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악어 사냥 (2) >
"저 기다란 것들이 다 무엇이더냐?”
우르술라가 차창 너머를 가리키며 물었다. 우리는 광화문 광장을 막 지나치려는 중이었다. 그녀가 말한 기다란 것들이란 노변에 즐비한 고층빌딩이었다.
"집입니다. 저 층층이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에신이라고 고층건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벽면 전체를 통유리로 만든 현대적인 건물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게 없구나. 하다못해 옷에 박힌 장식마저도.”
그녀의 손톱 끝이 드레스에 달린 진흥색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많이 신기할 것이다, 한 석 달 정도는.
하지만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곳은 똑같기 마련이더라고. 번듯한 옷을 입히고 스마트폰을 들려놓았다 한들 인간이 초인간 되는 건 아니더라.
그러니 우르술라의 이런 반응을 보고 즐길 수 있는 것도 앞으로 석 달뿐이라는 이야기다. 그사이 가급적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어둬야 만 하겠지.
"다 왔습니다.”
경호원이 차에서 먼저 내려 문을 열어주었다. 아길리는 경호원들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자신과 동업자라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본관 안으로 들어설 때였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바로 19대 대한민국 대통령, 김의호였다.
평생 정치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지라 그에 관해서는 주워들은 이야기 몇 가지가 전부였다.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 정적이 많아 실제로 뭔가를 이뤄낸 건 없다시피 하다는 점, 레임덕을 맞이해 지금은 식물대통령이나 다름없는 상태라는 점 정도.
"우린 구면이지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김의호가 먼저 내게 악수를 건넸다. 과연 그와는 한 차례 만난 바가 있었다. 화상으로 만난 것도 만났다고 해야 할지는 의문이나.
"저도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쥐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이어서 각자가 데려온 수행진과 짧게 인사를 나누었다.
"앉으시죠."
회담장에 입장한 건 나와 우르술라, 황자 세 명이 전부였다. 아길리와 박이나 실장은 어디까지나 수행 역이기 때문에 부득불 바깥에 남아야만 했다.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전채요리가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다. 황자와 우르술라는 호기심으로 젓가락질을 드문드문하더니, 입에 맞는지 본격적으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최근 중국과 전쟁을 치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김의호가 운을 떼자, 동시통역사가 그의 말을 빠르게 에신어로 옮겼다.
"늦었지만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차원 너머 소식이 예까지 넘어오는군요.”
"열심히 소식을 챙겨듣고 있습니다. 곧 에신으로 의식의 지평을 넓히게 될 세상이 도래할 테니까요.”
"언제쯤 그런 세상이 올까요?”
"우선 입가심부터 해보심이 어떤지요. 따뜻할 때 드셔야 합니다.”
김의호가 내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유자차를 권했다. 나는 음료를 홀짝이며 어제 밤늦게까지 공부한 것들을 다시 복기해보았다.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허수아비, 식물대통령, 김의호를 수식하는 수많은 불명예스러운 별명에도 불구하고, 면대면으로 만난 그는 일국의 수장 자리를 농담 따먹기로 먹은 게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중이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에신 프로젝트는 이제 대한민국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공화국만의 것도 아니죠.”
나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년 전, 미국에서 특사가 찾아왔습니다. 요구사항은 단순했습니다. 에신 전초기지에 식량공급을 중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어가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는 게 그들이 들먹인 이유였습니다.”
"그게 미국이었다고요?”
"예."
“…황당하군요.”
- 그건 이상한 일이로군. 기재부면 우리 쪽 사람일 텐데.......
박병철 장관이 혼란스러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장관이 모를 정도면 대체 누가 뒷배에 있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 대통령 뒤엔 미국이 버티고 있었을 줄이야.
"미국이라면 네가 말했던 그 나라가 아니냐. 이 세계의 황국이라던.”
우르술라가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 맞습니다.”
"널 견제하겠다는 판단은 칭찬해주고 싶구나. 네 싹수가 남다르다는 걸 알아보았다는 말도 되지 않을까.”
"판단은 좋았으나 대처가 너무 물렀다. 나 같으면 암살자를 보내 확실하게 싹을 밟아버렸을 것이다.”
황자가 팔짱을 낀 채 무서운 말을 늘어놓았다. 암살은 정치가 아니라고 말한 게 엊그제건만.
"얼마 전에는 중국이 사절을 보내왔습니다. 당장 공화국과 무역을 중단하지 않으면 자기네와 무역이 끊길 줄 알라더군요. 대한민국의 대중국 무역 의존도는 나날이 높아져, 현재는 삼십 퍼센트에 가깝습니다. 사실상 나라가 망할 줄 알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습니다.”
중국이 그렇게 나왔다는 건 놀랍지도 않다.
대국이라고 부르기엔 속이 너무 좁아서 중국이라던가.
“그게 다가 아닙니다. 일본도 비슷한 입장을 표명해왔습니다. 그쪽은 우리가 연말까지 실효적인 조치를 내리지 않는다면 반도체와 관련된 핵심소재를 공급 중단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반도체는 전체 수출물량의 약 이십 퍼센트를 차지합니다. 이것 역시 나라가 망할줄 알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습니다.”
"욕해도 됩니까?”
"마음껏 하십시오.”
김의호 대통령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놈들이 전쟁에서 지고 나서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까고 있었을 줄이야.
날 직접적으로 어쩔 자신은 없고, 대한민국은 만만하겠고. 만만한 놈부터 조지는 게 외교의 생리라지만, 너무 옹졸한 거 아니냐고.
