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독립 (14) >
며칠 후, 나는 우르 황자에게 병문안을 갔다. 그는 아직도 병상에 드러누운 신세였으나, 몇 차례의 전신재건수술을 받은 끝에 상태가 비약적으로 좋아졌다. 타다만 장작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불그스름한 새살이 전신에 돋아났다. 이쯤이면 의학을 마법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을 듯했다.
“수석마법사가 마법시료를 만드는 걸 도와달라던데.”
그가 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너 아니면 알 사람 없다더라.”
“사실이다. 아버지의 업적중 하나가 마법의 신비를 강탈해 황가의 비전으로 바꾸는 것이었지. 반발한 마법사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테고.”
“철두철미하구만.”
“아,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우르가 베개에 몸을 기댄 채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자기 자식들에게도 마법의 비전을 전부 나눠주지 않았으니까. 짐작하기로 내가 알고 있는 비전은 전체의 삼분지 일에 불과할 것이다. 최소 두 명 이상의 형제들과 협력하지 않는 한 결코 전체 그림을 들여다볼 수가 없지.”
“지금으로서는 삼분의 일이라도 어디냐 싶은데.”
“물론 삼분의 일만 가지고도 일부 시료를 만들어낼 수는 있다. 설비에 많은 투자가 필요하고, 투자를 하더라도 정신계와 화염계에 특화된 마법사밖에 키워내지 못하겠지만.”
“정신계하고 화염계면 아쉬울 게 없겠는 걸?”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르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병실 탁자 위에 꽃다발과 과일바구니가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과일과 꽃 모두 에신 현지에서 마련한 싱싱한 것들이었다.
“나 말고 또 누가 다녀갔나 보네.”
내가 알기로 에신에는 먹거리와 꽃으로 병문안을 하는 문화가 없다. 이건 한국인이 남긴 흔적이 틀림없었다.
“진소미 장군과 료헤이 일병이라는 자였다.”
“료헤이는 왜?”
“나도 모르겠다. 상당히 강한 전사인 것 같던데, 속을 알 수 없더군.”
그러고 보니 료헤이가 꽂힌 게 균형 말고 한 가지 더 있었지, 신의 아들.
그는 로켄에게서 황자를 지키려다가 두 팔이 부러져서 한동안 깁스를 찼었다. 이제 부상도 낫고 살만해지니 못 다한 덕질을 마저 하려는 것 같았다.
“한 가지 더. 네 이름으로 선전을 해볼까한다.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최근 우리나라로 난민이 많이 유입되고 있어. 전쟁에서 맹활약을 한 이황자가 우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퍼뜨린다면 민심을 달래는 데 효과가 좋을 것 같다.”
똑똑.
갑자기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작달막한 크록 간호사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크록이 머리 위에 간호사모를 얹고 다니는 모습이 아직도 낯설었다. 목에 건 직원증이나 손에 든 차트도.
그냥 크록 간호사 자체가 앞서나간 개념 같았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아르세니오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우르가 눈을 번쩍 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손목에 끼운 링거를 신경질적으로 떼어내며, 병상을 막무가내로 빠져나왔다.
“천천히, 그러다 넘어질라.”
말려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 나는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아르세니오의 병실은 우르의 바로 옆방이자, 이 병원에서 유일한 집중치료실이었다. 시멘트로 급조한 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장비들이 가득 들어찬 곳이었다.
“환자가 막 의식을 차렸습니다.”
조명래 원장이 마스크를 낀 채 우리를 맞아주었다.
“절대안정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환자를 자극할만한 대화는 가급적 자제해주시길 바랍니다.”
창백한 낯빛의 비익족 소년이 침상에 누워있었다. 소년의 하얀 날개는 펼쳐진 채 의료용 벨트로 고정되었다. 입에는 호흡기가 채워졌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수많은 기기가 벗겨진 상체에 연결되어 있었다.
우르가 비틀거리며 아르세니오에게 다가갔다. 아르세니오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리자, 반투명한 하늘색 눈동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르세니오.”
우르가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소년은 그에게 시선을 가져가더니, 한숨을 쉬듯 조용히 말했다.
“......안녕하세요, 황자님.”
우르가 미소를 지었다. 뒤틀려있기만 하던 평소의 미소와는 달랐다. 그는 아르세니오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보듬으며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하마터면 너를 잃는 줄 알았지 않느냐.”
“황자님 너무.......못생겨지셨어요.”
우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이식받은 조직이 자리 잡지 못해 미적으로 봐줄만하지 않은 건 맞았다.
“넌 언제나 나한테 할 말 못할 말을 다하는구나.”
“못할 말이었다면 죄송해요.”
“아니다, 너만이 유일하게 내게 진실된 사람이다.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버지에게 내쳐지기 전에 질서의 궁에서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
“절 위해 로켄님과 싸우셨다고 들었어요.”
“...그놈에게 다시는 님자를 붙이지 마라.”
우르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놈이 바로 널 이 꼴로 만든 놈이다. 그놈은 네게 빙의해서 온갖 말못할 해괴한 짓을 저질렀다.”
“저도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다고?”
“네, 제가 가끔 정신을 잃는다는 것도, 그 사이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는 것도요. 사람들이 그렇게 떠들고 다니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너는...”
“저는 황자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착한 아이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과 다를 게 없이 이기적이고 나약하답니다. 광기의 아르세니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죠, 로켄님이 주신 힘이 없으면 황자님 곁에 남을 수 없을 테니까. 마력이 없는 저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우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마력 때문에 너를 곁에 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힘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황자님 눈에 들지도 못했을 테죠.”
