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 독립 (15) >
"오, 오해입니다.”
나는 박이나 실장과 냉큼 떨어지며 손을 내저었다. 귓불이 불에 덴 듯 화끈했다. 이 무슨 시트콤 같은 상황이란 말이지.
"괜찮다. 영웅이 색을 밝히는 건 흠이 아니라고 했으니.”
우르술라는 나를 놀리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기분이 업된 모습은 처음 봤다. 나는 우선 실장에게 제대로 사과부터 했다.
"미안합니다. 박병철 장관님의 따님이라는 말에 놀라서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실장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버지가 말씀을 안 드렸나보네요. 정말이지...”
"그러고 보면 사진으로 한 번 뵀던 것 같긴 합니다.”
언젠가 장관이 휴대폰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의 휴대폰 앨범은 온통 딸 사진으로 가득했었다. 학사모를 쓰고 있거나 교복을 입은 등 수수하고 꾸밈없는 모습들이었는데. 사회인이 되어 나타난 그녀는 몰라보리만치 성숙해졌다.
"흐으음.”
우르술라가 우리를 쳐다보며 콧소리를 내었다. 나는 불온한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화제를 전환해야만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냐니. 네가 불렀다기에 먼 길을 달려왔건만.”
“아하, 그랬군요.”
"못 본 사이 더 맹해진 것일까.”
그녀가 내게 허리를 숙이며 씨익 웃었다. 비늘을 입힌 드레스가 바닥에 쓸리며 차르륵 소리가 났다.
"저는 다시 차를 내오겠습니다.”
박이나 실장이 서둘러 퇴실했다. 우르술라는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으며, 봉황 자개명패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여긴 뭐라고 쓰여 있는 것이냐?”
“에신 공화국 대통령 박봉팔입니다.”
"그 이름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그냥 라힐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래, 넌 라힐이다. 몇 번 죽었다 되살아나더라도.”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존재감은 흡사 블랙홀 같았다. 그녀는 나타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게 다른 생각을 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나는 침착함을 되찾으며, 미리 준비한 질문을 떠올렸다.
“형제들을 다 데려오신 겁니까?”
“아쉽게도 몇 명은 데려오지 못했다. 네가 부를 날을 대비해 의뢰를 최소화해두었으나, 오데르의 이목을 속여야 했기 때문에 살행을 아예 안 나갈 순 없었다. 그림자요새가 비어있으면 남쪽으로 찾아오라고 말은 해두었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오데르가 순순히 보내주던가요?”
"그놈이 뭘 어쩌겠느냐? 이게이드 끌 나고 싶지 않다면 놓아줘야지.”
우르술라가 오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곱 번째 권능이 암살당한 사건은 형제들의 단결된 힘이 창조자인 오데르를 넘어섰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데르가 먼저 마력을 회수해가면 방법이 없지 않을까요?”
"그 방법을 쓰기에는 이미 늦었다. 내가 너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설마 에사인 말입니까?”
"암살자의 존경을 사고 싶다면 존경받는 자를 죽이는 것만큼 간편한 게 없다, 라힐.”
우르술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불현듯 에신으로 돌아오고 나서 처음 만났던 형제가 떠올랐다. 그는 단검을 들고 전장 한가운데를 역주행하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마그나크록과 싸우는 데 정신이 팔린 울토르를 기습하는 것이었다.
- 소식이 늦은 모양이로군. 네 행동은 가장 짙은 그림자의 의지에 어긋나고 있다.
- 오데르의 자식들은 다르마알과 손을 잡는다는 게 가장 짙은 그림자를 위시한 우리 모두의 일치된 의견이다.
그는 오데르보다 우르술라의 의견을 더 우선시했다. 그때는 무심코 듣고 넘겼었으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이미 암살자들이 우르술라를 중심으로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일곱 번째 권능이 우르술라의 검에 쓰러진 순간부터 암살자들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들의 창조자인 오데르마저도.
"저만 선수로 뛰고 있었던 게 아니었군요.”
"물론 네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너는 나를 넘어선 최초이자 마지막일 제자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운이...”
별안간 등골이 섬뜩해졌다. 갑자기 그녀의 오른손이 흐릿해졌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검첨이 이미 코끝에 쇄도해있었다.
뻐어엉.
칼날을 쳐냈을 뿐인데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났다.
“이 무슨…!”
엄청난 연환격이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쏟아졌다. 검과 손이 부딪힐 때마다 태풍 같은 바람이 일어나 가구를 뒤집고 벽을 뒤흔들었다.
이것이 그녀의 진심이다.
일전에 검을 섞어봤을 때와는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났다.
그러나 못 받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한 수 한 수가 가공할 정도로 치명적이었으나, 단지 상대가 나빴다. 무적의 힘을 이어받은 나는 이런 식의 승부로는 쓰러뜨릴 수 없었다.
나는 공방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그녀의 팔목을 쥐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시간이 멈춘 듯이 그녀의 몸이 우뚝 정지했다.
"......."
붉은 머리카락이 수더분하게 흐트러졌다. 머리카락 틈새로 새카만 눈동자가 내 이마어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지간 침묵하더니, 내게 잡힌 자신의 팔목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희디흰 팔뚝에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했다.
우르술라는 아무렇잖게 손을 털며 검을 거두어들였다.
