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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98화 (98/205)

98화. < 잠들지 않는 자 (9) >

내 정신체는 바닥을 향해 끝없이 가라앉았다. 나는 아길리를 품에 안은 채 머리 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두 번째 죽음.

중국군을 상대로 검을 들었을 때부터 각오했던 결말이었다. 아니, 서울 자취방을 떠나며 구두끈을 묶었을 때부터 각오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새삼스레 슬프거나 무섭거나 하진 않았다.

대신 나는 분노했다.

심판자 그니르.

꿈의 지배자 로켄.

덧붙여서 황제까지.

세상을 떠받드는 기둥, 무시무시한 절대자, 막연히 그렇게만 여겨왔던 존재들인데, 껍질을 벗겨보니 하나같이 추악하기 그지없다.

돌이켜보면 소미의 판단이 정확했다. 소미는 이 세계가 닫혀있다고 일찌감치 진단했었다.

에사인은 도전자의 성장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나 같은 놈들을 꾸준히 제거하며 자신들의 룰을 관철시켜왔다. 마치 중소기업의 기술만 빼먹고 버리는 대기업처럼.

- 한때 나도 너와 같은 여정을 걷고 있었다.

기엔 수성전 때, 성벽 밖에서 만났던 부패의 전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만한 실력을 가진 강자가 왜 늪에서 썩어 가는지, 그에게 왕관을 씌운 왕국이 왜 어떤 문헌에도 기록을 남기지 못했는지.

- 너도 우리들 중 하나가 되면 자연히 깨닫게 될 것이니.

그는 내게 경고했던 것이다. ‘여정을 걷는 자’의 최후가 자신과 같으리라는 것을.

시부랄, 좀 더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주면 어디 덧나냐.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침잠이 드디어 끝났다. 우리는 정신체가 스스로 발하는 빛 말고는 아무런 광원도 존재치 않는 곳에 도달했다.

이곳을 뭐라고 불러야할까?

심연의 끝자락,

이성의 종착지.

그럴듯한 이름이 있겠지만, 나는 그냥 좇같은 곳이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나는 아길리를 들고 두 다리로 섰다.

전후좌우 그저 막막한 어둠뿐이었다. 여기서는 공간과 시간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공허 속에서 이 세계의 주인이 완전히 소멸하기만을 기다리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문득 아길리가 아직도 내 품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그녀는 에사인의 진신이 쏘아낸 일격을 맞고도 끈질기게 존재를 지켰다. 마치 그녀가 살아생전 보여줬던 투지처럼.

다가트가 하사했다는 방어구의 힘일까?

나는 그녀를 좀 더 관찰하다가, 그녀의 주변을 희끄무레한 기운이 감싸고 도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의 중국이 피 대신 토해냈던, 연기와 흡사한 기운이었다.

나는 정체불명의 기운을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명백히 그녀에게 힘을 불어넣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조금씩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기운을 향해 손끝을 뻗어보았다. 기운과 손가락이 겹쳐지며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절규하던 영혼들이 차디찬 냉기를 흩뿌리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설마 영혼은 온도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는 건가.

불현듯 그런 가설이 떠올랐다.

그러자 온기가 한층 더 강해졌다. 마치 내 의문에 긍정하기라도 하듯.

기운이 밝고 하얀 빛을 뿜어내며, 머리 위를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러더니 어둠 속 어딘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길리를 안은 채 기운을 뒤따라갔다.

어차피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더 나빠질 게 없는 상황이었다.

기운은 별똥별처럼 꼬리를 남기며, 내 발걸음과 보조를 맞추었다. 따라오라는 신호가 확실했다.

나는 기운이 뿜어내는 빛을 등대삼아 걷고 또 걸었다. 이정표로 삼을만한 게 없다보니 얼마나 걸었는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어라?”

얼빠진 소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어느 순간이었다. 마치 이 모든 공허가 거짓말인 것처럼, 머지않은 곳에서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운이 다시금 내 머리 위를 빙글 돌았다.

저 앞이 내가 가야할 곳임에는 분명했다. 심연의 밑바닥을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미지의 두려움을 떨쳐냈다.

사람 모양의 실루엣이 점차 또렷해졌다. 키가 이 미터가 넘어 봬는 거인이었다. 말뚝 같은 팔다리엔 굵은 사슬이 칭칭 감겨있었다.

“..울토르."

그가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불패무적의 전사.

그는 내가 기억하던 마지막 모습에 비해서는 초췌하기 그지없었으나, 넘쳐나는 힘은 여전했다. 한시도 그의 몸을 떠나지 않던 대검은 근처에 내팽개쳐진 채 나뒹굴었다.

네 번째 권능의 행방은 하나의 중국의 심층부였다. 그는 아길리보다 훨씬 깊고 큰 상처를 입은 채였다. 정신체인데도 손상부가 너무나 참담해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윽고 그의 눈꺼풀이 점차 위로 들렸다. 형형한 정광이 눈앞의 어둠을 몰아내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작게 미소를 지었다.

"노력이 헛되지 않았군.”

너무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당신이었습니까?"

나는 고작 이렇게밖에 묻지 못했다. 하나의 중국이 내게 술법을 쓰는 걸 막은 게 당신이었냐고.

"그렇다. 내 평생 황제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기도해보기는 처음이었지.”

"당신 같은 분이 어쩌다가...”

"적을 얕본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울토르가 피식 웃었다.

하나의 중국과 울토르의 상성이 나쁘다는 건 인지했었다. 울토르는 전략전술을 도외시한 채 본인의 힘으로 적 수뇌의 목만을 노리는 타입이었다.