아르세니오가 왼손을 들어 올려 천천히 머리 위로 뻗었다.
“보세요, 저는 이제 남은 게 없어요. 텅 빈 껍데기처럼.”
나는 병상 차트에 기록된 아르세니오의 MP를 확인해보았다.
154.
1400이 넘던 MP가 한순간에 바닥을 치고 말았다. 로켄이 힘을 거둬간 게 분명했다.
로켄에게 점지되는 건 여느 에사인에게 축복을 받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강력했다.
그건 축복이 아니라 술법의 일종이었다.
영혼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정신계 주술.
“껍데기가 아니야. 부정한 기운이 빠져나가서 이제 본질만이 남은 거다. 내가 도와줄 테니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잘 됐네. 마침 마법사 양성 프로젝트를 시작하려할까 했는데. 154면 합격 기준치를 한참 웃도는걸.”
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 아르세니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로 제가 마법사가 될 수 있을까요?”
“넌 얼마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마법사가 될 수 있다. 애당초 그런 재목이었으니 그 놈의 눈에 띄었던 거지.”
“정말 기운이 나는 소식이네요.”
아르세니오가 실쭉 웃었다. 반면 눈은 점점 감기고 있었다.
“아르세니오?”
“황자님, 죄송해요. 저는.”
뒷말이 들리지 않았다. 조명래 원장이 우리를 불렀다.
“이제 나가주셔야 합니다. 환자에겐 휴식이 필요합니다.”
나는 황자의 어깨를 쥐었다. 아르세니오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내키지 않은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라힐.”
그가 병실을 나오자마자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단순히 내가 네 편이라고만 말하지 마라.”
“그러면?”
“네 적극적인 지지자가 됐다고 널리 알려다오.”
“......그래도 괜찮겠냐?”
“내가 묻고 싶군. 그래도 괜찮겠나? 아버지는 내가 다른 사람을 지지한다는 걸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일 거다. 황가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
우르는 아버지를 자극하려고 내 부하를 자청했다. 이미 부자의 사이는 회복불가능한 단계로 접어든 것 같았다.
“안 될 것 없어. 하던 전쟁을 때려치우고 우리한테 뛰어올 정도로만 자극하지 않으면 돼.”
“장담은 못하겠군.”
우르는 자기 병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결연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고맙다, 아르세니오를 살려줘서.”
그는 한평생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남의 호의를 누려왔다. 그는 고맙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자신도 아니고 남을 위해 고마음을 표한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 빚은 어떻게든 갚겠다.”
“어서 낫기만 해. 지금 네게 바라는 건 그것뿐이니까.”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병원을 떠났다.
병원을 나서면서부터는 박이나 실장이 따라붙었다. 그녀는 나라살림을 도맡다시피 하면서도 내 스케줄을 조율하는 일까지 담당했다.
어떻게든 사람을 더 들여 업무분담을 해야겠으나, 그녀가 너무 유능한데다가 아직 그럴 여유가 나지 않았다.
“정기호 장군님께서 군사회담을 위해 대한민국 서울로 떠나셨습니다.”
“올 때 그냥 오지 말고, 경제전문가를 수소문해보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크록들이 슬슬 돈의 개념을 알아가고 있다. 화폐경제를 제대로 돌리려면 상업과 무역 등을 총괄할, 대한민국의 산자부에 해당하는 기관이 필요했다.
그런데 건국위를 구성할 때 유일하게 빠진 분야가 바로 경제부문이었다. 경제전문가 자체가 드물기도 하거니와, 대부분 주류경제학을 배우신 분들이라 맨땅에서 동전부터 유통시킬 전문가는 더욱 드물었기 때문이다.
달칵.
실장이 찻잔이 담긴 접시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그녀가 아직도 내 비서 노릇을 겸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실장님께 미안해서라도 비서는 구해야겠습니다.”
"괜찮아요. 이런 일이 오히려 제게 맞아요.”
"그러면 한시 빨리 경제전문가부터 구해야겠군요.”
"만약 정기호 장군님께서 실패하면, 아버지께 좋은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부탁드려볼까요?”
"실장님 아버님이 누구십니까?”
"박병철 외무부장관님이세요.”
"풉."
나는 그만 마시던 차를 붐어내었다.
“괘, 괜찮으세요?”
실장이 놀래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허둥지둥 내 앞섶을 닦았다.
“괜찮습니다.”
자기 딸을 부탁한다던 박병철 장관의 청탁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했다.
황국에 대사관이 생길 일이 없어져 물 건너갔을 청탁일 줄 알았다.
그랬는데 설마하니 딸을 내 보좌관으로 심어뒀을 줄이야.
얼추 수습이 되어가던 참이었다. 집무실 귀퉁이가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아무런 조짐도 없이 반원형의 포탈이 나타났다.
잠시 후 포탈에서 늘씬하게 뻗은 다리가 빠져나왔다.
곧이어 몸에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인은 몇 걸음 또각또각 다가오더니,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고개방향을 따라 붉은 머리카락이 익은 산수유마냥 늘어졌다.
우르술라였다.
환상이 아니라 진짜 우르술라.
나는 갑자기 그녀가 나타날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기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만을 쳐다보았다.
우르술라는 내게 밀착한 박이나 실장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짓굿은 투로 힐난했다.
“난잡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