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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05화 (105/205)

105화. < 독립 (6) >

삼일 후, 스트리아 원정대가 공화국 수도로 돌아왔다. 나는 지친 병사들을 위해 조출한 개선식을 열어주었다.

변변찮은 물건이 없어 고기와 음료를 노상에 잔뜩 늘어놓은 게 전부였지만, 크록들은 그것만으로도 층분히 즐거워했다.

모든 정비를 끝낸 후 최종적으로 내게 쥐어진 보고서는 다음과 같았다.

"전사 352명, 부상 700여 명이 피해의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큼.”

크롱크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대답했다.

크록들은 단순한 국민이 아니었다. 내 힘의 근원이자,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영주 이졸데가 받아들 성적표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그쪽은 최소 십만은 죽거나 다쳤다.

전사자가 적게 나온 데에는 재생력의 공이 컸다. 특히 검은 비늘을 두른 전사형 크록들은 한 명 한 명이 질기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보고서 뒷 페이지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공을 세운 전사들의 리스트가 기재되어 있었다. 비고란을 채운 건 그들의 공적이었는데, 내역이 가관이었다.

- 오룽크, 보급기지 1개소를 불태움. 중급지휘관 2명을 해치움. 1등급 무공훈장이 요망됨.

- 막토, 상급지휘관 1명을 해치움, 1등급 무공훈장이 요망됨.

- 로크, 상급지휘관 3명을 해치움. 막시무스의 덩치 치고는 쓸 만하나, 시야가 좁고 성급하다.

상을 달라는 잣대가 지극히 편파적이었다. 자기 부하는 조금만 활약해도 최고훈장을 수여하라고 써둔 반면, 막시무스의 부하는 몇 배나 되는 활약을 펼쳐도 쓸 만하다는 칭찬 한 마디가 전부였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싫어하는 막시무스의 부하라고 하여도 공을 제대로 기록해두긴 했다는 점이겠다.

"이건 막시무스 의견도 들어봐야겠는걸.”

“캇캇, 막시무스는 거기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크롱크가 볏을 부산스럽게 펄럭이며 웃었다.

"지금 내가 네 앞에 있다는 건 잊지 않는 게 좋다. 그 불경한 주둥아리를 베어버리는 수가 있으니.”

대답한 건 내가 아니라 막시무스였다. 그는 허리춤에 찬 장검, 이라고 주장하는 대검을 쓰다듬으며 투기를 슬쩍 흘렸다.

“그만, 그만.”

나는 싸움이 번지기 전에 중재에 나섰다.

"이 건은 크롱크, 네가 잘못했다. 상벌은 누구하고 친한가를 떠나서 공정하게 심사했어야지.”

“라힐님, 막시무스의 덩치들은 전술을 설명해도 알아듣질 못하고, 그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는 것밖에는 모르는 천치들입니다, 큼. 대열을 무너뜨려 아군에 불필요한 손실을 강요했기에 따끔하게 교훈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 도마뱀이 자신의 무능력을 부하들에게 전가하는군요. 다른 자들 같았으면 부대를 통솔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외람되오나 이 자에게는 장군 지위가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라힐님, 들으셨습니까? 방금 자기 부하가 통솔을 벗어났다는 걸 인정했습니다, 큼.”

“......상은 알아서 나눠주도록 하마. 내 앞에서 싸우지만 마라.”

"죄송합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두 크록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들이 사라지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눈만 마주치면 지치지도 않고 투닥거리는 늠들이었다. 그러나 서로 미운 정이 들었는지 아니면 그래도 동족이라는 것인지, 진짜 살기가 오가진 않았다.

똑똑.

두 크록이 빠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조심스러운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죠.”

방문이 달칵 열리자, 아름다운 소녀가 흰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등장했다.

소미.

그녀는 하늘색 원피스 위에 철갑옷을 받쳐 입었다.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는 소녀소녀하기 그지없었으나, 갑옷에는 베이거나 찍힌 상흔이 가득했다.

그녀의 마력은 이제 특이점을 넘어섰다. 응집된 마력이 아우라의 형태를 이뤄 가시적으로 표출될 정도였다.

