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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17화 (117/205)

117화. < 악어 사냥 (3) >

"에신을 만방에 공표하자는 말씀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묘안이로군.”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박병철 장관이 처음으로 입술을 떼었다.

"대통령 각하, 이슈는 이슈로 덮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에신 건을 폭로한다면 전 세계가 다른 곳에 눈 돌릴 겨를이 없을 만큼 시끌벅적해질 겁니다.”

"그랬다간 우리가 괜한 미움을 사지 않을까요?”

지금껏 많은 국가들이 비밀리에 에신 진출을 추진해왔다. 그 과정에서 저질러진 비리가 한둘이 아닐 터였다. 대한민국은 사람 몇이 죽고 예산을 몰래 집행하는 정도에 그쳤으나, 다른 나라들은 땅에 묻은 시신이 천이나 만 단위였다.

때문에 각국 정부가 기를 쓰고 관련자들의 입을 틀어막는 중인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의 입을 영원히 닫아둘 순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낙관적인 관측을 해보자면, 우리를 미워할 정부는 어차피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실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낙관적으로 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섣부르게 결정하기엔 잘못된 선택에 따를 대가가 너무나 큽니다.”

"아니면 이건 어떨까.”

우르술라가 끼어들었다.

"폭로는 우리가 할 테니 너희는 그저 판을 깔아주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 너희는 손을 쓰지 않고도 코를 풀 수 있어서 좋고, 우리는......"

그녀는 김의호를 지그시 쳐다보며 일부러 뜸을 들였다.

"너희에게 빚을 지울 수 있어 좋을 것 같다.”

"저도 누님, 아니, 외무부장관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나는 그녀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십자가는 우리가 지겠습니다. 대한민국은 그저 판만 깔아주십시오. 필요하다면 다른 나라를 납득시키기 위해 우리를 규탄하는 입장문을 내셔도 좋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렇게까지 해서 귀국이 얻는 게 뭡니까?”

"저도 대통령님과 의견을 같이합니다. 저 또한 양국이 함께 번영하는 미래를 소망합니다.”

게다가 에신의 존재를 폭로하게 될 쇼.

자그마치 70억 인류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기회인데, 그걸 놓칠 수야 없지.

에사인은 우리가 익히 아는 신과는 다르다. 신화 속의 신들이 스스로 온전한 존재라면, 에사인은 끊임없이 타인의 관심을 구걸해야만 한다.

마치 아이돌이나 유튜버처럼.

내게도 오데르처럼 추종자가 저절로 솟아나는 구덩이가 있었더라면 이런 고민은 안 해도 되겠다만.

"......."

김의호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는 지구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는 미국이나 중국 같은 열강이 에사인보다 훨씬 거대한 위협으로 느껴질 것이다.

"확신이 서지 않으신가 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것만큼 무기력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재임기간 대한민국은 큰 난국 없이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지금 요구되는 리더십은 전국을 헤쳐 나갈 혁명적인 자질이었다. 지금 이때 지도자가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죄를 짓게 될 것이다.

"대통령께서는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아실 겁니다. 저는 진실과 질서를 수호하는 에사인입니다. 뒤돌아서면 언제 등에 칼을 꽂을지 알 수 없는 자들과 미래를 도모하시겠습니까."

나는 그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얗고 파란 눈부신 마력의 빛이 손바닥 위에서 솟아올라, 서로 꼬리를 물고 회전했다. 두 색이 다른 빛이 맞물리는 모습이 흡사 대한민국의 태극문양을 떠올리게끔 했다.

“...저는 라힐 대통령님이 국운을 걸어볼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외무부 소속이실 때 같이 일해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마다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셨죠.”

박병철 장관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국방부장관은 팔짱을 낀 채 침묵을 지켰으나, 반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의사를 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눈에 든 사내는 그리 많지 않지. 인간의 몸으로 시작해서 에사인에 오른 자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우르술라가 찻잔 모서리를 쓰다듬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대한 마법사 나, 우르 게네발이 이자를 돕고 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의문이로군.”

