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독립 (3) >
구름같이 풍성한 혹발을 가진 여성이 발치에 쓰러져있었다. 로이가 묘사한 대로 체구가 아담했으며,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모를 가진 소녀였다.
게다가 그녀는 종족이 달랐다.
그녀는 목덜미에 패인 홈을 가리지 않도록 고안된 특수한 디자인의 갑옷을 착용 중이었다.
저 여섯 개의 작은 홈이 바로 수생족의 아가미였다.
이 세계는 이동이 불편하고 땅덩이가 넓다보니, 고립된 환경에서 독립 진화를 일으킨 종족이 많았다.
비익족이 하늘을 날아다닌다면, 수생족은 물속에서 운신이 자유로운 인간의 아종이었다.
- 평범한 여자가 아니다, 제74집단군의 대교, 이네스라고 한다.
- 대교? 상교보다 높은 건가?
처음 상대했던 중국군 전투형 개체의 계급이 상교였다. 정기호와 동수가 예상될 정도로 강했던 놈으로 기억했다.
- 한 계급 위다.
그녀의 근처에는 오직 아군 시체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실력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래도 성별을 갈아탄다는 건 단순히 효용으로 따질 문제가 아닌 것 같다만...
- 시간이 없다, 서둘러다오.
로이의 의념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그쪽은 지금쯤 벼랑 끝에 매달린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 알았다, 정 네가 원한다면.
나는 소녀의 어깨에 대검을 가져다대었다. 충고는 충분히 해줬으니, 선택의 결과는 본인이 져야 할 몫이었다.
번쩍.
일순간 강렬한 빛이 소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광채는 서너 차례 눈이 부실 듯이 명멸한 후 사그라졌다.
크록 몇 명 축복하는데도 진이 빠져 빌빌대던 게 엊그제였다. 그러나 이젠 결코 적지 않은 마력을 나눠줬는데도 아무런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소녀의 눈꺼풀이 스르르 위로 올라갔다. 크록의 것과 흡사한 얇은 피막이 안구를 덮고 있었다. 피막마저 완전히 걷히자, 보석처럼 영롱한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고맙다, 라힐.”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그래.”
어색한 목소리.
눈앞의 여리여리한 소녀가 암살자 시절 등을 지켰던 로이라고 생각하니, 솜털이 간질거리는 듯한 위화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 개체를 고른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직 발현되지 않은 잠재력에 네 축복의 힘까지 합친다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존재는 많지 않을 것이다.”
로이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분석을 늘어놓으며, 자연스레 가슴께에 손을 가져갔다.
"야."
나는 로이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설명하라는 듯이 검은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책망하는 듯한 눈빛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서.”
"흉통이 느껴진다. 전투의 후유증인 것 같지만, 심하진 않다.”
로이는 몸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분석을 이어나갔다. 나는 주제를 돌릴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계약사항을 다시 확인해보지. 너는 앞으로 나를 위해 일할 것이며, 군체의식의 근원과 세계의 비밀에 관해 가르쳐주어야 한다. 이의 있냐?”
"없다.”
"좋아. 그리고 난 이제부터 널 이네스라고 부르겠다.”
"내겐 로이라는 이름이 있다만.”
"시끄러, 몸이 바뀌면 이름도 바뀌어야지.”
“...알겠다, 그게 네게 편하다면.”
그녀는 순순히 의견을 접어두었다. 아마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생존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겠지.
모든 것에 앞서 생존가능성부터 따지는 것도 그녀가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였다.
나는 그녀를 계속 로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로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내 축복을 통해 군체의식이 개별개체화된, 세상에 하나뿐일지도 모를 특별한 존재로 거듭났다.
이네스를 데리고 본영으로 돌아가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난데없이 나타난 수생족 여전사 때문이었다. 수생족은 결코 물가를 떠나려 들지 않기에, 내륙에서는 비익족보다도 더 희귀한 종족이었다.
"완성되었다.”
료헤이가 다 만들어진 들것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공중으로 이동할 것을 감안해 팔다리를 고정할 끈이 들것 여기저기에 달려있었다.
"열 명이면 충분하겠죠?”
소미는 그사이 강철의 자매단원들을 준비시켜두었다. 그중 한 명은 박쥐날개를 달고 있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래. 들것 하나당 넷씩 붙으면 되니까.”
"서둘러야겠어요. 상태가 정말로 좋지 않거든요.”
우리는 아르세니오와 황자를 각각 들것에 눕혔다. 황자가 숨을 쥐어짜듯 몰아쉬며 내게 말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운명이 흘러가는군.”
“입을 열 힘이 있으면 아껴둬. 긴 밤이 될 테니.”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
"힘 아끼라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끝이 머지않았으니.”
그의 목소리가 사뭇 비장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전생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암살자였다는 것도. 라힐이란 이름이 왠지 낯익다고도 생각했었다.”
나는 그의 몸을 고정하는 매듭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착각이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조차 이젠 검은 빛깥이었다.
그는 의식을 잃기 전, 최후의 기운을 그러모아 내게 유언 같은 한마디를 남겼다.
"아르세니오를....부탁한다.”
나는 강철의 자매단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출발합시다.”
“예!”
자매단원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들것을 들어올렸다. 나는 소미에게 뒤를 맡기고, 자매단원 한 명에게 몸을 의지해 높이 날아올랐다.
이 황자 우르 게네발.
그는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단지 그의 능력이나 신분이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나는 울토르에게 로켄도, 황제도 베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수십억에 달하는 황국 신민들을 하루아침에 무국적자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었다. 황국에는 황제를 대신할만한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했다.
젊고 유능하며, 인간적이고, 정당성을 가진.
