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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19화 (119/205)

119화. < 악어 사냥 (5) >

나는 벙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하니 열심히 했다는 게 살행을 부지런히 나갔다는 소리였을 줄이야.

"네가 돌아가고 나서 카르텔에 소속된 인간들이 한국으로 많이 넘어왔어. 어찌 된 일인지 널 많이 싫어하더라. 언젠가 네가 알아줄 거라는 생각만으로 하나씩 처리했지. 외로운 나날 그런 소일거리라도 없었더라면 많이 힘들었을 거야.”

역시 엘 드라고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내가 도발했던 것 때문에 화가 났을지도.

"그리고 네 말대로 소미 언니의 사제들을 맡아서 훈련시켰어. 근성도, 재능도 없는 이런 애들을 대체 왜 뽑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계속 가르치니까 써먹을 정도는 되더라. 물론 열에 아홉은 돌려보냈어. 구덩이도 못 올라올 근성 가지고는 술법을 가르쳐 봤자니까.”

오데르의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죽느냐 사느냐의 고비에 직면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구덩이 속에서 적자생존의 아귀다툼을 벌이는 게 우리가 맞이하는 첫 번째 ‘훈련’이었다.

만약 테일리시가 그 훈련을 그대로 적용했다면, 열에 아홉이 중도탈락하는 게 정상이었다.

"잘했느니라.”

우르술라가 테일리시를 칭찬했다. 테일리시는 놀랐는지 눈을 큼직하게 떴다. 그녀는 이제야 우르술라의 존재를 인지한 것 같았다.

"큰언니도 왔었구나.”

우르술라가 소리 없이 웃었다.

“네 서방님 말고는 뵈는 게 없는 거냐.”

"미안해요, 난...”

"안다, 바보라는 거.”

우르술라가 손을 뻗어 테일리시의 푸른 머리카락을 헤집어놓았다. 테일리시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그녀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혼자 남아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고 들었다. 말도 통하지 않았을 텐데 고생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젠 괜찮아요, 라힐이 와줬으니까.”

테일리시가 눈을 감은 채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어. 친구도 많이 사귀고,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으니까.”

그런 것 같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중 하나가 단어의 수준과 폭이었다.

예전에 그녀는 다소 어눌하기까지 할 정도로 대화에 서툴렀었다.

아둔해서가 아니라, 교육의 기회가 없어서였다. 오데르의 자식들에게 교육이란 타겟의 어디를 어떻게 찔러야하느냐는 게 전부였다.

그녀는 적절한 기회에 노력이 뒤따른다면 누구나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몸소 보이는 중이었다.

"오디션은 어때, 잘돼 가니?”

"아니.”

테일리시가 미간을 곱게 찡그렸다.

"잘 해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안준일 피디 때문에 망쳤어.”

"안준일 피디?”

"오디션 프로그램 만드는 사람. 외주 제작사 사람이야.”

"그 사람이 왜?”

"간밤에 전화를 걸더니 잠깐 와줄 수 있겠냐고 묻더라. 방송일 하면서 나처럼 예쁜 여자애는 처음 봤다나. 하지만 아이돌은 얼굴만으로는 안 된다고, 내가 끼가 너무 없어서 이대로는 우승하기 힘들 거래. 남자 대하는 법을 알아야 도움이 될 거라던데.”

우려했던 사태였다. 말도 서툴고, 연고도 없는 외국인 소녀. 얼마나 노리기 쉬운 먹잇감이겠냐고.

일단 나는 안준일이란 이름을 살생부 꼭대기에 올려두었다. 전개에 따라 모가지를 치든 말든 할 작정으로.

"나는 의심하지 않았어. 남자 대하는 법을 모르는 게 맞으니까, 피디가 연습생이 모르는 걸 가르쳐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랬는데 그 자리가 내가 생각했던 그런 자리가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어떻게 했니.”

"가슴을 만지기에 팔을 돌려버렸어. 그 후로 내 분량이 잘 안 나와.”

팔을 돌렸다는 소리는 어깨를 뽑으려다 말았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아마 안준일 피디는 한쪽 팔을 영영 못 쓰는 신세가 됐을 것이다. 테일리시를 고소하지 않은 건 밤늦게 연습생과 단둘이 있었던 걸 소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겠고.