"정말 강해졌네요, 오빠는.”

소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총리님께 들었는데, 저를 여기 신으로 만드셨다면서요?”

"그렇게 됐어. 너도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마음 들여다본 거 아니죠?”

"아직 그런 재주는 없다.”

소미가 가죽 소파 위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렸다.

"안 그래도 걱정이 많았어요. 한국에서의 활동만으로 힘을 모으기에는 너무 제약이 많았거든요. 비밀 프로젝트다보니 마음껏 술법을 쓰지도 못하고, 소문이 날까 무서워서 축복을 함부로 내리지도 못하고. 종교단체로 성격을 바꿔볼까 했지만 그건 또 아이돌이라는 신분이 발목을 잡더라고요.”

"비밀 프로젝트라는 게 크지.”

현대사회에서 신앙을 모으는 건 간단하다. 초자연적인 힘이 실재한다는 걸 보여주면 된다.

그러나 아직 어떤 개인, 국가도 초능력을 커밍아웃하지 않았다는 게 큰 부담이었다.

"언제쯤이면 에신이 세상에 공개될까요?”

"머지않았다는 느낌은 들어.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가고 있으니. 언젠가 둑이 무너지듯 단번에 세상이 바뀌겠지."

"중국은 어때요? 이번에 실종된 사람이 많이 나왔을 텐데.”

"그쪽은 정보통제가 가능하다고 봐.”

“수십만 명이 사라진데도?”

"거긴 그 전에 수십만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러려니 할 나라라서.”

"그러려나요.’’

"나도 확신은 못해. 자세한 이야기는 로이.......네스에게 들어봐야겠지.”

이네스는 내게 군체의식에 관한 모든 비밀을 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도 내 군대와 같이 돌아왔으나, 요 며칠 전후처리에 바빠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

"아, 그냥 확 다 뿌려버릴까보다.”

소미가 비음을 섞어 장난스럽게 말했다.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소미처럼 전지구적인 팔로워를 거느린 셀럽이 초능력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면 과연 세상이 단숨에 바뀔지도 몰랐다.

똑똑.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박이나 비서실장이었다. 그녀는 소미에게 목례로 인사를 건넨 뒤, 내게 시선을 주었다.

"대통령님, 황국의 사자가 도착했습니다.”

"황국이 사자를?”

"알현실 밖에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나와 소미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거 아니죠?”

소미가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로켄과 그니르가 날 벼르고 있는 정황을 감안한다면, 같이 싸워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사람을 보내진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소미와 함께 대전으로 향했다. 그 전에 국가지도자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갑옷과 망토를 두르는 걸 잊지 않았다.

수많은 신하들이 먼저 대전으로 나와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수석마법사이자 초대 마법청 장관이 될 오르기,

건물 안에서조차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정기호.

그의 직속부하이자 여전히 와이셔츠 패션을 고수중인 료헤이.

다가트의 전사 아길리와 불멸의 크록 카룩카이 등,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강자들이다보니 이 넓은 홀이 꽉 찬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소미가 단상 아래에 시립했다. 내게서 가장 가까운 위치였다.

나는 왕좌에 앉아 오만한 투로 말했다.

"사자가 찾아왔다지?”

"그렇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에사인이 된다는 건 일종의 쇼 엔터테인먼트라던 말을 잊지 않았다.

이 세계는 이미지가 전부였다. 누가 이미지를 선점했느냐, 그리고 어떻게 그 이미지를 지켜낼 것인가.

사자는 초장부터 그 싸움을 걸어왔다.

그는 놀랍게도 소미처럼 유형화된 아우라를 밖으로 뿜어내는 자였다.

키는 이 미터 남짓했으며, 뿜어내는 기세는 사냥을 나선 맹수처럼 팽팽했다.

투구덮개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진 않았다. 투구를 비롯하여 걸친 갑옷과 무구는 하나같이 신적인 레벨의 아티펙트였다.

"투구 벗어라.”

정기호가 사납게 말했다.

"뭉개버리기 전에.”

