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잠들지 않는 자 (10) >
울토르는 내게 힘을 전이한 뒤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대검 끝은 허망히 허공만 찌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 당신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가장 위대했던 전사를 위해 잠시 추념의 시간을 가졌다.
여전히 실감이 나진 않았다.
무적의 울토르가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러나 가슴 속을 노도처럼 흐르는 마력이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울토르는 하나의 중국과 싸우며 영혼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가 내게 물려준 건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의 중국에게 흡수되지 않은, 그의 영혼의 코어이자 굴강한 자아의 일부였다. 그 일부만으로도 나는 에사인이라 부르기 부끄러움이 없을 만큼 강해졌다.
나는 몸을 돌려 아길리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그 사이 상태가 제법 호전되어 있었다. 반면 그녀를 수호하던 기운은 바람 앞의 등불 처럼 희미해지고 말았다.
- .......
기운으로부터 희미한 울림이 들려왔다. 그것은 내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울림이 너무나도 미약하여 메시지를 알아들을 순 없었다.
기운은 잠시 후 부르르 떨며 한 차례 밝게 빛나더니, 마치 지류가 바다로 돌아가듯 아길리의 정신체와 하나가 되었다.
투둑.... 투두둑.......
나는 아길리를 안아든 채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정신세계의 와해는 지금 이 순간도 빠른 속도로 진행중이었다.
산맥에 버금갈만한 거대한 어둠의 덩어리가 굉음을 내며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어둠 덩어리는 바닥에 깊고 넓은 균열을 남기며 캄캄한 암혹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심연 아래의 심연.
균열 아래에 도사린 암혹을 가리킬 마땅한 용어가 존재치 않았다. 그저 무(無)라 부르는 게 가장 합당할 것 같았다. 저곳에 삼켜졌다간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것쯤은 술법에 조예가 없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으음...”
드디어 아길리가 의식을 되찾았다. 그녀는 내 품에서 눈을 뜨더니, 고양이처럼 몸을 비틀어 바닥에 착지했다.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라힐님이십니까?”
"예, 보시다시피.”
나는 그녀의 경계심을 풀어주기 위해 어깨를 으쓱였다.
"모습이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 했습니다.”
"제가 말인가요?”
“이목구비도 조금 바뀌신 것 같고, 머리카락 색깔도 제가 알던 그 색이 아닙니다.”
나는 무심코 얼굴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녀의 말마따나 손에 닿는 느낌이 미묘하기 다르긴 했다.
정신체를 더듬어 얻을 수 있는 느낌이라는 게 얼마나 정확하겠냐만.
다음으로 앞머리를 한 움큼 잡아 눈앞으로 내려 보았다. 새치도 없던 흑발이 칙칙한 잿빛으로 바뀌어있었다.
"이런.”
나는 걸어 다니는 메뚜기를 봤을 때보다 더 놀라고 말았다. 평생 염색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몸이다. 웬 타다 만 보풀 같은 게 두피에 붙어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나.
"그리고 무척 눈이 부십니다.”
그건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나는 밤하늘에 뜬 달처럼 환히 빛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마력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받아들인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 같다.
마력을 너무 많이 써서 발생하는 한계돌파 현상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마력을 지나치게 많이 흡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가는 알려진 바도, 정의를 내릴 용어도 들어본 바가 없었다.
"게다가 예전보다 훨씬 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혹시 하나의 중국의 힘을 흡수하신 걸까요? 아니면...”
그녀는 문득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올랐는지 미간을 좁혔다.
“아르세니오를 물리치신 겁니까?”
"실은 그게 아르세니오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사정을 듣고도 그리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역시 그랬군요. 근래 선택받은 용사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영웅이란 실은 로켄이 악행을 벌이기 위해 뒤집어쓰는 가면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나라가 뒤집어지겠습니다.”
"이미 뒤집어진 나라지만, 한층 더 난리가 나겠지요.”
