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잠들지 않는 자 (7) >
로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의 손은 나를 만지지 못하고 허공만을 허우적거렸다.
그는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었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기억은 무에서 생겨나지 않았다. 전생의 나를 잘 아는 누군가가 저들에게 흡수당한 게 분명했다.
누굴까.
나와 우티르, 로이의 관계에 대해 아는 사람.
동시에 내가 우르술라를 연모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
“라힐.”
이번에는 우르술라가 나타났다. 그녀는 이 모든 게 미혹임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보란 듯이 로이의 몸 안에서 걸어 나왔다.
"...유치한 장난은 집어치우지.”
나는 진심으로, 간만에 살의를 느끼는 중이었다. 허상에 불과한 가짜가 그녀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걷잡을 수 없으리만치 치밀었다.
“라힐,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듣거라.”
우르술라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들은 하나의 중국이라 불리우는 에사인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아직 의식은 남아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임에 자명하다.”
“뭐?”
“며칠 전 그림자요새가 습격당했다. 이 환영은 우리가 마지막 힘을 모아 네게 보내는 선물이다.”
그녀가 흡사 날씨 이야기를 하듯 덤덤한 투로 말했다. 나는 진실의 추를 쓰기 위해 주술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녀는 미세한 마력의 흐름을 감지하더니, 붉은 입술을 고혹적으로 일그러뜨렸다.
“역시 못 믿는 것일까?”
"......."
“그렇다면 마음껏 재주를 부려보려무나.”
우르술라가 두 팔을 들어올렸다. 나는 술법을 슬며시 흩어버렸다. 그녀는 어느 모로 보나 우르술라 본인이었다.
넘쳐나는 자신감, 유혹적인 미소, 싸늘한 말투까지.
로이도 그랬다.
우티르마저도.
그들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디테일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다른 사람의 기억을 빌려 나타난다고 한들, 세세한 말투나 분위기까지 흉내 내진 못할 것 같았다.
“혹시 저와 했던 약속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일곱 번째 권능이 되어 그녀를 내 그림자로 삼겠노라고 선언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나와 그녀, 그리고 우티르, 세 명뿐이었다.
“물론이다, 그때 우리는...”
“아니, 대답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눈썹이 곱게 찡그러졌다.
“뭐냐, 기껏 물어봐놓고는.”
“생각해보니 답을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정체가 무엇이건 간에 당신은 하나의 중국이 저를 흔들기 위해 마련한 술수일 테니까요.
나는 뒷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애초부터 진실의 추를 쓸 필요가 없었다. 술법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가 나약한 의지를 드러내는 행위였다.
나는 황자의 목숨을 담보로 이곳으로 넘어왔다. 삼십만 군대, 나아가 이 세계의 운명이 내 어깨에 달려있었다.
스윽.
나는 검극을 들어 그녀의 가슴을 향해 겨누었다. 자세를 갖춤과 동시에 각오까지 마쳤다. 더 이상 사적인 인연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그나저나 검이 정말이지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언제 이런 젓가락을 들고 싸웠던가 싶었다. 마력을 잔뜩 머금은 칼날이 내게 항의하듯 벌떼처럼 웅웅거렸다.
“일을 마치면 따로 추모를 해드리겠습니다.”
“......많이 성장했구나.”
우르술라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나도 더 이상 널 발목잡지 않으마.”
그녀가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것마저 시험이라면, 이 시나리오를 짠 놈은 개새끼다.
“하압!”
나는 머릿속에 가득한 미혹을 몰아내기 위해, 큰 소리로 기합성을 내질렀다. 낭창낭창한 검날이 뱀처럼 휘어지며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뻗어나갔다.
오데르의 검.
몇 번이나 시도해보았으나, 오데르와 연결된 모든 통로가 끊어진 후로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기술이었다.
그 기술이 보란 듯이, 그 어느 때보다 강대한 위력으로 구사되었다. 찰나지간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잘못 판단하고 있다면?
나는 여전히 라힐일 뿐이고, 모든 것이 그저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다면?
천분의 일 초도 되지 않을 찰나 무수한 갈등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검극이 그녀의 목에 도달한 순간엔 마음이 다 타고 말아 재밖에 남지 않았다.
퍼억.
오데르의 검이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녀의 육신이, 연모해 마지않는 이의 형체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지고 말았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슬며시 눈을 떴다.
마치 자신을 죽인 자를 눈에 담아두려는 듯이.
나는 박살나 흩어진 그녀의 상체를 넋 나간 듯이 내려다보았다. 손에서 경련이 멈추지 않았다. 피가 모조리 발 아래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미혹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한 일인데도, 그녀를 내 손으로 죽이고 말았다는 충격을 가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주변 사물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그리웠던 그림자요새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검고 거무튀튀한 지면이 사위를 가득 메웠다. 나는 백골이 그득그득한 골짜기 틈바구니에 서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곳이야말로 하나의 중국의 정신세계 안이라는 걸 깨달았다.
삭막한걸.
하나의 중국이 인테리어와 거리가 멀다는 건 잘 알겠다. 하다못해 뼈 무더기 앞에 조화 한 송이 놓아두는 센스조차 없다.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머지않은 곳에서 아주 강력한 마력의 집합체가 느껴졌다.
정신계라 그런지 모든 감각이 이전보다 훨씬 예민했다. 덧붙여서 그림자요새에선 내 감각 일부가 비활성화된 상태였음에 분명했다.