아니면 허리가 한 줌밖에 안 되는 가녀린 소녀 때문에 반병신이 되었다는 걸 소명할 자신이 없어서인가.

"경연에서 우승해야 소원을 빌 수 있는데, 이래서는 힘들지도 몰라.”

테일리시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어쩐지 열심이더라니, 소원을 미끼로 삼았구나.”

우르술라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너무 낙담하지 말거라. 지금처럼 열심히 하기만 하면 기회는 또 찾아오는 법이다.”

“정말요?”

"정 뭣하면 네 라이벌들 팔도 다 돌려버리면 되지 않겠느냐.”

"누님, 농담으로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진짜인 줄 안다니까.”

"그 정도는 알아듣거든.”

테일리시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테일리시, 엘 드라고 정보를 받을 겸 해서 네가 훈련시킨 사제단과 만나보고 싶은데, 혹시 자리를 주선해줄 수 있겠니.”

"나는 같이 가기 힘들어. 어제부터 합숙주간이 시작됐거든. 대신 장소랑 번호를 가르쳐줄게.”

그녀가 휴대폰으로 임택이라는 자의 번호와 접선방법을 보내주었다.

전쟁 중이라는 걸 방증하듯 제법 치밀하게 짜인 연락망이었다.

"임택은 사제단 수석사제야. 그나마 가르치기 괜찮았던 놈이었어. 시간이 충분했더라면 더 키워볼 수도 있었을 텐데.”

"고맙다.”

"이제 가는 거야?”

그녀가 풀죽은 어조로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저 호수 같은 눈동자를 보자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당분간 한국하고 에신을 오갈 생각이다. 폰 켜둘 테니까 언제든지 연락하고.”

"나 곧 예선 마지막 무대거든. 그때는 와줬으면 좋겠어. 다른 애들 부모님처럼 사무실까지 픽업해주는 건 안 바라니까.”

"당연히 가야지.”

나는 덜컥 약속을 하고 말았다. 언제인지도 모르면서.

"고마워, 라힐!”

테일리시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오늘 정말이지 다채로운 표정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혹시 그만두고 싶거든 그냥 돌아와. 네가 한국에 남은 건 아이돌이 되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제단 훈련이 목적이었으니까. 이제부터는 소미하고 내가 인계해서 잘 해폴 테니, 부담가질 것 없어.”

“아니, 계속해 볼래.”

"진짜로?”

"억지로 하는 거 아니야. 재밌어, 이거.”

테일리시가 두 손으로 브이를 만들더니, 손가락 끝으로 날 가리켰다. 아까 췄던 안무에 포함된 동작이었던 것 같았다.

"일등 해서 소원도 꼭 빌 거야.”

그녀가 귀엽게 미소를 지었다. 안무강사에게 피드백을 받을 때 보였던 열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실은 나도 그녀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했다. 춤을 출 때 그녀의 자태는 흡사 요정 같았다. 압도적인 신체능력에 표현력까지 갖춘 그녀는 가히 살아 숨 쉬는 예술품이라 이를 만했다.

그녀는 분명 이 일에 몰두하고 있다.

친구 놈의 말에 과장 한 점 없었다. 누구라도 그녀를 알기만 하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는 말.

우리는 JSY 사옥을 나와 호텔로 다시 돌아왔다. 사제단 본부가 호텔을 경유하고 있기에 숙소에 들러 배부터 채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성대한 저녁식사를 마치자,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가 발신인이었다.

- 지시한 대로 악어를 찾는 중.

- 아직은 종적을 알 수 없음.

공화국 요원이 보낸 메시지였다. 공화국의 장군들은 내 명령을 받아 특수한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뜻대로 흘러가기만 한다면 대한민국 상황을 정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작전이 되리라 예상되었다.

나는 메시지를 확인한 후 임택이라는 자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신호가 몇 차례 가자, 산두목처럼 걸걸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 예, 미소떡볶이입니다.

- 치즈떡볶이 세트로 두 개 주세요.

- 고객님, 저희는 배달이 안 돼서 매장에서 받아 가셔야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 괜찮습니다.

- 삼십 분 뒤에 오시면 됩니다.

