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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18화 (118/205)

118화. < 악어 사냥 (4) >

- ..뭐?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 못 들었냐? JSY의 초신성, 게이팝의 희망...

- 아니, 유진 씨는 어쩌고 다른 사람한테 투표 타령이냐고. 조강지처를 그렇게 쉽게 버려도 되는 거냐.

- 유진 씨는 치기 어린 청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기로 했다. 진정한 사랑을 만나기 전의 성장통이라고나 할까.

- 개소리도 작작 하자.

- 네가 아직 테일리시를 몰라서 그래.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너도 나처럼 됐을 텐데.

아직 못 보긴 했지.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어떤 경위로 그 사교성 없고, 뻣뻣하고, 냉혹하던 암살자가 JSY의 초신성 소리를 듣고 있는지.

- 대체 만나보지도 못한 처자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다는 거냐.

-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냐. 아이돌은 얼굴 예쁜 게 다가 아니라고.

- 그래.

- 테일리시가 솔직히 아이돌이 될 상은 아니었거든. 끼도 없고, 말투도 딱딱하고, 예쁘긴 한데 너무 목석같다고나 할까.

- 그런데?

- 그런데 그런 얼음장 같던 소녀가 치열한 경연을 겪으면서 점점 변해가는 거지. 마치 얼어붙은 호수에 봄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생명 없던 목각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그 과정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다는 거거든. 전 세계 사람들이 지금 피노키오 아빠가 된 심정으로 소녀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다는 거 아니겠냐.

- 변태자식.

- 야, 아이돌 좋아하는 게 왜 변태야?

나는 수화기를 잠시 귀에서 떼어놓았다. 나는 그의 항변을 적당히 흘려보내며, 테일리시의 변모한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니, 역시 상상이 안 된다.

어차피 내일 그녀를 만날 계획이긴 했다. 소미의 사제단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보고도 받을 겸하여.

나는 수화기를 다시 들었다. 이상민은 아직도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 그래서 오디션은 끝난 거냐?

-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귓등으로 들었냐? 오디션 끝났으면 투표해달란 말도 안 했지. 지금 시즌이 한창이라고. 테일리시라는 다크 호스의 등장으로 역대 최고의 시즌이 되어가는 중이다.

- 다크호스? 아까는 케이팝의 희망이라며.

- 팬심 감안하고 들어. 기존 연습생들 중에 워낙 연차도 오래되고 유명한 애들이 많아서, 데뷔조야 무난하게 들겠지만 몇 등 할지는 뚜껑 따 봐야 하는 상황이다. 경연프로그램 특성상 한 회에도 주목받는 사람이 휙휙 바뀌거든. 1년 차 신인이 1등까지 하면 그건 정말 역사를 다시 쓰는 거고.

- 그러냐.

테일리시는 그간 정말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괜스레 미안해진다. 그녀가 내 곁에 남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를 알고 있기에.

하지만 나는 그녀가 더 넓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기를 바랐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좋은 인연도 나타날 거라 믿었다. 내 그림자로썩기에 그녀는 너무 어렸고 아름다웠다.

- 알겠다, 사이트 링크 보내. 한 표 넣을 테니.

나는 잠시 생각해본 뒤 말을 바꾸었다.

- 아니다, 네 표 간다.

- 네 표나?

- 동행자가 있어서 그래. 링크나 보내라.

- 오냐.

전화가 끊겼다.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테일리시에게 푹 빠진 이놈이, 우르술라나 아길리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나는 내친김에 녀석에게 문자를 보냈다.

- 모레 오후 8시에 항상 먹던 곳에서 술 산다. 안 나오면 국물도 없으니 그렇게 알고, 여자가 낀 자리니까 사람답게 차려입고 나와라.

기별이 없었다. 방금 통화한 주제에 문자 확인은 게을리하는 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다.

띠리리리리.