나는 우르에게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우리는 스트리아 벌판에서부터 본진까지 쉬지 않고 직선거리로 날아갔다.
강철의 자매단원들은 아침 해가 뜰 때부터 쉬지 않고 싸웠다. 그러고 쉴 틈도 없이 임무에 동원됐으니 체력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자매들은 들것을 드는 순서를 바꾸거나 교대조를 운영하는 등 어떻게든 체력을 아껴보려 노력했다.
이때 엘리시아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혼자 네 명분의 역할을 거뜬하게 해냈다. 그녀는 남다른 활약을 보이면서도 입술을 꾹 다문 채 다른 자매들과 일체 소통하지 않았다. 전임 부단장으로서 자존심만은 놓을 수 없다는 듯이.
우리는 기엔 영지를 지나 남쪽으로 날아갔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발밑에서 파도가 치듯 넘실거렸다. 가도 가도 끝없는 수해만이 계속 되었다.
"도시가 보입니다!”
자정을 훌쩍 넘겼을 때였다. 자매단원 한 명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이 오지에 도시가 도사리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 같았다.
나도 상상하지 못했다.
본진에 전기가 들어왔을 줄은.
화려하진 않았다. 마치 못 먹고 못 살던 칠팔십 년대처럼 밋밋한 형광등을 알알이 켜둔 것 같았다. 그러나 문명이라고는 존재치 않는 정글 한가운데에서 전기가 만들어낸 빛이란 그 자체만으로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부우우......
자매단원이 나팔을 불었다. 저쪽에서도 우리를 감지했다. 경계근무를 서던 특전사 대원들이 곤두박질치듯 초소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게 보였다.
“저곳에서 내립시다.”
나는 관청 앞마당을 손으로 가리켰다. 자매단원들은 환자가 다치지 않도록 세심한 동작으로 마당에 내려앉았다.
곧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나는 가장 먼저 마주친 병사에게 크게 소리쳤다.
"의사가 필요합니다!”
돌풍 프로젝트를 함께했던 의사는 다섯 명.
대부분 바이오 계통의 연구원이었다. 그러나 본진 규모가 커지면서 몇 명의 의료인력을 바깥에서 수급했다고 알고 있다.
병사들이 들것에 우르르 달라붙었다. 다행히 병원은 관청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자리했다. 3층 규모에 응급실을 갖춘, 상상했던 것보다 더 본격적인 규모의 건물이었다.
"응급환자입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뛰쳐나와 환자를 병상으로 옮겼다. 간호사들 중에는 전사형 크록이 한둘 끼어있었다. 크록이 벌써 간호과정을 수료했을 리는 없으니, 순전히 힘쓰는 일을 때우기 위해 채용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복도를 서성이며 진단을 기다렸다. 빠른 판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손을 쓸 수 없다면 서울로 급송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병상을 몰고 떠나간 의료진들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인원이 한정적이다 보니 대기인력까지 모조리 수술실에 투입된 것 같았다.
"대통령 각하.”
한참 후, 나이 지긋한 의사가 간호사 둘을 대동하고 다가왔다. 나는 그의 왼쪽 가슴께에 꽂힌 명찰부터 살펴보았다.
원장 / 외과 전문의 조명래
에신 수도병원
"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좋지 않습니다.”
조명래 원장의 이마주름이 깊게 패였다.
“우르 황자께서는 전신에 4도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체표가 완전히 소실되었고, 근육과 신경계가 넓게 손상을 입었습니다. 제 가장 큰 의문은 이런 엄중한 화상을 입고도 환자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육십 평생 응급환자를 보아왔건만 이런 사례는 처음입니다.”
"...아르세니오는 어떻습니까.”
"그분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쇼크를 일으켰습니다. 인접한 장기가 너무 많이 손상되어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로서는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게 기적이라고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 병원을 옮겨야 하겠습니까?”
"화상전문병원이나 아는 내과의를 소개해드릴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 어느 병원을 가더라도 다를 게 없으리라 봅니다.”
“답이 없다는 겁니까? 환자가 죽는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건 아닙니다.”
조명래 원장이 모호한 투로 대답했다. 나는 그가 느릿한 동작으로 안경을 고쳐 쓸 때, 혼탁한 눈동자에 야망이 맴도는 걸 읽어냈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차수진 박사님의 팀이 크록에게서 떼어낸 만능 재생세포를 연구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논문이 제가 대학병원 교수직을 내려놓고 이곳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약 만능 재생세포의 임상을 허락해주신다면, 이곳에서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낼 위대한 한 걸음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쥐뿔도 없는 격오지에 왜 이런 번듯한 병원이 차려져 있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에신은 기회의 땅이었다. 뽀시래기 금이 강바닥에서 솟아난다던 19세기 캘리포니아처럼.
어떤 면에서 보자면 현대사회도 정체되어있다고 할 수 있었다. 혁신을 끌어낼만한 힘이 과학밖에 남지 않았으니.
반면 에신에는 주술이나 마법 등 변수를 창출할만한 요소가 무궁무진했다. 명리에 죽고 사는 자들이 그런 냄새를 놓칠 리가 없었다.
"솔깃한 제안 같습니다만, 어떻게든 임상을 해보고 싶은 마음에 간과하신 가능성이 있진 않겠습니까?”
"제가 임상을 해볼 기회를 간절하게 바라온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에사인에게 거짓을 고할 만큼 제 담이 크지 못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읽었다.
덤으로 그의 죄과도 읽어냈다. 그의 도덕성은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더 때가 묻은, 서울 거리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부류였다.
“차수진 박사에게 연락하세요.”
나는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그의 야망 일부를 책임감으로 바꿔놓기 위해.
"가서 반드시 살려야 할 사람이 있다고 전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