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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00화 (100/205)

100화. < 독립 (1) >

이걸 군체의식의 무서운 점이라고 해야 할까, 취약점이라고 해야 할까.

사소한 파편조차도 알 거 다 안다는 점이.

"너무 솔깃하군요. 함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길리가 들으라는 듯이 경고했다. 나는 오히려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중이었다. 나는 울토르의 힘을 받아들인 뒤로 굳이 술법을 쓰지 않아도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경지에 도달했다.

더군다나 지금 상황이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에 올라탄 것이나 마찬가지라, 함정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먼저 우리를 밖으로 꺼내준다면 네 조건을 고려해보마.”

"너희가 이것저것 잴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거절하진 않겠다. 라힐이란 자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한 가지 더, 너는 앞으로 날 위해 일해줘야한다.”

"얼마든지. 마침 군체를 대신해 기댈 조직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더군다나 너는 우리의 소멸에 기여도가 무척 높다. 네가 이끄는 조직이라면 필시 생존율이 높을 터.”

로이를 곁에 두는 건 일말의 불안함 때문이었다. 이래나 저래나 그는 서부전선을 단독으로 무너뜨린 에사인의 후신이었다. 눈 밖에 두면 무슨 뻘짓을 할지 몰랐다.

"계약 성립이다.”

나는 로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에신에는 악수를 나누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제스쳐를 이해한다는 건 그가 잡탕이 확실하다는 증거였다. 이것 때문에라도 나는 그를 혼자 둘 수 없었다.

"그럼 출구로 안내하도록 하지.”

로이가 한 차례 박수를 쳤다. 순간적으로 주변 배경이 전환되었다. 나는 단번에 우리가 심연의 밑바닥을 벗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허허벌판에 어둡기만 하지만, 공기의 맛이 확연히 달라졌다. 타르 같은 눅진눅진함이 소나무 숲 한가운데 데려다놓은 것만 같은 청량함으로.

“...신통방통한걸.”

"여긴 운 좋게 살아남은 표층의식의 일부다. 하지만 곧 공허에 잠긴 다른 파편들처럼 소실되고 말겠지.”

로이는 어디론가 앞서 걸어가더니,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

"예기치 않은 변수가 발생했다.”

그가 난감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들의 육신 근처에서 아주 강력한 에사인이 감지되었다.”

"에사인 누구?”

"로켄이다.”

“그놈이 라힐님의 몸을 노리는 게 분명합니다.”

아길리가 이를 갈며 말했다.

로켄이 우리 주변에 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는 현재 아르세니오의 몸에 빙의한 상태고, 우리는 같은 지점에 육신을 버려두고 정신세계에 진입했다.

시간상으로도 로켄이 이곳을 빠져나간 건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그놈은 저나 아길리님을 노리는 게 아닐 겁니다. 그럴 정도로 제가 신경이 쓰였다면 이곳에서 저를 마무리하고 떠났겠죠.”

"그러면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아르세니오 행세를 하고 있는 걸까요?”

"로켄이 빙의했을 때는 아르세니오인 척 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마력 반응에서부터 너무 차이가 나니까요.”

“확인해보겠나?”

로이가 물었다.

"근처에 한때 우리의 일부였던 육신이 많이 널려있다. 원한다면 그들 중 하나의 눈을 통해 현실세계를 관찰해볼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수단이냐?”

"기초적인 정신감응술법이다. 내가 너희들보다 훨씬 약하다는 걸 잊지 마라. 정 못 미덥다면 자력으로 술법에서 빠져나오면 그만이다."

"라힐님.”

아길리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 너무 위험하다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로이가 나를 해칠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비유를 하자면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격이었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내게 청했다.

"어차피 말리셔도 듣지 않으실 것 같아서, 제가 가는 게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냥 같이 갑시다.”

나는 씩 웃으며 아길리에게 손짓했다.

"결정을 내린 모양이군.”

