓에 무척 기분이 고양되어 있었다.
나는 가까운 시체에 다가가 방탄모를 벗겨보았다.
아니, 벗기려고 했다. 그런데 살점이 마치 데운 피자처럼 장비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잘 안 벗겨질 겁니다.”
임택이 가라앉은 연기 사이에서 방탄모를 손에 든 채 걸어 나왔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놈들은 장비와 한 덩어리입니다.”
그가 나뒹구는 마체테를 주워 시신의 얼굴에서 장비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방탄모에 가려져 있을 때는 첨단을 걷는 미래병사 그 자체였던 것이,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참으로 못생겼구나.”
우르술라의 표현이 정확했다.
흡사 근섬유 위에 피부를 접착해둔 것만 같았다.
얇은 피부를 마체테로 걷어내니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근육이 드러났다. 근육 표면을 굵디굵은 정맥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뒤덮고 있었다.
근육의 크기와 질이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크록보다도 발육상태가 좋은 인간이 존재할 리가 없잖아.
"도대체 이것들은 뭐지? 멕시코에 다른 인종이 산다는 소린 못 들어봤는데.”
에신에야 널리고 널린 게 인간의 아종이라지만, 내가 알기로 지구인은 피부색 말고는 그리 두드러지는 차이점이 없다.
“익스티아의 부작용입니다.”
"그 카르텔 놈들이 파는 마약 말인가.”
"그렇습니다.”
김신우 박사를 서서히 타락시켰던 약.
그는 죽기 전 극심한 중독증세를 호소했었다.
"익스티아를 장복하게 되면 밤낮으로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다가, 결국 혼돈의 마력에 먹혀 이렇듯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저희는 이것들을 혼돈의 전사라고 부릅니다.”
임택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듣기로 남미의 몇몇 국가는 이미 혼돈의 무리에 의해 국가가 전복되었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도 비공식적으로 교민들의 귀국을 추진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심각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방탄판 사이에 넣어뒀던 소미 포스터를 꺼내 곱게 접기 시작했다.
"진소미님의 가호가 임하셨습니다, 형제여.”
피탄 흔적 없이 깔끔한 포스터를 보며 사제단원들이 숙연히 합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