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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15화 (115/205)

115화. < 악어 사냥 (1) >

우르술라와 형제들이 합류하고 일주일 후의 일이었다. 박이나 실장이 비공식적인 라인을 통해 회담요청을 알려왔다.

요청자는 대한민국 대통령.

장소는 청와대 본관 2층, 백악실이었다.

백악실이 어떤 장소인지는 박이나 실장이 귀띔해줘서 알았다. 국빈급 인물들과 오붓한 자리를 가지는 데 쓰인다고.

아직 조율해야 할 많은 외교현안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리를 제대로 대우하려 한다는 점만큼은 느껴졌다.

회담날까지 시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총리를 위시한 내각 관료들이 합심하여 예상 질답지 작성에 들어갔다.

그동안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야만 했다. 내게 주어진 과제는 누구를 데려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나를 빼놓을 생각은 말거라.”

우르술라가 팔짱을 낀 채 내게 통보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늦게야 의문을 표했다.

“...한국어 모르시지 않습니까?”

“대신 네가 알지 않으냐.”

"그렇군요.”

납득했다.

정확히는 내 사심을 납득했다. 나는 그녀에게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가 모르는 드넓은 세계와, 그 세계를 가득 채운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꿈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하지만 아직 자리를 비우실 때는 아니지 않습니까? 형제들에겐 의지할 사람이 필요할 텐데요.”

약 오천여 명에 달하는 형제들이 오데르와 맺은 신성한 맹약을 취소했다. 형제들은 평생 쌓은 모든 마력을 반납하고, 우르술라의 축복으로 새로이 그릇을 채우는 중이었다.

"난 녀석들을 그렇게 나약하게 키우지 않았다.”

그녀가 차갑게 조소했다.

"그랬더라면 진작 내 손에 죽었겠지.”

......그녀에게 어둠을 맡긴 건 탁월한 결정이었다.

“나도 가겠다.”

이어서 발언한 건 이황자 우르 게네발이었다. 그는 이제 돌아다녀도 무리가 없을 만큼 건강해졌다. 그가 보유한 마력을 감안한다면 지금까지 빌빌댄 게 이상하리만치 회복기간이 길었다.

아마도 황제의 술법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뜻이겠지.

"너도 한국어 모르지 않냐.”

"간단한 회화 정도는 할 줄 안다.”

그는 그 말을 한국어로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순간 사레가 들릴 뻔했다.

"대체 어느 틈에 우리말을 배운 거냐?”

"간호사가 가르쳐주더군. 그 대가로 마법의 비전을 아주 조금 엿보여줬지. 병원에서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적당했다.”

잊고 있었다. 그가 대륙 최고의 유전자를 물려 받은 남자라는 걸.

게다가 그는 마법사이자 학자이기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언어 하나쯤 익히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재수 없구만.

이목구비를 되찾은 그는 심지어 얼굴까지 봐줄 만해졌다. 원래도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본인이 아버지와 같은 외모가 싫다고 강력히 주장해서 치료 중에 얼굴을 몇 군데 고쳤다고 들었다. 그게 조명래 원장의 첫 성형시술이었다는데, 굉장히 잘 됐다는 말 말고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러면 회담에 어울릴만한 직함을 하나씩 파줘야겠는데...”

나는 주먹으로 턱을 괸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우르술라는 장차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관장하게 될 것이다. 너무나도 중차대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서는 대외적으로 내걸 간판이 마땅치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암살조직의 마스터입니다.

이럴 순 없는 거잖아.

“......정보부.”

나는 장고 끝에 그녀에게 어울릴만한 부서 이름 하나를 도출해냈다.

현재 내게 들어오는 정찰정보는 모두 크롱크의 정찰조를 통해 입수된 것이다. 크록들은 멀리서 망원렌즈로 관찰하는 임무는 곧잘 해냈지만, 개성적인 외모 탓에 사람들과 대면해서 정보를 이끌어내는 건 취약하다고 평가되었다.

"누님께는 국가정보부의 수장을 맡겨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엇일까?”

"황국의 스파이마스터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국가를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그림자 속에서 암약하는 조직이 될 겁니다.”

"내게 어울리는 일이로구나.”

우르술라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로서 공식적인 승낙이 떨어졌다.

누님으로 불러도 된다는.

"그리고 우르, 당신은 마법청 장관이 딱이겠는데, 공교롭게도 얼마 전에 마법청 장관이 다른 사람으로 내정되고 말았네.”

"오르기 말인가?”

"만나봤나?"

“아르세니오를 가르칠 선생이라기에 찾아가봤다. 괜찮은 자를 뽑았더군.”

우르가 흡족하다는 듯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은 그러면.......”

나는 말꼬리를 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없는 사기적인 유전자의 소유자다. 그러나 마법을 제외하자면 황자로서 몸에 밴 예법과 뛰어난 모략실력이 그의 제일가는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외교부가 어떨까 싶은데.”