황자는 가면과 체면을 함께 벗어던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마력을 흩어버렸다. 나는 망설이는 김의호에게 손을 내밀며, 자신감에 찬 어조로 말했다.

"함께 갑시다. 우리가 귀국의 검이 되겠습니다.”

김의호는 여전히 망설였다. 그러나 그의 손은 이미 내게 뻗어오고 있었다.

회담을 마친 후 우리는 한강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대한민국 정부가 체류기간 동안 마음껏 머물라고 특실을 잡아둔 곳이었다.

나는 간만에 문명의 이기를 누려볼 수 있었다.

물론 마음 편히 누린 건 아니었다.

검과 마법이 난무하는 야만적인 세계에서 온 사람이 셋이나 있기 때문에, 방 하나에 모아두고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에 대해 한 차례 교육을 실시해야만 했다.

“아셨습니까?”

나는 소파 위에 옹기종기 앉은 선남선녀들 앞에서 텔레비전 리모컨을 흔들어 보였다.

"이 버튼을 누르면 영상이 나옵니다. 여길 누르면 영상이 바뀝니다. 볼륨조절은 이걸로 이렇게 하고, 끄고 싶으면 맨 위에 제일 큰 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다들 아시겠죠?”

강의가 끝나고 실전테스트의 시간이 되었다. 각자 한 명씩 리모컨을 건네받아 텔레비전을 구동해보았다.

"풉..."

나는 그들의 엄숙한 표정을 보면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리모컨을 장인의 어마어마한 노고가 집약된 신물처럼 조심스럽게 다루는 중이었다.

"신기하구나. 여기 와서 본 물건들 중에서 가장 신기하다. 자동차나 빌딩은 고도로 발달된 기계장치라고 납득했지만, 이건 마법 그 자체가 아니더냐.”

우르술라가 어린아이처럼 눈빛을 빛내며 감탄했다. 아길리는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며 연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참고로 지금 나오는 화면은 창단 이후 만년 꼴찌 신세라는 모 야구팀의 경기 중계화면이었다.

나는 그녀들의 천진난만한 자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길어야 삼 개월이라고,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좋습니다. 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인터폰으로 제게 전화를 해주시면 됩니다. 인터폰 사용법도 기억하시죠?”

끄덕.

"샤워기도요?”

끄덕.

누가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했던가. 공화국 최강의 용사들을 마법 하나 쓰지 않고 홀린 순간부터 텔레비전은 마물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그러면 각자 방으로 돌아가 씻고 주무세요. 내일 스게줄이 있으니 너무 늦게 주무시면 안 됩니다.”

나는 세 사람을 어거지로 현관 밖으로 몰아내었다. 나는 그들이 맞는 방에 찾아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간신히 내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후......"

나는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을 하나 꺼냈다. 찬물로 목을 적시자 그제야 살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협을 얼른 맺어야 공화국에서도 차갑게 식힌 냉수 맛을 볼 수 있을 텐데.

손에 닿기만 하면 공화국에 가져올 궁리부터 하는 걸 보니 어느덧 대통령 다 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위이이잉.......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바르르 떨었다. 몇 달이나 밀린 메시지를 일시불로 수령하느라 아까부터 혼자 탭댄스를 추는 중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샤워실부터 들어갔다. 일단 물로 몸을 적셔야만 머리가 돌아갈 것 같았다.

띠리리리리.

몸에 비누거품을 열심히 냈을 때였다. 인터폰이 고의성 다분한 타이밍에 울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대충 허리에 수건만 두른 채 샤워실에서 화닥닥 튀어나왔다.

- 예, 라힐입니다.

- 정말로 너로구나.

우르술라였다. 그녀와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눠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전선을 타고 다소간 톤이 다운된 그녀의 목소리는 악마도 흘려버릴 정도로 그윽했다.

- 무슨 일이십니까, 누님.

- 무슨 일이 있어야만 네게 연락을 하는 것일까.

- 그건 아닙니다만...

- 지금 만나러 가도 되겠느냐?