로이가 다가와 우리의 두 손을 덥석 쥐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라. 곧 내가 보는 걸 너희도 함께 보게 된다.”

그가 말한 대로 술법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었다. 전사인 내게조차 메커니즘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나는 잠깐 사이에 전장에 쓰러진 한 전투형 개체의 몸 안에 깃들었다. 정확히는 군체의식과 일시적으로 감각을 공유하는 것이지만.

그런데 하필이면 이 개체가 곤충형이었다. 수천여 개로 쪼개진 겹눈 탓에 뷰가 마치 방충망을 사이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듯했다. 망막에 맺히는 상은 물안개가 낀 듯 흐릿했지만, 움직이는 물체는 기가 막히게 잡아냈다.

나는 머지않아 로이가 왜 곤충을 택했는지 깨달았다. 겹눈은 다른 방향을 보기 위해 머리를 돌릴 필요가 없었다. 거의 360도에 가까운, 전방위적인 시야가 제공되었다.

내가 이런 눈을 가진 놈들하고 싸웠단 말이지.

“......납득할 수 없군.”

이황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선 황자의 쉰 목소리가 반가웠다. 죽지 않았을까 걱정했었는데.

그의 주변에 중국군 시체들이 무더기로 널려있었다. 마차는 반파되었고, 나와 아길리의 몸으로 추정되는 육신이 한쪽 구석에 고이 눕혀져있었다.

그리고 로켄이 보였다.

로켄은 검은 날개를 감추지 않은 채였다. 나는 그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술법을 깨고 뛰쳐나갈까 갈등했다.

그러나 암살자의 본능이 뜨거운 가슴을 차갑게 식혔다. 지금은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주고받는지 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어째서 살릴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거냐? 이 자들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은인들이다!”

"황자님께서 언제부터 이 나라를 그토록 아끼셨습니까.”

로켄이 진하게 조소했다.

"아니면 이것마저 황자님의 새로운 놀이입니까? 궁정에 틀어박혀서 모략을 짜는 것도, 계집질을 하는 것도 싫증이 나셨나요?”

“너는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르세니오의 육신을 뒤집어쓴 채 죄 없는 신민들을 재미삼아 죽였지 않느냐! 너는, 내가...!”

"쉬잇,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시면 다른 사람이 오해하겠습니다.”

로켄이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대며 히죽 웃었다.

"그래서 그놈에겐 정신세계에서는 서로 힘을 흡수할 수 있다고 경고해두었지요. 본인이 리스크를 감안하고 선택한 결과이니 불만도 없을 겁니다.”

"아니야. 너는 그의 힘을 흡수하지 않았다. 붕괴해가는 정신세계에 내버려두고 왔지.”

“그거나 이거나 무슨 차이입니까?”

"......."

황자는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다. 로켄은 그런 그가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보다 황자께서는 본인 신상부터 챙기셔야겠습니다. 대체 그게 무슨 꼴입니까? 신성한 형체가 태워먹은 생선처럼 되지 않았습니까? 듣자하니 이번엔 남들 앞에서 가면도 벗으셨다는데, 위대하신 분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똑똑히 깨달으셨을테지요.”

“......내 몸은 내 것이다.”

"아닙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의 피와 살을 물려받은 분입니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무엇 하나 당신 것이 없지요. 참고로 말씀드립니다만 마지막으로 제게 그런 선언을 하셨던 황자께서는 몸이 바짝 타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족히 오백 년도 전의 일입니다만.”

“내게 협박을 하는 것이냐.”

“황가의 어른으로서 법도를 알려드리는 것이지요. 충심의 발로라고 보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황가를 도운 은인들을 저버리라는 것도 충심이냐?”

"황자님과 그 자는 아주 잠깐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입니다. 황자께서는 잠시 기분전환할 거리가 필요했고, 그 자는 황자님 같은 권력자를 구슬려 에사인이 되겠다는 야욕을 채우려 들었죠. 황자께서는 그 자에게 지켜야 할 아무런 의리도 없습니다. 애초에 당신께서 위대하신 분의 소생이 아니었다면 그런 자가 꼬일 일도 없었을 겁니다.”