“외교부가 뭐냐?”

"삼상회와 비슷한 기구라고나 할까. 다른 나라의 지도자나 관료들과 정치적인 관계를 맺는 게 주 임무라고 보면 돼.”

"나더러 귀족놀음을 하라는 거군.”

"그래. 노파심에 말해두지만, 암살은 정치가 아니다.”

"그쪽은 손 뗐으니 안심해라."

우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는 황국 귀족의 집합체인 삼상회의 거두였다. 외교부의 수장으로 그보다 더한 적임자는 없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면 다음으로 함께할 멤버는.......”

나는 집무실에 모인 남은 사람을 돌아다보았다.

우선 진소미.

그녀가 단발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생긋 웃었다.

"미안 하지만 난 못가네요.”

"왜?”

“4집 정규앨범 준비하러 가봐야 해요. 실은 사장님이랑 약속한 시일이 몇 주나 지나버렸거든요.”

"그런 이유라면 당연히 빠져야지.”

아이돌 또한 진소미의 정체성이다. 그녀가 힘을 얻게끔 발판을 마련해준 소중한 배경이기도 했다.

"염색물도 슬슬 빠지기 시작했고, 부모님도 연락 안 된다고 걱정이 많으세요. 가기 전에 제가 없어도 현장이 잘 돌아가게끔 말씀 잘해놓을게요.”

"그래, 정 바쁘면 정기호한테 다 떠넘겨버려. 시켜두면 어떻게든 해낼 놈이니까.”

"정 팀장님은 연말에 시합 잡혀있다던데요?”

“UFC?”

"네."

"그걸 스게줄이라고 할 수나 있냐. 잠깐 시간 내서 주먹 한 번 뻗어주기만 하면 챔피언 되겠구만.”

"엔터테인먼트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걸랑요.”

소미가 킥 웃으며 말했다. UFC를 엔터테인먼트라고 지칭한 것부터 이미 글러먹은 발언이었으나.

"가서 테일리시 소식도 들어봐야죠.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하지, 엄청.”

테일리시는 소미의 사제단을 훈련시키기 위해 한국에 남겨졌다. 한국생활에 적응한다는 명목으로 기획사 연습생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맘때쯤이면 기획사 주최로 열릴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한창 준비 중일 터였다.

- 대신 내가 우승하면 소원을 하나 들어줘.

내게 부탁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죄악감마저 들 정도로 순수하던.

"저는 주군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릅니다.”

아길리가 가슴을 내밀며 힘차게 말했다. 그녀는 정신세계에 진입하기 전 맹세했던 대로 내 경호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려면 복장부터 바꾸셔야 합니다.”

나는 그녀의 단정치 못한 복장을 지적해야만 했다. 그녀의 파렴치한 복장도 문제가 되지만, 기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 입던 옷 그대로 대한민국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복장은 박이나 실장에게 부탁해둘 테니, 여러분은 그사이 간단한 한국어라도 익혀두세요.”

이리하여 최종 멤버가 확정되었다.

국가정보부 국장 우르술라, 외교부장관 우르 게네발, 경호실장 아길리, 비서실장 박이나, 마지막으로 공화국 대통령 라힐.

만에 하나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외부세력이 도발해온다면, 요새도시에 주둔 중인 정기호와 카룩카이가 처리할 것이다.

"대통령 각하, 잠시 시간 괜찮으신지요.”

오후에는 김형식 총리가 찾아왔다. 그는 과중한 업무부담 때문인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 말씀하시죠.”

"금번 회담에서 논의될 안건을 추려보았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양국 간의 우호증진과 협력이 언급되었습니다만, 실제로는 좀 더 골치 아픈 이야기가 오갈 것 같습니다.”

"그러겠지요.”

대한민국에게 우린 입 안의 가시처럼 껄끄러운 존재였다. 나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우리나라가 탄생한 과정을 돌이켜본다면 그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공산이 높았다.

나는 서류를 한 페이지씩 넘겨보았다. 종이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이마주름이 깊어져만 갔다. 무역, 국방, 주변국과 치른 전쟁 등 한 가지도 만만찮은 의제가 없었다.

“멕시코? 멕시코도 안건입니까?”

"혹시 알레한드로라는 자를 기억하시는지요.”

"물론입니다.”

밀가루를 마약이랍시고 팔아치우던 느끼한 놈.

"그 자도 여전히 계속 활동하는 것 같습니다. 멕시코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에신과 지구의 경계가 얇아지며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렇겠죠.”

언제까지나 에신이 비밀일 순 없었다.

이젠 정말로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찬찬히 검토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총리가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나는 집무실에 홀로 남겨져 서류더미와 씨름을 시작했다.