단순무식하기 그지없으나, 대부분의 조직은 머리를 따이면 자연히 와해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에겐 머리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둘의 능력은 천적관계였다.

"열흘 밤낮 쉬지 않고 싸웠다. 몇 만을 장사지냈지만, 뒤늦게야 그것들이 모두 허수라는 걸 깨달았다. 그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지.”

하나의 중국은 군체가 몇만, 몇십만이 갈려나가건 울토르를 지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성공인 승부였다.

제아무리 무적의 전사일지라도 정신력이 무한대인 건 아니니까.

"미안하다.”

그가 밑도 끝도 없이 내게 사과했다.

"당신이 제게 미안할 게 뭐가 있습니까.”

“로켄이 네게 한 짓을 알고 있다.”

“다 보셨군요.”

"그들이 이 세계에 무슨 짓을 저질러왔는지도 알고 있지. 나는 그들의 더러운 행위가 황제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는 걸 안 이후로 눈을 감아버렸다. 황궁을 떠나 전사단을 이끌고 대륙 곳곳을 떠돌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외면하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울토르의 얼굴에 짙은 수심이 드리웠다.

"나를 비웃어도 좋다.”

"비웃지 않습니다. 당신은 역사가 기록하는 시대 이전부터 가장 위대한 전사였습니다.”

"내 시대는 이미 끝났다. 이미 끝난 시대를 억지로 붙들고 있었던 게 우리의 원죄다.”

울토르가 팔을 흔들었다. 사지를 옭아매는 사슬이 거칠게 덜그럭거렸다.

"...제가 도울 일이 없겠습니까?”

"딱 한 가지 있겠군.”

나는 그가 사슬을 끊어달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서슴없이 말했다.

"나를 죽여라.”

"예?”

"널 어떻게 도울 수 있었냐고? 내가 그 괴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네가 베어버린 그 빌어먹을 놈의 일부가 되었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하지만 당신을 죽이면 제가 당신의 힘을 가져가게 됩니다.”

"정확히 내 의도와 일치하는군.”

"황국이 납득하겠습니까?”

“여태껏 황국이 납득해서 좋은 일이 있었나?”

“...반박이 어렵군요.”

"그나저나 정말 멋진 참격이더군. 내 후계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의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오래도록 이 세계에서 무적이란 관념을 대표해왔다. 그의 후계가 된다는 건 내가 그를 뒤따라 무적자가 된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제부터 그 어떤 싸움에서도 질 수 없었다. 패배란 그의 유산을 더럽히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싫은가?”

"아닙니다. 당신 같은 전사의 뒤를 이을 수 있다면 과분한 영광이지요. 하지만...”

나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나는 각오를 다진 후 이어서 말했다.

"저는 로켄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니르도, 어쩌면 황제까지도, 당신께 물려받은 힘으로 죽여 버릴지도 모릅니다.”

“필요하다면 전부 죽여라. 어차피 이젠 내 소관도 아니니.”

울토르가 호쾌하게 대답했다. 그의 의지를 따라 대검이 저절로 떠올라 내게 다가왔다. 나는 두 손을 뻗어 대검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형언하기조차 두려운 일체감.

마치 잃어버린 영혼의 일부를 찾은 것만 같았다.

울토르의 대검은 카둔이 명장으로서 이름을 날리기도 전에 벼려진 전설의 무기였다. 본디부터 남다르기도 했으나, 셀 수조차 없는 적을 베어 넘기며 검 스스로 귀기를 띠게 되었다고 전해졌다.

"네겐 좀 큰가? 일전의 너는 장검을 썼던 것 같은데.”

"바꿨습니다, 대검으로.”

"탁월한 선택이다.”

그가 흡족하게 웃었다.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하겠다. 북풍의 전사단을 거두어다오. 그놈들은 나보다 더한 바보들이다. 검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지. 내 무기를 보인다면 군말 없이 충성할 것이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겠습니까?”

"없다.”

울토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보였다.

"아니면 그 괴물이 날 제물로 삼아 다시 재기하는 걸 보고 싶은 거냐.”

“그래서는 안 되겠죠.”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더, 로켄을 보낼 때 내 안부를 전해다오."

"그리고요?"

"가서 이 지루한 시대를 끝내버려라. 이상이다.”

그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의 가슴을 향해 그의 대검을 겨누었다.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도의 마력을 이끌어냈다.

에사인의 진신을 벤다.

정신세계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심대했다. 나는 내 손으로 세계의 질서 하나를 무너뜨리려 하는 중이었다.

그를 휘감은 사슬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구속하는 자가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울토르가 눈을 감았다.

나는 그것을 신호로 삼았다. 암살자 시절을 통틀어 가장 완벽한 찌르기가 구사되었다.

푸욱.

귀기서린 검날이 옛 주인의 가슴팍으로 깊게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둑이 허물어지듯 뛰쳐나왔다. 나는 검에서 손을 떼지 않기 위해 온 의지력을 총동원해야만 했다.

"큭......."

전신이 불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있지도 않은 피부가, 근육이, 고무처럼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혼절할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나는 몇 차례고 존재의 진화를 체험했다.

이윽고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던 마력의 파도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떠보았다.

나는 여전히 공허 속에 잠겨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느낄 수 없었던 것이 느껴졌다.

이 세계를 이루는 얼개가 거짓말처럼 낱낱이 들여다보였다. 내 정신체를 휘감고 도는 가공할 힘이 그 얼개를 산산히 깨부술 수 있다는 것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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