별안간 인터폰이 다시 울렸다. 혹시 우르술라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나는 조신하게 전화를 받았다.

- 라힐입니다.

- 제대로 작동하는군.

아니다, 우르였다.

나는 김샜다는 투로 그에게 물어보았다.

- 너도 성능이나 확인하려고 전화했냐?

- 성능 확인은 끝났다.

- ...무슨 성능 확인?

- 네가 말한 샤워기라는 기기의 사출구를 절단해보았다. 정말로 마법적인 작용 없이 동작하는 장치인지 확인해두기 위해. 결론만 말하자면 네가 옳았다. 하지만 동력의 출처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호스를 거슬러 올라가서...

-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기다려라.

나는 가운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들며 방을 뛰쳐나갔다.

다음 날, 우리는 한데 모여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마쳤다. 멤버가 모인 김에 나는 오늘 스케줄을 고지해주었다.

“우르, 너는 전권대사 자격으로 박병철 장관을 만나. 혼자서는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를 테니 박이나 실장한테 도움 구하는 거 잊지 말고.”

"알겠다.”

"노파심에 말하는데, 물건 함부로 부수지 마라.”

"그 말은 한 번만 더 들으면 열두 번째로군.”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그런다. 탐구심이 그렇게 넘치면 돈을 주고 사라고. 너 돈도 많잖아.”

화폐경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우리는 이미 원화로 공직자들에게 월급을 지급하고 있다.

물론 그는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조직의 장인지라, 그가 쓸 돈은 특수활동비에서 충당했다.

"그리고 누님은...”

나는 우르술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밤에 잠을 푹 잤는지, 아니면 식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검은 드레스를 벗은 그녀는 흰 후드집업 안에 느슨한 티를 받쳐 입었는데, 그 모습이 뭐랄까, 기이하면서도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눈앞의 여성이 역대 최강의 암살자라고 생각하면 기묘하고, 한 사람의 여자라고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이런 캐주얼한 루즈핏이 박이나 실장의 취향인지, 아길리도 비슷한 느낌으로 코디되었다.

아길리는 사자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중이었다. 그녀는 도자기처럼 섬세한 외모를 지녔으나, 동시에 잘못 건드리면 어딘가 부러질 듯한, 소위 말하는 센 언니 느낌을 제대로 풍기는 중이었다.

“나는 널 따라가지.”

우르술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테일리시를 만나러 간다고 들었다. 그 바보가 잘 지내고 있을지 보고 싶구나.”

"누님을 보면 많이 놀랄 겁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요.”

우리는 곧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일리시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JSY 엔터테인먼트 사옥, 전 세계가 주목한다는 오디션이 한창인 현장이었다.

우리는 점심 무렵에 JSY 사옥에 도착했다. 건물 앞은 여느 때보다 훨씬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대부분은 어린 소녀들이었는데,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피켓을 흔들며 달려와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 끼아아아아아!

"뭐냐, 음파공격인가?”

우르술라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물었다.

"누님하고 아길리 님이 연예인인 줄 알아서 그럴 겁니다.”

“연예인이 무엇일까?”

"음파공격을 유발하는 직업이죠. 일단 들어가시죠.”

덧붙여서 소녀들이 착각한 내 포지션은 경호원이었다. 나는 구름처럼 몰려드는 소녀들을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정확히는 힘 조절에 실패해서 그녀들이 훨훨 날아가진 않을까 신경을 잔뜩 기울여야만 했다.

사옥 내 분위기도 지난번에 들렀을 때와는 판이했다. 모든 업무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맞춰서 돌아가고 있었다. 스태프들이 가는 곳마다 발에 채였고, 구석구석 무인카메라가 눈에 띄었다.

- 여기 1층 로비인데.

- 나는 2층에 있어, 안무연습실에.

테일리시로부터 지체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더러 찾아오라는 소리였다. 우리는 직원의 협조를 받아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안무연습실 바깥부터 노래가 들려왔다. 벽을 뚫어버릴 듯한, 강렬한 비트를 가진 댄스곡이었다.