그때 나는 시험에 든 게 맞았다. 만에 하나라도 그때 우르술라를 찌르지 못하고 검을 거두어들였다면, 나는 결코 이곳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드디어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나의 중국은 볼품없이 깡마른 사내였다.
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에 앙상한 뼈대가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였다.
그에게는 살만 없는 게 아니었다. 눈도, 코도, 입도 없었다. 달걀귀신마냥 뭉툭한 얼굴 중앙에 큼직한 홈이 하나 뚫려있을 뿐이었다.
“라힐 님!”
아르세니오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르세니오는 정신계에서도 여전히 아르세니오였다. 그는 하나의 중국과 대치하면서, 흰 날개만 파닥여 반가움을 표시했다.
“오셨군요, 라힐님.”
아길리마저 나보다 먼저 와있었다. 나는 그녀가 시험을 이겨내지 못할 거라고 우려했었다. 그녀의 마음은 복수심에 사로잡혀 정신계 술법 앞에서 속수무책일 것 같았다.
그러나 아길리는 시험을 넘어섰다. 단지 미혹을 떨쳐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고야 말았다.
다가트의 문양이 새겨진 가슴갑옷이 그녀의 상체를 방호했다. 머리에 쓴 투구는 흡사 아가리를 벌린 사자를 연상시켰다. 새롭게 장착한 장비를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마력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고 돌았다. 일전의 그녀가 재능을 가진 인간의 한계에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 그녀는 초인의 영역에 당당히 한 걸음을 내딛었다.
"다가트께서 저를 축복해주셨습니다. 직접 왕림하셔서 무기와 갑옷을 하사하셨습니다.”
아길리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두 손엔 현실세계에 두고 온 것보다 훨씬 큰 양손도끼가 들려있었다.
납득이 갔다.
정신계로 쳐들어가서 에사인 골통을 쪼개버리겠다는데, 다가트가 탄복할 만도 하지.
“조심하셔야 해요. 여기서 소멸을 맞이하면 돌이킬 수 없어요.”
아르세니오가 내게 나직하게 경고했다. 정신세계에선 다른 존재의 힘을 흡수할 수 있다던 경고가 떠올랐다. 그때는 설마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나 싶었는데, 눈 뜨고 보니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 드디어 모두 모였군.
하나의 중국에게서 의념이 전달되어 왔다. 성별을 짐작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목소리가 한데 뭉친 듯한 사념파였다.
- 솔직히 너희 하등한 것들에게 한 방 먹은 심정이다. 내 술법에 이런 취약점이 있었을 줄이야. 너희를 모두 흡수한 뒤 보안상의 문제는 보완하겠다. 여지를 주지 않으려면 마법사나 주술사에게는 술법을 사용하지 말아야겠더군.
그의 얼굴에 난 구멍이 나를 기웃거렸다. 구멍 안에 자리 잡은 것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정말 불쾌하네요.”
아르세니오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 천진한 소년이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모습을 처음 봤다.
하나의 중국은 아르세니오에게도 시련을 부과했던 것 같았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아르세니오를 크게 자극했던 듯했다.
“죽여 없애버립시다. 더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아길리가 도끼로 바닥을 쿵 찍으며 말했다.
- 아, 아길리, 가련한 소녀야. 어릴 적 엄마를 잃은 네겐 세상이 높다란 벽과도 같았겠지. 차디차기만 한, 감정이 없는 벽.네겐 용기가 절실히 필요했을 거야. 그런 말 들어보지 않았나? 다가트의 문을 두드리는 자들 치고 한 번 꺾여보지 않은 자들이 없다고. 이미 용기를 지닌 자에게 다가트란 겁쟁이의 집합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야.
아길리가 침묵했다.
- 네 동료들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을 접했을 뿐이지만, 너만은 내게서 진실을 보았다. 네 가족, 친구, 스승, 사랑했던 남자. 너의 진실한 모습을 알고 있는 모든 인간이 내 품에 들어와 있다. 그걸 알고도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그의 얼굴에 난 구멍이 넓어지는가 싶더니, 구멍 안쪽에서 중년 여성의 얼굴이 나타났다. 머지않아 홈이 완전히 뒤로 밀려나며, 놈의 머리가 중년 여성의 것으로 대체되었다. 전형적인 에신 남방인의 특징을 가진 여성이었다.
- 대답하렴, 아길리.
여성이 눈가의 주름을 좁히며 미소 지었다.
아길리의 침묵이 길어졌다. 아무래도 그녀의 시련은 계속되는 듯했다. 하나의 중국의 말마따나 놈의 안에 아길리의 모든 인연이 들어 있는 게 사실이라면, 우린 차마 그녀에게 공격을 강요할 수 없었다.
“정 뭣하면 우리끼리 해치우지.”
나는 대검을 어깨 위에 걸치며 대수롭잖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잡놈에게 둘씩이나 나서는 것도 수치라고 본다. 안 그러냐, 아르세니오?”
“맞아요.”
아르세니오가 잽싸게 맞장구를 쳤다.
“...아니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아길리가 도끼를 쥐며 말했다, 마치 돌멩이를 씹듯이 이를 갈며.
“용기란 이미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필요가 없다, 맞는 말입니다. 이 정도로 물러날 것 같았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습니다."
아길리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미혹이 걷힌 금빛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 아길리, 너는…
“그만 닥쳐.”
나는 하나의 중국의 말을 끊었다.
“못 들었냐? 여기서 죽으면 돌이킬 수 없다고.”
나는 대검으로 놈을 가리키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존재의 소멸이 남 얘기일 줄 알았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