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독립 (2) >
료헤이는 천황이 가짜라고 판명됐던 게 어지간히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길리도 나를 따라 정신을 차리는 중이었다. 연달아 아길리까지 의식이 돌아오자, 드디어 우리에게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오빠?”
"라힐이냐?”
가장 극적인 반응은 로켄에게서 나왔다.
"뭡니까, 당신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의 똥 씹은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별로 안 반가운가보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사람들이 에사인 에사인 하는지 알겠다.
일정 수준을 넘어선 과학은 마법처럼 보인다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선 마력은 신의 역사 그 자체였다.
로켄과 나의 거리는 서른 걸음 남짓했다. 암살자 시절의 나였다면 두 번은 간격을 좁혀야 상대를 사정권에 넣을 수 있을 거리였다.
그러나 지금의 내게 서른 걸음이란 상대의 목젖에 검극을 갖다 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상, 오직 적을 베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현실세계에서 일종의 압력이 생겨났다. 로켄은 날개를 퍼덕이며 서둘러 범위를 벗어났다.
나는 그에게 개의치 않으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잿빛 검날을 가진 대검이 허공을 가르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설마 그 검은...!”
로켄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까지 더듬었다.
"설마가 맞다.”
나는 그의 의심을 친절하게 확신시켜주었다.
옆에서는 아길리가 엿가락 뽑듯 허공에서 무구를 뽑아내었다. 그녀는 투구와 가슴갑옷, 양손도끼까지 무려 세 피스를 하사받았다.
"봐줄 생각하지 마. 아주 못된 놈이니까.”
"응, 알았어요.”
소미가 허리를 기울이며 발검자세를 취했다. 대체 언제 검술을 배운 건지, 자세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전장에 싸늘한 냉기가 내려앉았다. 소미의 의지가 미치는 곳의 온도가 뚜렷이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로켄이 공언한대로 여정의 끝에 가까워진 듯했다.
료헤이는 탈구된 어깨를 힘으로 끼우며, 소미의 앞으로 분연히 나섰다. 기세만으로는 혼자서 로켄의 일격을 다 받아낼 것만 같았다.
"... 어이가 없군요.”
로켄이 실소를 흘렸다.
"꿈의 지배자를 적으로 돌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숙고해보시길 바랍니다.”
별안간 그의 몸이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잽싸게 달려가 그를 허공에서 받아냈다.
로켄은 아르세니오의 몸을 버리고 달아났다.
무적이라 불린 힘을 현계에서 상대하는 건 부담이 됐겠지.
그래도 추한 건 마찬가지였다. 울토르보다 서열도 더 높은 놈이.
아르세니오는 다시 날개의 흰 빛깔을 되찾았으나, 상태가 무척 엄중했다. 나는 우선 그의 입에 남은 약부터 들이부었다. 몸달래풀의 즙이 피거품과 함께 입가로 줄줄 흘러내렸다.
"마력과잉현상이다.”
황자가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영혼이 허용하는 한계 이상의 마력이 주입되면 내부 장기가 손상되어 급속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잠깐 볼게요.”
소미가 신중한 표정으로 아르세니오의 상태를 살폈다.
"생명반응이 무척 미약해요. 당장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죽고 말 거예요. 하지만 몸달래풀의 즙은 바르거나 섭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장기손상에는 대처하는 게 불가능해요.”
"부탁한다, 그를 살려다오.”
황자가 꺼져가는 불씨처럼 희미하게 말했다.
"나는 어찌되어도 좋다. 나는 살아봤자 세상에 그리 득이 될 게 없는 놈이다. 그러나 아르세니오는 다르다. 그 아이는 세상에 때묻지 않은, 다정하고 연민어린 천성을 타고났다. 이 나라가 그런 사람으로만 가득 채워진다면 이렇듯 싸우거나 할 일도 없었겠지.”
"황자님, 자기 자신을 너무 비하하진 마세요. 황자님도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거셨잖아요.”
