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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97화 (97/205)

97화. < 잠들지 않는 자 (8) >

컨디션이 더없이 좋았다. 육신의 상처를 모조리 현계에 두고 온 덕인지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하나의 중국이란 놈이 아니꼬운 것도 한몫했다. 놈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에너지가 머리 끝으로 쏠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쩌어억....

놈의 얼굴에 난 홈이 좁아지는가 싶더니, 아길리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중년 여성의 얼굴을 집어삼켰다. 대신 구멍 안에서 나타난 건 날카롭고 촘촘한 이빨이었다.

- ........

놈이 순수한 살의를 모아 내게 쏘아 보냈다. 동시에 아르세니오가 팽팽히 당긴 시위를 놓았다. 나와 아길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를 박차며 튀어나갔다.

투두둑...

발이 닿는 곳마다 땅이 쩍쩍 벌어졌다. 갈라진 틈에서 무수한 손이 튀어 올라 다리에 들러붙었다. 차디찬 손길이 닿을 때마다 마음이 조각칼로 한 꺼풀씩 해체되는 것만 같았다.

벤다.

나는 이를 악물고 놈의 코앞까지 육박했다. 내겐 현계에서 휘둘렀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대검이 들려있었다. 대검의 크기가 곧 내 의지를 반영했다.

나는 초대형 대검으로 놈의 옆구리를 힘차게 후려쳤다. 놈의 옆구리가 꺾일 것처럼 움푹 들어갔다.

이어서 제2타, 3타가 잇달아 작렬했다. 아르세니오의 화살이 놈의 홈 안에 틀어박혔고, 아길리의 대형도끼가 정수리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쾅, 쾅.

나는 방아를 찧듯 놈의 옆구리를 몇 번이고 두들겼다. 검을 거듭 휘두를 때마다 새로운 힘이 샘물처럼 샘솟았다.

데미지가 들어가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놈을 후려칠 때마다 세계가 조금씩 붕괴하고 있었으니까.

발밑에서 영혼들의 절규가 들려왔다.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무수한 목소리가 냉기와 함께 귀곡성처럼 메아리쳤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놈을 해체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미간,

목,

명치와 심장.

인간으로 치면 급소라 불릴 부위마다 마력과 의지력을 집중해 꽂아 넣었다.

놈은 샌드백처럼 두들겨맞다가, 얼굴에 팬 홈에서 브레스마냥 마력을 뿜어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마력이 덩어리진 것일 뿐, 술법도 뭣도 아니었다. 나와 아길리는 거리를 벌리는 것만으로도 공격을 손쉽게 떨쳐냈다.

“이상합니다.”

아길리가 숨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수천만 의지의 집합체란 존재가 이렇게까지 약할 수가 있나?

맷집은 분명 에사인 급이 맞았다

그러나 전투기술만큼은 자기 몸에서 난 부하만도 못했다. 여기가 물질계가 아니라는 걸 감안한다면, 놈에겐 근력이나 체력 등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정신 어딘가가 고장난 게 분명했다.

“자고로 물지 못하는 개가 짖는다고 하더군요.”

“예?”

아길리가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에신에는 개가 없으니.

“하나의 중국은 만들어진 에사인입니다.”

나는 브레스를 신중히 피하며 말했다. 기술은 조잡하지만 마력의 크기만큼은 대단해서, 눈 먼 공격이라도 허용한다면 존재가 남아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에사인은 추대되는 겁니다,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아...!"

아길리가 알겠다는 듯이 탄성을 질렀다.

본디 에사인이란 수많은 추종자들의 마음이 무르익을 때 자연히 따르게 되는 왕좌를 가리킨다.

때문에 에사인에게 자격을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내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그를 인정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하나의 중국은 달랐다. 놈은 다른 자의 의지를 강제로 흡수했다. 그러나 술법으로 의지를 꺾는 것도 한둘이지, 도시 하나당 인구가 적게 잡으면 십만, 많으면 백만인데, 놈이 집어삼킨 병력이며 민간인 숫자를 따진다면 그 많은 영혼을 짧은 기간에 다 소화하는 게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 네 가족, 친구, 스승, 사랑했던 남자. 너의 진실한 모습을 알고 있는 모든 인간이 내 품에 들어와 있다. 그걸 알고도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놈은 아길리에게 친지와 동료들을 죽일 셈이냐며 협박했다. 자기가 집어삼킨 영혼들을 다 소화하지 못했다고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요약하자면 욕심 부리다가 배탈이 나고 말았다는 거지.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로군요.”