"돌이켜보면 일곱 권능 중 몇 명이나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도 의문이 듭니다. 부끄럽습니다만, 황국은 다르마알이 쳐들어오지 않았어도 무너질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에 제 역할을 다하는 에사인은 많아야 둘 정도였다.
무적의 울토르,
운명의 에사인 아바르.
그 둘 말고는 믿고 의지할만한 자가 없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일곱 권능에 대한 의견을 정리하다가, 불현듯 머릿속에서 잊었던 기억을 떠올려냈다.
- 아바르께서 서쪽에서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곳으로 나아간다면 잠들지 않는 자를 조심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운명을 관장하는 에사인의 예언.
나는 무던히도 그녀의 예언을 해석하려고 애썼다. 지금껏 내가 이해한 것이라고는 서쪽에서 기다리는 도전이 하나의 중국을 가리킨다는 것만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문장이 문득 명료하게 들여다보였다.
"...잠들지 않는 자.”
나는 탄식처럼 예언의 일부를 입으로 내뱉었다.
“예?”
"잠들지 않는 자란 로켄이었어...!”
나는 그녀가 날 이상하게 바라보는 걸 아랑곳 않으며,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잠들지 않는 자란 꿈의 에사인을 가리킨다는 걸.
예언이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사태가 닥치기 전에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일이 지나가고 나면 모든 게 우스우리만치 분명해진다.
아바르는 꿈의 에사인이 내 뒤통수를 치리라는 걸 예견했다. 내가 그녀의 예언을 알아들을 만큼 영민하지 않다는 건 예언하지 못했던 것 같으나.
로켄.
심연으로 추락하던 나를 바퀴벌레 보듯 깔아보던 시선이 떠오른다. 놈은 암살자 노릇을 그만둔 나를 다시 살행에 나서게 한 최초의 인물이 될 것이다. 당사자도 이게 영광인 줄 알아야 할 텐데 말이지.
쩌저저적......
먼발치의 땅덩이가 굉음을 내며 한꺼번에 침몰했다. 넓이가 족히 수십 평방킬로미터는 될 것만 같았다.
“머지 않았군요.”
나는 남은 땅의 면적으로 남겨진 시간을 유추해보았다.
"사십분...길면 오십분일 겁니다.”
"여길 빠져나가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몇 가지 방법이 떠오르긴 합니다만, 키는 우릴 보낸 사람이 쥐고 있을 겁니다.”
"이황자님 말씀이시로군요.”
"그렇습니다.”
이황자 우르는 정신세계의 좌표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나는 그가 숨이 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는 것과, 홉로 수십 명의 전투형 개체에 둘러싸여있었다는 사실은 굳이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로켄이 황자님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로켄은 라힐님과 제가 살아남는 걸 원치 않을 텐데요.”
"예, 현실적으로 황자의 도움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저는 라힐님께 걸어보겠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말씀해주십시오.”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멸망해가는 세계의 끄트머리에 서서, 나를 믿어주는 미녀와 함께 종말을 맞이한다는 건 꽤나 운치 있는 일이었다.
"우선 제 힘을 시험해보려고 합니다.”
울토르는 결국 하나의 중국의 정신세계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었다. 그에게 어려웠던 일은 그의 마력을 물려받은 내게도 어려운 일이겠지.
그러나 내 모든 것이 울토르에게서 기인하진 않았다. 나도 나름대로 에사인으로 향하는 길을 개척하던 놈이다.
나는 손에 쥔 대검에 마력을 잔뜩 집중시켜보았다. 정신세계라고 해서 마법이나 술법이 통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심연의 외벽에 아주, 아주 강력한 타격을 입힌다면 외부로 향하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스으으으......
무덤처럼 음산한 냉기가 검날을 타고 차분하게 흘렀다. 산을 허물어 버릴만한 마력을 투입했는데도 검날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김송화 장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껏 쓰던 검은 이 검에 비하자면 나무작대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검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찬란한 광채가 검첨에서 뿜어져 나와 심연의 어둠을 몰아내었다.