황자가 소미에게 묘한 시선을 주었다. 마족의 여인에게 위로를 받으리란 상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하긴 나도 소미가 황족을 위로하는 날이 오리란 상상을 못했었다. 그녀는 귀족들에게 모진 수모를 겪은 끝에 죽음을 맞이했었다. 그런 경험을 뒤로한 채 황자를 보듬는다는 건 그녀 또한 다정하고 연민어린 천성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엘리시아를 구박할 때는 살벌했었지만.
"당신들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황자가 웃었다.
"나는 아르세니오의 존재가, 그가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더럽혀진 내게도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삼았다. 나는 지금 아버지에게 내쳐질 때보다 몇 배나 더 두렵다. 그가 나를 구해주지 못하고 죽을까봐.”
“아르세니오는 죽지 않을 거예요. 황자님도 돌아가시지 않을 거고요.”
소미가 동의를 구하듯 나를 쳐다보았다.
"오빠, 기억하시죠? 엘리시아 날개모양이 바뀐 거.”
"기억하지.”
엘리시아는 강철의 자매단 전임 부단장이자, 전생에서 소미를 고문치사한 귀족집단의 일원이다.
그녀는 서부전선에서 큰 상처를 입어 비익족의 긍지인 흰 날개가 박쥐 피막날개로 바뀌는 수모를 감당해야만 했다.
변화의 에사인은 결코 대가없이 온정을 베풀지 않았다. 그의 권능은 은혜를 갈구하는 자가 가장 바라지 않았던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의 권능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목숨을 구할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남는 장사가 아닐까.
"서둘러 변화의 에사인을 섬기는 사제를 수소문하는 게 좋겠어요. 필요하다면 포탈을 통해서 황도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황도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황자가 못을 박았다.
내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게다가 신성한 육신을 변화시키는 건 신성모독이라던데.”
“네? 그런 법이 어딨어요?”
“있어, 이 나라에는. 황족에게만 적용되는 법이라 우리가 몰랐던 것뿐이지.”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지 않았느냐.”
황자가 피식 웃었다. 그의 부스러진 입술에서 잿가루가 먼지처럼 휘날렸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술법을 쓰지 않고도 고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요?”
"본진으로 데려가자.”
“네?”
소미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되물었다.
"안 될 거 없지 않어? 마법만 못쓴다 뿐이지, 우리나라 의료수준은 세계 최고니까. 기술적인 지원은 의사들이 하고, 우리는 몸달래풀 같은 마력 깃든 약초를 지원해준다면 손상된 장기도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본진에 병원이 있었어요?”
"있긴 해, 연구인력이 대부분이지만. 정 안될 것 같으면 한국 정부에 지원 요청을 해야겠지.”
소미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의 자매단, 이젠 전원이 비익족이지?”
“네."
"가장 빠른 날개를 가진 자매들을 준비시켜줘. 여덟 명쯤. 그동안 우리들은...”
나는 황자의 키를 눈대중으로 재보았다.
"공중 들것을 만들고 있을 테니.”
소미가 자매단을 준비시키러 떠났다. 그동안 나는 료헤이와 함께 들것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사실 나는 아이디어만 냈지 거들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같이 작업을 해보려고 노력했으나, 료헤이의 손재주를 따라가긴 무리였다.
"잘 봐라.”
료헤이는 찢어진 와이셔츠를 입으로 뜯어내 팔에 칭칭 감더니, 널려있는 널빤지를 모아 놀라운 손재주로 들것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기가 막힌 건 중구난방으로 재료를 갖다 쓰고 있는데도 그가 들것의 무게중심을 언제나 귀신처럼 잡아낸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들것은 급조한 것 치고 놀라운 완성도를 지니게 되었다.
- 라힐.
한창 료헤이의 원맨쇼를 감상중일 때, 희미한 사념이 전달되어왔다.
사념의 출처는 바닥에 쓰러진, 겹눈을 가진 곤충에서부터였다.
...로이.
잠깐 사이 로이에 대해 까맣게 있고 있었다. 나와 달리 그는 아직도 그곳에 매여 있는 채인데도.
- 미안, 로켄 때문에 늦었다.