이게 테일리시가 알려준 접선법이었다. 치즈떡볶이 세트란 가입문의를 가리켰다. 이제 삼십 분 안에 접선지에 가기만 하면 된다.

테일리시에게 죽임을 당한 조직원의 숫자만 여든 명에 육박할 정도로 카르텔과의 전쟁은 치열해져 있었다.

말이 카르텔이지, 남미 몇 개국을 통째로 집어삼켰으니 초국가급 전력의 군사집단이 탄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이돌 꽁무니나 쫓아다니던 놈들을 모아다 만든 조직이 어떻게 그런 집단과 싸우는 게 가능한지는 의문이었다.

테일리시가 직접 훈련을 시켰다고 하니 이제 평범한 사생은 아니겠다만.

"흐음."

세종대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갈 때였다. 우르술라가 차창에 비친 야경을 바라보며 비음을 내었다.

“나브니의 냄새가 나는구나.”

“나브니가 서울에 와있습니까?”

나브니는 쾌락을 관장하는 에사인이다. 과거 아약이 소미가 전생에 창녀였을 거라고 주장하며 나브니의 이름을 들먹였었다.

"아닐 테지만, 오면 장사가 잘될 것 같다.”

우르술라의 눈동자가 보랏빛 광채를 발했다. 그녀는 도심 골목골목 얼룩진 욕망을 만개하기 시작한 권능으로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어쩌면 석 달도 안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한국에 완전히 적응하기까지.

우리는 사당역을 지나 과천시로 향하는 길목 즈음하여 차를 멈췄다. 이곳 부근에 접선지가 위치해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우둘투둘한 시멘트길을 걷기 시작했다. 집 몇 채와 낡은 가로등 하나를 지나치자, 귀신도 거를 것만 같은 을씨년스러운 건물이 나타났다. 비뚤어진 입간판에는 미소떡볶이란 상호명이 커다랗게 쓰였다.

"여기로구나.”

우르술라가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에 적은 없습니다.”

반면 아길리는 암표범처럼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킨 채였다. 그녀는 여차하면 당장에라도 양손도끼를 소환해낼 준비가 되었다.

"대신 안에 잔챙이 몇 마리가 있지.”

"주군을 기다리는 무리로 여겨집니다. 소미님과 기운이 흡사합니다.”

"갑시다.”

나는 상가건물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간판은 위장용이고, 건물은 공실상태인 것 같았다. 내부에 인테리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멈춰."

건장한 남자 세 명이 권총과 단검을 들고 우리를 맞아주었다. 셋 중 선두에 선 자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경고한다, 더 이상 움직이지 마라.”

전화를 받았던 자였다. 쇠를 긁어내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를 가진.

"뭘 주문하고 왔는지 말해. 대답여하에 네 목숨이 달려있다.”

그가 바로 임택임에 확실했다. 다른 사람들은 입이 달려있지 않은 것 같았다.

임택은 살갗이 거무튀튀하고, 볼우물이 쑥 들어가 마치 바짝 마른 해골 같은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인상은 해골 같았으나 몸에는 단련한 혼적이 가득했다. 그가 고도로 숙달된 전사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뭘 주문하고 왔나.”

임택이 권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리며 건조하게 물었다. 그는 다음 공격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신기한걸. 테일리시가 대체 어떻게 훈련을 시켰기에...”

나는 대답 대신 딴소리를 했다. 그녀가 구덩이를 언급했을 때 강도 높은 훈련을 예상하긴 했으나, 막상 보니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 그분의 이름을 들었나?”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실은...”

"잠깐만...”

임택이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설마 당신은...!”

갑자기 그가 숨을 거칠게 들이켰다. 권총을 쥔 손이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이 부들부들 떨렸다.

"수석사제님!”

"괜찮으십니까?”

좌우에 서 있던 사내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뜬금없이 왜 그래?”

그는 대답하는 대신 죽일 듯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원한이 가득 깃든 눈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돌 팬에게 미움받을 만큼 못되게 살아온 기억이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있는 것 같다.

기억을 돌이켜보니, 고도비만의 웬 소름 끼치는 사생 놈을 털어먹은 적이 있긴 했다. 소미한테 생리주기 운운했던 놈.

내 고개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고는 다시 오른쪽으로.

잠시 후, 나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설마 그게 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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