임팩트의 순간을 예감한 듯이 바닥이 부르르 떨렸다. 아길리는 혹시 모를 후폭풍을 대비해 다급히 거리를 벌렸다.
"잘못 짚었다.”
막 검을 휘두르려던 참이었다. 뒤통수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뒤쪽을 쳐다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스무 발짝 안쪽까지 다가와 있었다.
“...로이?”
사내의 텅 빈 왼쪽 소맷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는 환상 속에서 나를 옭아매려던 형제, 로이였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이번엔 정말 네가 맞는 거냐?”
"반쯤은.”
로이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몸은 유리마냥 투명해서 뒤편 배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형제들 중 누가 죽어서 하나의 중국에게 기억을 제공했을까 싶었는데, 너였구나.”
"나 말고도 몇 명 더 있다. 붕괴하는 세계를 따라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다시 만나긴 힘들겠지만.”
“잘못 짚었다는 건 무슨 말이냐?”
“그 말 그대로다. 이 세계에 상처를 입히는 행위는 세계의 붕괴를 가속화할 뿐이다. 너는 네 명줄을 스스로 재촉하려던 셈이지.”
“...그러냐.”
정신세계의 메카니즘에 대해 술술 읊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위화감이 들었다. 생전의 로이는 그저 머리가 남보다 더 잘 돌아가는 암살자였을 뿐이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말했다시피 나는 반쪽만 네가 기억하는 사람이니.”
"그럼 나머지 반은 뭐냐?”
"이 세계의 주인이지.”
로이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부연했다.
"나는 하나의 중국의 일부이자, 로이라는 인간으로부터 발생한 파편이다. 나는 내 기억을 토대로 네게 협조를 구해야만 자아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라힐님,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길리가 도끼를 로이에게 겨누며 사납게 외쳤다.
"너희는 더 이상 우리를 경계할 필요가 없다.”
"어째서?”
“우리는 개별개체의 영혼을 병합하는 행위가 불러일으킬 반발을 간과했다. 이 세상이 너희 같이 강하고 독립적인 생명들로 가득 채워진 이상, 우리는 결코 실현가능하지 않은 이상향을 꿈꾸는 셈이다.”
"다른 파편들도 네 생각에 동의하나?”
"알다시피 나는 언제나 너와 우티르를 대신해 ‘생각하는 역할’을 도맡아왔다. 나는 다른 파편의 의견보다 내 판단을 더 신뢰한다.”
기묘한 대화였다. 그는 ‘나’라고 말할 때는 로이를 대변했고, ‘우리’라고 말할 때는 하나의 중국을 대변했다.
"도끼를 내리시죠.”
나는 아길리를 말렸다.
"얘기 정도는 들어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가 하나의 중국의 일부라면, 정신세계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존재임엔 틀림없다.
“.....알겠습니다.”
아길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기를 거두었다.
"그래서 어떻게 협조해줄 수 있다는 말이냐?”
"이곳에서 나가는 길을 안내하겠다. 너희는 그 대가로 곧 소멸할 내 존재를 보존해주면 된다.”
"군체의식의 씨앗이 될지도 모르는 놈을 보존하라고?”
"내 반이 네 형제라는 걸 잊었군. 나는 처음부터 그 정신 나간 사회실험에 동조하지 않았다. 인간의 욕망을 무시한 어리석은 이념이라고 여겼지. 결국 네게 반토막이 나면서 내 생각이 옳다는 게 증명되었다.”
그가 본체와의 접점이 모두 끊어진 건 확실했다. 그 증거로 진실의 추가 정상작동하고 있었다.
덧붙여서, 지금까지 그가 한 모든 말은 진실이었다.
"네게 줄 수 있는 게 한 가지 더 있다.”
로이가 감정 없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검지를 들어올렸다.
“우리의 힘의 근원과, 이 세계의 비밀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