- 네가 빠져나간 후로 이곳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이젠 내가 마지막으로 남은 파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 그런데 어떻게 너를 보존할 수 있다지? 말해두지만 나는 정신계 술법에 완전히 무지해.
- 너는 에사인이다. 말인즉슨 신성한 계약이론에 따라 네 힘을 다른 존재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의미지. 바닥에 널린 군체병사 중 하나를 골라 축복을 내린다면 현계에 내 존재를 묶어둘 수 있을 것이다.
- 간단하네.
- 서둘러라. 우리의 생물학적인 죽음이 머지않았으니.
하나의 중국은 현재 정신적인 죽음만을 맞이한 상태였다. 정신세계에서 패배하는 순간 수백만에 달하는 군체가 동시에 의식을 잃으며 쓰러졌으나, 아직 그들의 몸에는 심장이 뛰고, 혈관을 따라 피가 흘렀다.
나는 대검을 들어 눈앞의 메뚜기에게 축복을 내릴 준비를 했다. 그 즉시 로이로부터 다급한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 당장 멈춰라.
- 왜? 네가 해달라며.
- 그 종족은 대부분의 지성종족에게 혐오스러운 외관을 가졌다고 여겨진다. 구강구조가 달라 공용어를 발음할 수도 없고, 두뇌의 용적이 낮아서 지능을 백퍼센트 활용하기도 힘들다. 외골격을 지녔기 때문에 상처를 입었을 시 쉽게 회복이 되지 않으며...
- 알았어, 알았다고. 어떤 육신을 원하는데?
- 신호를 따라와라. 가장 생존율이 높을 육신을 물색해두었다.
메뚜기로부터 아주 작은 마력이 빠져나와 작은 발광체를 이루었다. 발광체는 지면으로부터 십 센티미터 높이까지 두둥실 떠올라 나를 인도했다.
나는 료헤이를 내버려둔 채 발광체를 따라갔다. 발광체는 나를 곧장 전장의 한가운데로 데려갔다.
전장은 그야말로 육신의 산이라는 수식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주인 잃은 몸뚱이가 들판을 가득 뒤덮었다. 몸뚱이 대부분은 정신의 죽음을 맞이한 중국군의 육신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같은 최후를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해치지 마세요, 제발.......”
놀랍게도 그들 중 일부는 멀쩡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사람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 우리가 울토르를 굴복시키는 데 너무 몰두했기 때문에, 최근 합류한 개체들은 정신계 술법으로 의지의 발현만을 막고 있었다. 나와 달리 타이밍이 좋았던 거지.
- 너는 어쩌다 그 꼬락서니가 됐냐.
- 네가 죽고 나서 나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외팔이 암살자가 혼자 서른 번이 넘는 살행을 성공시켰으면 할 만큼 했다고 본다만.
발광체가 움직이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유난히 시신과 몸뚱이가 많이 나온, 격전지의 한가운데였다.
- 여기 어딘가에 네 이상적인 몸이 있는 거냐?
- 그렇다. 체구가 작고 대사율이 높아 생존에 필요한 칼로리 요구량이 적으며, 대부분의 지성종족에게 호감을 주는 외관을 지녔기 때문에 무리생활에 이점이 있다. 신체의 단련도는 추가적인 개발이 불필요할 정도이며...
- 설마 네가 말한 이상적인 몸이라는 게.......이거냐?
- 그렇다.
발광체가 한 주인 잃은 몸뚱이 앞에서 멈춰있었다. 나는 잘못 본 건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의 설명과 일치하는 육신은 오직 내 앞의 이것 하나뿐이었다.
- 너 절반은 로이라면서.
- 그렇다.
- 이게 정말로 네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맞냐.
- 이제 나와 우리가 최우선시하는 가치는 오로지 생존이 되었다. 나 개인의 기호는 개체의 생존이 담보된 뒤 고려해도 늦지 않다.
그가 아무렇 잖다는 듯이 대답했다.
- 여전히 납득이 안 가는데.
- 우리는 네 납득을 바라지 않는다, 라힐.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마지막 확인절차를 거쳤다.
- 여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