- .......

나는 내 상태를 재빨리 점검해보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헐벗은 몸. 샴푸에 떡이 된 머리카락.

- 농이니라. 기계가 네 말대로 잘 작동하는지 확인해봤다.

우르술라가 수화기 너머에서 깔깔 웃었다.

악마다.

악마를 홀릴 여자가 아니라, 그녀가 바로 악마 본인이었다.

- 누님,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 씻으러 돌아가 보겠습니다.

- 오늘 고생 많았다.

뜬금없는 칭찬.

- 이젠 더 이상 너를 ‘내가 아는 라힐’이라고 부르지 못하겠더구나. 오늘에서야 나는 그림자를 내려놓은 불안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었다.

- 누님도 불안함을 느끼시는군요.

- 어디 불안함뿐일까.

우르술라가 미묘한 투로 말했다.

나는 문득 그녀가 낯설 정도로 새롭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가슴과 냉정한 머리, 잔인한 손속을 가진 최고의 암살자였다.

그러나 가장 짙은 그림자가 아닐 때 그녀가 어떤 사람일지는 겪어보지 못했다. 그녀가 나를 더 이상 알던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듯이,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그녀도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버전의 우르술라였다.

- 그만 씻으러 가거라. 방해하지 않으마.

전화가 끊겼다. 나는 어기적어기적 샤워실로 돌아갔다.

다행히 다들 신문물에 적응을 잘하고 있는지, 내가 소방수로 투입되어야 할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샤워를 끝낸 뒤, 머리를 느긋하게 말리며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성인광고, 대출광고, 발신자 불명의 통화들.

수많은 무의미한 기록 사이사이 이상민의 메시지가 침투해있었다.

- 야, 전화 좀 받아라. 공무원 특채됐답시고 따라지 중소나 다니는 동창은 좆도 아니라는 거냐?

- 부장한테 최면이라도 건 거냐? 그 인간 완전히 넋이 나간 채로 돌아왔더라.

- 전화 한 번만 더 씹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마.

- 여영진 부장이 너 해외 출장 나갔다더라. 나보다도 영어 못하는 주제에 해외 출장이라니, 차라리 입대를 다시 했다고 우기지 그러냐.

- 부장이 널 만난 후 완전 다른 인간이 돼서 무섭다.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그 인간이 요새는 욕을 안 한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어떻게 생각하냐?

- 귀국하면 연락해라.

해외출장은 생각 못 했네. 외교부 공무원이 둘러대기 딱 좋은 핑계였다.

그나저나 여영진 부장이 내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하긴 그렇게라도 마음의 빚을 덜어내지 않으면 곤란한 입장이겠지?

뚜루루루...

나는 이상민의 번호로 곧장 전화를 걸었다. 내일은 바쁠 테니, 오늘 저녁은 쉬는 느낌으로 보내고 싶었다.

- 뭐냐? 봉팔이냐?

몇 개월 만에 듣는 녀석의 첫 대사였다.

- 그래, 돌아왔다.

- 인마, 나갈 땐 나간다고 말 좀 하고 다니면 어디 덧나냐.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안 되는 거냐고.

-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였는지 까먹었다.

- 내가 형님이고 니가 동생이었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 개소리 그만하고, 술 한 잔 사마.

- 술 한 잔 가지고는 안 되지.

- 그러면?

- 몰라서 물어? 투표해야지, 자식아.

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동창은 그사이 차원을 넘어서 두 번의 전쟁을 승리하고 왔건만, 이놈은 어찌나 변함이 없는지 소나무 대신 노변에 심어도 될 지경이었다.

- 아직도 투표 타령할 정도면 그 아가씨는 그냥 오디션이 직업인 거 아니냐.

- 이 자식 이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유진씨는 데뷔해서 활동 잘만 하고 있어.

- 그러면 누구한테 투표를 하라고?

- 잘 듣고 외워라. JSY의 초신성, 게이팝의 희망, 투시즌의 뒤를 이을 역대급 유망주, 테일리시 님의 존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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