우르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아르세니오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윽고 그가 물었다. 로켄은 대수롭잖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쉽지만 이 몸은 내구를 다한 것 같군요. 날이 저물면 새로운 그릇을 찾으러 가봐야겠습니다. 어차피 아이들이란 계속 태어나기 마련이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나는 네 흉측한 취미가 궁금한 게 아니다. 아르세니오가 어찌 되냐고 물었다.”

"글쎄요? 오래는 못 살 겁니다. 분에 넘치는 마력이 주입되었기 때문에. 제겐 행운이었지만 제 그릇에겐 날벼락이었겠죠."

나는 로켄의 얼굴께에 비치는 빨간 색이 전부 피라는 걸 뒤늦게야 눈치 챘다. 아르세니오는 선 채로 죽어가는 중이었다.

“혓바닥 함부로 놀리지 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내라, 당장!”

우르가 격한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그는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이나, 아르세니오가 곁에 있을 때만큼은 사람 냄새를 풍겼다. 그는 아르세니오를 단순한 신하라고 생각지 않았다.

"모르시는군요. 제게도 황자님께 지켜야 할 아무런 의리가 없습니다.”

로켄이 다시금 히죽 웃었다. 나는 이쯤에서 술법을 끊고 나오기로 했다.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 순간, 뜻하지 않던 제 삼의 인물이 나타났다. 기실 아까부터 구석에서 보이던 사람이었지만, 겹눈 특성상 인물의 이목구비를 정확히 구분하기는 힘들었다.

"당신이 로켄이로군요.”

소미였다.

그녀의 흰 단발머리가 춤추듯 너울거렸다. 그녀는 온 몸의 마력을 한껏 끌어올린 채였다. 그녀의 손에는 흡사 일본도를 닮은 장검이 들려있었는데, 나로서는 처음 보는 무기였다.

"그렇게 사람들을 속여 왔던 건가요. 이 세계를 떠받드는 기둥이라는 분이!”

소미가 매섭게 로켄을 질책했다. 게다가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와이셔츠를 입은 사내가 일본도를 어깨에 걸친 채 반듯한 걸음걸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료헤이?

사내는 주변을 매섭게 훑더니, 얌전히 누운 내게 다가가 발을 가지런히 정돈했다.

...료헤이가 틀림없었다.

"이거 원, 에사인을 좆는 불나방이 끊이질 않는군요.”

로켄이 고개를 절레 저으며 섬뜩하게 웃었다.

“이번 것은 제법 가까워졌지만 말입니다.”

나는 즉시 정신계 술법을 해제했다. 해제하자마자 허공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로이, 당장 나를 돌려보내!”

"약속 잊지 마라.”

허공에서 로이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누군가가 난데없이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윽고 몸이 어디론가 쑤욱 뽑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빨래감이 된 것처럼 끝없이 회전을 반복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현실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마력의 폭풍이 사납게 휘몰아쳤다.

료헤이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그의 와이셔츠는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온 몸엔 생채기가 가득했고, 한쪽 어깨는 탈구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눈빛이 어찌나 또렷하던지 레이저가 쏘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감히...!”

평정심을 잃은 건 로켄 쪽이었다.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이 내 공격을 막아내?”

균형의 힘.

어떤 힘이건 균형 앞에서는 평등해진다. 그게 황제가 되었건, 지나가는 개미가 되었건 말이지.

"네 상대가 아니다, 물러서라.”

황자가 료헤이를 만류했다. 그러나 황자의 상태도 결코 좋지 않았다. 황자는 굳이 로켄이 개입하지 않아도 죽어가는 중이었다.

"무슨 섭섭한 말씀을.”

료헤이가 입술을 말아올려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드디어 신의 아들을 위해 싸워보게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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