“예, 시간이 흐를수록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질 테니까요.”

배탈이 잘 다스려질지, 만성질환이 될지,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실력행사를 못하고 정신조작이나 걸어온 걸 보면, 지금 시점에서 유리한 건 틀림없이 우리였다.

“아르세니오!”

화살이 쉭쉭 날아왔다. 나와 아길리는 좀 더 공세적으로 전환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난무하는 마력 사이를 헤집었다.

- ........

하나의 중국이 다시금 살의를 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하나로 집중하지도 못했다.

뻐억.

대검이 놈의 목뼈를 사선으로 내려쳤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골백번은 죽었어야 할 위력이었다.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놈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얼굴에 난 홈에서 피 대신 연기 같은 반투명한 응어리가 새어나왔다.

아길리가 양손도끼를 곧게 뻗어 놈의 가슴을 공성추마냥 들이 받았다. 패인 홈에서 짙은 연기가 각혈하듯 왈칵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질세라 놈의 정수리를 거듭해서 내려쳤다.

놈이 토해낸 연기가 자욱한 운무를 이루었다. 운무가 짙어질수록 세계의 붕괴도 가속화되었다.

반면 내 힘은 점점 불어났다.

기분탓이 아니었다.

나는 실제로 놈이 약해지는 만큼 강해지고 있었다.

정신세계에선 다른 존재의 힘을 흡수가능하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이야아아아!”

어느 순간, 나의 일격은 놈을 머리부터 밑동까지 둘로 갈라버렸다.

- .........

놈의 비명은 언어로는 형용이 불가능했다. 수천수만 개의 목소리가 겹쳐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을 이루었다.

놈은 기이한 외침과 함께 땅바닥에 쓰러지더니, 구멍 뚫린 풍선처럼 점차 쪼그라들었다.

“해치운 겁니까?”

아길리가 물었다. 두 동강난 시체를 발밑에 두고서도 그걸 물어봐야 한다면, 어지간히 확신이 안 선다는 뜻이겠지.

나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세계가 끝장났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시야가 닿는 끄트머리부터 땅이 요동치며 아래로 움푹 꺼지고 있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쪼그라들던 시체는 임계점에 다다르자 말라 비틀어진 노인의 형상을 이루었다. 하나의 중국의 기원을 다졌을 남자가 틀림없다.

백만 군대를 부리던 자의 최후가 이토록 보잘것없다니.

이제까지의 고생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처음에는 그도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겠다는 순수한 의지만으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까지 무작정 집어삼키면서, 그는 그저 영혼을 집어삼킬 뿐인 불가사리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몸집만 키우면 에사인이 될 수 있을 거라 착각한 결과였다.

“이제 하나의 중국에게 흡수된 영혼은 어떻게 될까요?”

아길리가 거듭 물었다.

내가 묻고 싶은 것도 그거였다.

놈이 흡수한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그들을 구원하는 데 성공한 걸까.

우리는 어떻게 여길 빠져나가며, 놈의 힘을 마저 흡수하려면 계속 여기 죽치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었다. 정신계 술법을 다루는 아르세니오라면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여러분은 그걸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쳤을 때였다.

쉬이익.

매서운 바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낯익게 들었던, 그래서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던 소리였다.

“커억...”

아길리가 눈을 부릅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복부를 뚫고 뾰족한 화살촉이 튀어나와 있었다. 바람소리가 날 때마다 그녀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나는 대검을 뽑아 그녀를 노린 화살 하나를 힘껏 옆으로 쳐냈다.

“아르세니오, 미친 거냐?”