그녀가 왜 나더러 이곳으로 오라고 했는지는 짐작하고 있다.

자기가 춤추는 모습을 보아달라는 거지.

나는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뒤 연습실 문을 열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팀원으로 추정되는 아리따운 소녀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 그룹댄스를 추는 중이었다.

“...테일리시.”

나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예전에 테일리시가 오디션을 치르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가 췄던 것은 춤이 아니라 검술시연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표정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동자, 은은한 미소, 유연하고 부드러운 몸동작.

눈을 의심할만한 광경이었다. 목각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던 이상민의 말에 한 치의 과장도 없었다.

“요사스럽구나.”

우르술라가 팔짱을 낀 채 혀를 찼다.

"이젠 저 계집도 더 이상 내가 알던 바보라고 부르지 못하게 된 것일까.”

얼핏 타박하는 것 같았으나, 속에 담긴 건 순수한 놀라움이었다.

"전투용도로는 부적합하나, 보기에 아름다운 동작입니다.”

아길리는 그녀다운 감상을 남겼다. 이윽고 노래가 끝나자, 강사인 듯한 중년의 여성이 박수를 치며 소녀들을 한데 모았다.

그녀는 소녀들에게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전문가의 관점에서 피드백을 아낌없이 주었다.

나는 여기서 다시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강사에게 귀를 기울이는 테일리시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했다.

세상만사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두었던 그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열의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고생했다, 얘들아.”

이윽고 강사가 수업 종료를 알리는 박수를 짝 쳤다. 소녀들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웃음을 터뜨렸다.

테일리시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마침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는 순간, 나는 시야가 그녀만을 남기고 좁아지는 듯한 착시를 느꼈다.

그녀가 자박자박 내게 걸어왔다. 우리는 잠시 뒤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오랜만이...”

말을 맺기도 전이었다. 그녀가 와락 나를 껴안았다. 은은한 라벤더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나는 당혹감에 휩싸인 채 뒤를 돌아보았다.

"뭣 하느냐, 안아 주거라.”

우르술라가 씨익 웃으며 날 채근했다.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

그녀가 내 품에 머리를 꾹 묻으며 속삭였다. 그녀의 감정은 떨어져 있는 사이 커지면 커졌지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테일리시의 허리에 조심스레 손을 둘렀다. 한 손으로도 넉넉히 감을 수 있을 만큼 가느다란 허리였다.

이윽고 테일리시가 몸을 떼어놓았다.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녀는 왼손으로 눈가를 부벼 닦으며 투정을 부렸다.

"진짜 너무해, 어떻게 그동안 한 번도 안 찾아올 수가 있어.”

"미안하다, 정말 무지하게 바빴다.”

"자기만 에사인이 되느라 바빴지. 이기적인 남자이니라.”

우르술라가 신이 난 듯이 뒤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일단 나가자. 여긴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우리는 연습실을 빠져나와 6층으로 이동했다. 소미가 전세 내다시피 한 공간이라 여기라면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테일리시는 올라가는 내내 내게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게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는 응접실로 가 소파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나는 모두를 위해 자판기에서 음료를 꺼내왔다.

"너 되게 열심히 살았더라.”

"응.”

테일리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자랑하고 싶었어. 놀고 있지 않았다고, 나 이렇게 열심히 했다고.”

그녀는 확실히 변했다. 아이돌 수업을 받은 탓인지 감정이 훨씬 더 풍부해졌다.

게다가 말투도 달라진 게, 그 나이 또래 소녀로 착각할 만큼 활달해졌달까.

"그러니까 오디션이 지금...”

"일흔다섯 명이야.”

그녀가 내 말을 자르며 말했다.

"오디션 참가자 숫자가?”

"아니."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엘 드라고 카르텔 쓰레기들을 처리한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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