그나저나 그녀가 방금 사용한 단검, 내가 제대로 봤다면 울토르의 뒤통수를 노렸던 그 단검이 틀림없다. 불멸의 에사인조차 보내버릴 수 있는 유물.
뭐야, 진짜로 진심이었네.
“합격이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이게이드 못지않구나. 정말 몰라보게 강해졌다.”
승부의 결과는 그녀를 더 기쁘게 만든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엄살을 부렸다.
"손목이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수하들도 많이 늘었더구나.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면서 너를 따른다는 자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궁정에서는 보기 드문 강자들이 보이더군.”
그럴 것이다. 에사인이 될 싹수만 보이면 쳐내는 황국과, 인재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
질적으로 어느 쪽이 우위일지는 빤하지 않을까.
"앞으로는 어쩔 생각이냐? 북쪽에 방위도시를 짓고 있던데, 정말로 황국과 싸워볼 작정일까?”
"황국과는 이미 갈라섰습니다. 이황자 우르 게네발이 아버지의 뜻에 반해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혼돈은? 다르마알도 여전히 네 적이 아니더냐.”
"물론 다르마알도 제 적입니다. 그를 돕는 오데르와 킬데인도 빼놓을 수 없겠죠.”
"적이 너무 많구나. 그 많은 강자들을 적으로 돌리면서 네가 얻고자하는 바는 무엇이냐.”
“제 목표는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보장되는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똑똑.
노크소리가 났다. 박이나 실장이 우르술라 몫의 찻잔을 들고 들어왔다.
"세상에 나.......”
그녀는 초토화된 집무실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야말로 남아난 가구가 없었다. 책상은 훌러덩 뒤집어져 구석에 처박혔고, 봉황 자개명패는 벽에 한 뼘 깊이로 꽂혀버렸다. 휑해진 창틀 너머로 산새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다 새로 넣은 가구인데...”
그녀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힘 조절이 안돼서.”
"앞으로 대통령님 집무실 집기는 제일 싼 걸로 해야겠어요.”
박이나가 허리를 굽혀 널브러진 서류들을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우르술라는 그녀에게 받은 찻잔을 태연히 홀짝거렸다.
"맛이 아주 좋다.”
“...입에 맞다니 다행입니다.”
“너희 마족은 항상 이런 차를 마시나보군. 차 하나만 보고도 전향할 가치가 층분하다 하겠다.”
"가실 때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녀가 홀짝이는 건 평범한 홍차였다. 탕비실에 박스째로 쌓아둔.
"최강의 에사인이라는 에신 템조차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지 못했다. 네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자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그게 궁금했다. 왜 나는 굳이 나서서 세상을 바꾸겠답시고 오지랖을 부리는가.
어쩌다보니 등이 떠밀려 여기까지 온 부분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환생자의 특권이죠.”
"궁금하구나.”
"두 세계를 살아보니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더군요. 이건 이쪽 세상이 좀 아쉽고, 저건 저쪽 세상이 더 나은 것 같고. 두 세상의 장단을 잘 조합한다면 어느 한쪽보다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환생자라면 다 그런 안목을 거지고 있다는 것일까?”
"모르겠습니다. 어딘가에는 저보다 나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선 건 저 뿐인 것 같습니다.”
"네 형제들에 대한 계획도 알고 싶다.”
"오데르의 검은.......”
나는 생각을 하느라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우선 오데르라는 이름부터 떼야할 겁니다.”
"그렇다면 라힐의 검이라고 부르는 건 어떠냐.”
“우르술라의 검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뭐가 됐건 검이로구나.”
우르술라가 재밌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간 형제들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봤습니다. 암살자란 외딴 섬 같은 존재입니다.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듯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섞여 살아갈 수가 없죠. 지금까지 누구와도 섞이지 못했던 자들을 갑자기 제도의 울타리 안에 넣는다는 건 힘든 일일 겁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다.”
오데르의 검은 한 명 한 명이 타고난 싸이코패스였다. 본디 그렇게 창조되었기에 그것을 비난할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 도덕을 들먹이는 건 맹수더러 왜 사냥을 하냐고 나무라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젠 변해야했다. 오데르의 검이라는 정체성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나갈 수가 없다.
"진소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다음가는 강력한 에사인 후보입니다. 제가 질서를 대변한다면, 소미는 질서에서 소외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대변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우리 둘만으로는 모든 인간을 아우를 수 없습니다. 당신이 맡아주셨으면 하는 건 인간이 천성적으로 가지는 어두운 영역입니다.”
"글러먹은 놈들을 맡아달라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에신 템이 신으로서 실패한 이유는 선신만 곁에 남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세상의 단면밖에 품을 수 없습니다."
"그림자가 되어달라는 게 그런 의미였을 줄은.”
우르술라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다, 네 그림자가, 아니, 이 나라의 그림자가 되어주마.”
비늘 드레스에 휘감긴 팔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마주 쥐었다. 손가락을 통해 맥동하는 심박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나처럼 심장이 뛰는 존재라는 걸 처음으로 확인했다.
이윽고 그녀가 손을 거두어들였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손을 마지못해 되돌렸다. 그녀와 나란히 마주보며 미래를 구상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순간 나는 환생한 후 최초로 운명이 올바른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것이 아바르가 설계한 길이라면, 설령 이 끝에 파멸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