"게다가 부산이나 인천 등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추적이 어려운 신종마약이 급속도로 번져가는 중입니다. 중독자는 가파르게 늘어만 가는데, 나오는 것이라고는 밀가루밖에 없으니 단속반도 두 손 두 발 들고 있다고 합니다. 듣기로는 이것도 주술과 관련된 일이라고 하더군요.”
"주술이 맞습니다.”
나는 단언했다.
멕시코를 통일한 거대 카르텔의 리더, 엘 드라고.
그가 순조롭게 성장했다면 지금쯤 어마어마한 거물이 되어있을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미국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나라들보다 더요?”
"미국은 귀국과 연결된 모든 포탈을 기습적으로 닫아버리라고 압력을 넣는 중입니다. 마법적인 준비는 그쪽에서 다 알아서 해주겠다는군요.”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리는 인천항만과 외교부청사 말고는 따로 한국에 좌표를 따둔 게 없었다. 포탈이 닫히면 우린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미국이 그렇게 적극적인 이유가 궁금하군요.”
"명분은 여러 가지입니다만, 결국엔 국익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항상 불안정해야만 합니다. 만약 에신 공화국이 순조롭게 성장하여 우리나라와 끈끈한 관계를 맺는다면, 장차 다가올 미래에는 주한미군의 자리가 없을 수도, 첨단무기를 팔아먹기 힘들 수도 있다는 계산이겠지요.”
나는 고작 몇 주 전에 뉴 텍사스가 주도하는 국제기구에 가입하겠다고 서명했다. 덕분에 500억 달러에 이르는 경제원조도 받아냈다.
그런데 그 500억 달러가 알고 보니 우리 시선을 돌리려는 미끼였다는 것 같다.
...어쩐지 너무 퍼준다 싶더라니.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이 우리 국민들에게 최선일까를 치열하게 고민해보았습니다. 본디 에신 프로젝트는 다음 백 년의 국운을 건 사업이었습니다. 프로젝트가 성공하기만 하면 이 땅에 낙원이 열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주변국을 모두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귀국과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김의호가 솔직담백한 어조로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도 내게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마디마디 묻어나오는 그의 인간적인 진솔함과 고뇌를 무시할 순 없었다.
"약소국의 어려움이로구나.”
우르술라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을 우리에게 소상히 말해준다는 것은, 역시 우리와 완전히 손을 놓고 싶지는 않다는 걸로 들린다.”
"예, 저는 놓고 싶지 않습니다.”
김의호 대통령이 결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에신 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서로 단절되는 것으로 결말이 지어진다면, 저는 참모진과 함께 실패한 프로젝트에 대한 정치적인 책임을 져야겠지요. 하지만 제가 물러서고 싶지 않은 건 단순히 정치적인 입지 때문만이 아닙니다. 저는 귀국을 통해 이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압에 의해 물러나야만 하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진실이었다.
그의 입 밖으로 꺼내는 모든 말이 진실일뿐더러, 절절한 호소력이 담겨있었다. 내가 아는 정치인의 수사가 아니었다. 당연한 말도 몇 바퀴를 둘러가는 게 정치인이라는 족속이 아니였냐고.
그러고 보면 박병철 외무부장관도 정치인스러운 수사법을 구사하지 않았다. 그가 김의호를 모시는 건 성격적으로 죽이 잘 맞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리를 해보죠.”
본메뉴가 나오기 시작했다. 간만의 한정식이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꼴깍 고였다.
"...우선 배부터 채운 다음에요.”
"하하, 말씀만 하시면 얼마든지 더 내오겠습니다.”
우리는 잠깐 동안 식사에 열중했다. 황자는 마치 요리대회의 심사위원이라도 된 것처럼 한 스푼 한 스푼 꼼꼼히 맛을 보았다. "기묘하군.”
그가 기묘하다고 한 건 통통한 오이소박이였다.
"따로 먹으면 허전하다. 그러나 다른 반찬과 곁들이면 음식 본연의 맛 이상의 풍미가 느껴진다.”
“......널 외교부가 아니라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했어야 하나 보다.”
얼추 식사가 마무리되어가자, 나는 생수로 목을 축이며 대화를 재개했다.
"다시 정리를 해보죠. 대통령께서는 30퍼센트에 달하는 수출물량, 반도체사업, 한미동맹, 기타 수많은 이해충돌과 자그만 공화국과의 의리. 지금 이 둘을 놓고 저울질하시는 중이시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전혀 고민할 게 없겠는데요? 제가 대통령님 입장이었어도 공화국을 버리겠습니다.”
"역시 원안대로 가야 합니다. 동맹을 저버리면서까지 이러실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껏 과묵하게 침묵을 지키던 국방부장관이 한마디 했다. 박병철은 끝까지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
더럽고 치사해도 어쩔 수 없다. 더럽고 치사한 걸 알면서도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게 대한민국의 초상이다.
"......."
김의호 대통령은 침묵했지만, 그가 곧 어려운 말을 꺼내리라는 건 술법을 쓰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공화국을 대표하는 입장에서는 관점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먼저 그의 침묵을 깨뜨렸다.
"듣겠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는 내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을 보여주길 고대했다. 그게 이번 회담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국가를 움직이게 하는 건 명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고려 중인 건 이쪽 세계만의 명분이죠. 저쪽 세계에서는 다들 명분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 나쁜 짓들을 서슴지 않고 있어요.”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쪽과 이쪽의 명분이 이어져도 그치들이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
“그 말씀은...”
그는 말끝을 흐렸지만, 영민한 머리는 이미 내 의도를 이해한 것 같았다. 나는 빙긋 웃으며 대화에 쐐기를 박았다.
"예, 에신까지 의식의 지평을 넓혀보자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