닷새 후, 우리는 외교청사 지하층으로 직결되는 포탈 앞에서 다시 집결했다. 과거 물품과 사람이 비좁게 부대끼던 곳이 이젠 요인 전용의 통로로 탈바꿈해 있었다.

"전부 다 오신 것 같군요.”

나는 진입에 앞서 멤버들의 상태를 최종적으로 점검했다.

우르술라는 박이나 실장이 서울에서 긴급하게 공수해온 검은색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다. 살결이 언뜻언뜻 비치는 레이스 위로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그녀는 쳐다보기도 어려울 만큼 비현실적인 미모를 마음껏 뽐냈다.

아길리는 여성용 정장을 입었다. 경호목적을 위해 활동하기 편하도록 디자인된, 깔끔하고 날렵한 수트였다.

“...많이 이상합니다.”

그녀는 이런 옷차림이 익숙하지 않은 듯 소맷자락을 자꾸만 잡아당겼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옷을 걸친다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을 지도.

우르 황자는 고급스러운 갈색 정장을 택했다. 옷걸이가 받쳐주는 양반이 정장까지 갖추니 귀티가 좌르르 흘렀다. 황족이 왜 황족인지 알 것만 같달까.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밝혀두는데, 나는 이들을 외모순으로 선별하지 않았다. 세상 자기만 사는 것처럼 이기적인 외모를 뽐내는 이 작자들이 에신 공화국 최고전력이었다. 이들이 미쳐서 날뛰기 시작하면 오늘 대한민국 수도가 잿더미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준비가 다 된 것 같습니다.”

박이나 실장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일행의 코디를 책임진 게 그녀였다. 정작 그녀 자신은 별로 꾸민 게 없으면서 말이지.

"갑시다.”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까딱인 후, 포탈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발을 딛자마자 주변 풍경이 즉시 바뀌었다.

청사 지하 7층은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친 것 같았다. 일단 포탈을 쪼던 기관총진지가 철수했다.

경계병력 상당수가 기관총과 함께 사라졌고, 물류창고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도 일신되었다. 탁 트인 깔끔한 공간에 정장을 입은 다수의 안내원들이 자리해있었다. 흡사 중요한 행사가 예약된 호텔 로비에 당도한 것만 같았다.

"대한민국에 방문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안내원들이 두 손을 허리춤에 모으며 배꼽인사를 올렸다.

"우리를 환영하는 것 같구나.”

우르술라가 게으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안내원들은 그녀의 시선이 닿자 남녀를 불문하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우르술라의 카리스마는 단순히 예쁘거나 잘생긴 사람이 나타났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반신지경에 근접한 초월자를 상대하는 중인 것이다.

“드디어 납시셨군.”

풍채 좋은 중년 남성이 만면 가득 웃음을 띠고 다가왔다. 박병철 외무부장관이었다. 그는 악수를 위해 내민 내 손을 두 손으로 덥석 맞잡았다. 우리는 서로 손을 쥔 채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너무 건강해서 탈일세. 자네가 보낸 약 덕을 톡톡히 보고 있지.”

"따님은 대체 언제부터 제 곁에 두셨던 겁니까?"

박병철이 박이나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 사람이 외지에서 혼자 일하기에 적적할 것 같아 내 특별히 부탁했다네. 어떤가,도움이 종 되던가?”

"꼼꼼한 분입니다. 큰 의지가 되고 있습니다.”

의지가 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박이나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박병철도 대단하다고밖에 말을 할 수가 없는 게, 외무고시를 패스한 딸의 장래를 웬 천둥벌거숭이에게 맡겨버리다니. 그게 도박수라면 자식의 미래를 건 도박수보다 더한 도박이 있을까 싶었다.

"못난 딸이 폐가 안 되었다니 다행일세.”

그가 씨익 웃었다. 그는 손을 떼고 한 발 물러선 뒤, 일행을 향해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라힐 대통령 각하, 그리고 귀빈 여러분. 저는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박병철이라고 합니다. 우선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렇 듯 초대에 응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도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다들 악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손을 붙들린 뒤 일방적으로 흔들리는 것에 가까워 보이긴 했다.

"이리로 오시죠, 여러분을 목적지까지 안내할 차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박병철은 아주 정교한 에신어를 구사하는 중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위해 피나게 노력한 게 틀림없었다. 과연 일국의 장관을 맡을만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청사를 빠져나와 외무부 업무용 차량에 나누어 탔다. 두껍게 코팅이 된 8인승 승합차였다.

기밀에 부쳐진 방한이니만큼 리무진이 지원되진 않았다. 청와대로 이동하는 동안 아길리와 우르술라, 우르 황자는 차창에서 도무지 눈을 떼어놓지 못했다.

나는 지금 그들이 느낄 기분을 상당 부분 공감했다.

마치 잘 읽던 소설의 세계관이 뒤바뀌는 듯한 충격.

환생했을 때 내가 딱 그런 느낌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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