사자가 내게서 서른 걸음 안쪽까지 다가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이윽고 그의 손이 천천히 투구를 감싸 쥐었다.

면갑 틈새에서 검은 연기가 꿀렁이며 새어나왔다. 검은 연기는 그가 투구를 완전히 벗을 때까지 흘러내려 바닥을 드라이아이스처럼 잠식해갔다.

사자는 여성이었다, 창백한 인상을 가진.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낯빛이 흡사 밀랍인형 같았다. 눈동자에 어찌나 총기가 없던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질 지경이었다.

갑자기 소미의 숨이 거칠어졌다.

“..이라올라님?”

이라올라?

들어본 이름이었다.

- 이라올라님은 저를 유일하게 아껴주시는 분이셨어요. 그분은 제가 부당한 취급을 받지 않도록 보호해주시고, 공부를 할 기회도 마련해주셨어요.

그녀는 실종된 강철의 자매단 단장이자, 전생에서 소미의 은인이었던 자다.

덕망이 높고 적수가 많아 언제나 오데르의 암살명단 최상단에 이름을 올려두기도 했었다.

그랬던 여자가 어째서 강철의 자매단이 해체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다가, 갑자기 사자라는 직분으로 모습을 드러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이라올라, 이 땅의 주인이자 유일하신 황제폐하를 섬기는 자다. 폐하의 명령을 받자와 신생 공화국의 주인에게 전할 말이 있다.”

그녀는 신생 공화국을 발음할 때 조소를 끼워 넣었다.

“말하라.”

“폐하께서는 그대들이 이황자 우르 게네발님의 존체를 불법적으로 구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엄중히 받아들이신다. 그러나 그대들이 서부전선을 사수하는 데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본디 황족의 존체를 침해하는 행위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극형에 처해지는 중죄이나, 폐하께서는 한량없는 자비를 베풀어 일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시고자 한다.”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권력을 가진 자가 부하들에게 통고하는 듯한 어휘였다.

나는 옥좌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댄 채 심드렁한 투로 물었다.

"그래서?”

"죄인 라힐은 즉시 이황자 우르 게네발님을 자유롭게 하라. 폐하와 일곱 권능을 욕보이는 일체의 행위를 멈추고, 보름 내에 질서의 궁을 찾아와 군신의 예를 청하라. 오직 그 길만이 그대에게 삿된 마음이 없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날더러 군신의 예를 청하라고?”

"주군, 일고의 가치가 없는 소리입니다.”

오르기가 진중하게 조언했다.

아무래도 나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정기호는 팔짱을 낀 채 내게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하면 당장 검을 뽑을 태세였다.

"라힐님은 죽어가던 황자님을 치료해주셨다, 존체를 침해한 게 아니라!”

아길리가 당찬 목소리로 항변했다.

이라올라가 고개를 돌려 아길리를 쳐다보았다. 반신의 경지에 근접한 마력에, 살벌하기 짝이 없는 살기가 담겨 아길리를 직격했다.

그러나 아길리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녀는 다가트를 섬기는 용사였다. 그녀는 가슴을 당당히 펴며 이라올라에게 눈싸움을 걸었다.

“...그것이 그대들의 죄다.”

"뭐라고?”

"황제폐하께서 황자님의 치료를 허하지 않으셨다. 황자께서 그런 상태가 되신 건 폐하의 오롯한 의지다. 이 땅에 발을 들인 이상 누구도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감당 못할 전쟁을 벌이는 나라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폐하께 감당 못할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필요에 의한 전쟁이 있을 뿐.”

그녀의 보랏빛 입술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신하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그들이 날 대신하여 말을 해줄 순 있겠으나, 결정을 내리는 건 내 몫이었다.

나는 턱을 괸 채 잠깐 동안 이라올라를 내려다보았다.

“카룩카이.”

"불렀는가, 위대한 이여.”

"병원으로 가서 황자를 데려와라.”

이라올라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나는 그녀의 눈빛을 태연히 받아넘기며 덧붙였다.

“왜 그래? 당사자 말도 들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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