활을 쏜 건 아르세니오였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의 모습과는 달랐다. 하얗기만 하던 날개가 칠흑처럼 검게 물들어있었다. 심지어 머리카락마저 검어졌고, 눈에서는 가늠키 힘든 마력이 줄기줄기 새어나왔다.

하나의 중국?

놈의 마지막 발악인가?

설마 아르세니오는 시련을 통과하지 못했던가?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으나, 모두 답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러분의 활약을 잘 지켜보았습니다.”

아르세니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로서 서부의 난동이 일단락되었군요. 폐하와 황국신민을 대신해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애늙은이 같은 말투였다. 단순히 말투만 변한 게 아니라 태도와 몸짓, 분위기 하나하나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당신은 누구지?”

“이런,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로켄이라고 합니다.”

“당신이..........로켄이라고?”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로켄.

에사인 중의 에사인, 황제를 보위하는 일곱 권능 중 세 번째.

그는 아르세니오를 영웅으로 발탁한 에사인이자, 꿈의 지배자였다. 그는 지금껏 실체가 없이 오직 꿈속을 전전하는 존재라고만 일컬어졌다.

“하지만 당신이 어째서......”

나는 짚이는 게 있어 말끝을 흐렸다.

- 아르세니오는 마족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폐하의 소명을 받은 영웅입니다. 다만 어린 나이에 너무 큰 힘을 각성한 탓인지 가끔 이성을 잃고 날뛸 때가 있다고 합니다.

- 폐하의 부름을 받은 영웅이 왜 정신이 불안정해진 거죠?

한 소년을 둘러싸고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의문이 있었다.

광기의 아르세니오.

더없이 천진하고 친절한 소년에게 붙은 부당한 낙인이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 아르세니오가 아니었다면?

로켄이 영웅이라 내세운 자들에게 빙의해 지상에서 자신의 뜻을 행사하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모든 퍼즐이 들어맞는다.

그는 아르세니오의 눈을 통해 상황을 관망하다가, 덩치만 크고 나약하기만 한 먹잇감이 나타나자 이를 드러낸 것이다.

“이것만은 말씀드리죠. 제가 개입해야 할 시점이 이보다는 이를 줄 알았습니다만, 당신은 종종 저의 예측을 벗어나시더군요.”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렸던 거였나?”

아르세니오가 빙긋 미소 지었다.

“아니오, 저도 그렇게까지 전능하진 않습니다. 당신이 나타난 것도, 황자가 튀어나간 것도 예상 밖이었죠. 황자가 희생을 자처한 건 더욱 예상 밖이었습니다.”

“대체 어쩔 셈이지?”

나는 아길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형체가 점점 반투명해지고 있었다. 육신이 아닌 영혼에 직접 상처를 입은 것이라 백약이 무소용이었다.

“가능하다면 당신을 죽여서 확실하게 후환을 없애두고 싶습니다. 살려두기에는 너무 성가신 인물이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허락하질 않는군요.”

로켄은 진실로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저건 아쉬운 게 아니다, 놈은 가증스럽게도 가식을 떨고 있었다. 그는 내 존재가 너무 하찮아서 대응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가장자리에서 시작된 붕괴는 이제 우리가 서있는 중심점에 미쳤다. 발판이 쩍쩍 갈라지며,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둠 속에서 하얀 손들이 나를 부르듯 팔랑거렸다.

“당신은 붕괴한 정신세계가 완전하게 소멸할 때까지 공허를 방황하게 될 겁니다. 주인을 잃은 힘은 제가 잘 받아가겠습니다. 황국은 앞으로도 번영하겠지요. 그리고...당신이 세운 조그만 나라는, 글쎄요. 구경하는 재미가 있으니 당분간은 지켜보도록 할까요.”

더 이상 발을 딛고 설 공간이 없었다. 나는 흐려지는 아길리의 몸을 안아들었다. 내겐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나는 점점 어둠 속에 삼켜지며, 허공에서 검은 날개를 펄럭이는 로켄을 노려보았다.

“당신의 여망은 제가 이루어드리겠습니다. 안심하고 잠드시길.”

로켄이 내게 오른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담아두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맹세했다.

혹여 다음 생이 허락된다면, 그가 돌아올 이유가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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