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잠들지 않는 자 (4) >
“하지만 그런 몸으로 싸우다간 죽고 말 거예요, 황자님.”
아르세니오가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슥슥 닦으며 말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아시나요? 이름을 알리는 건 몸이 다 나으신 후에 해도 늦지 않아요. 기회는 살아있기만 하면 또 찾아올 텐데요.”
아르세니오의 말이 옳았다. 황자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입가에 내비치는 검은 피는 내장이 손상되었다는 증거였다.
한계돌파 현상.
오르기가 제이드를 제압하려다 무리했을 때도 겪었던 현상이었다. 증세는 황자가 훨씬 심각했다.
“아르세니오, 네 듣기 좋은 거짓말은 언제나 내게 위안이 되었지. 하지만 이건 아버지가 직접 내린 벌이다. 나는 다시는 온전한 몸으로 돌아갈 수 없다.”
황자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체모는 모조리 불타 사라졌고, 모공이 나있던 자리를 고름과 진물이 대신했다. 딱지가 진 피부는 거북이 등껍질마냥 쩍쩍 갈라졌다. 전체적인 형상은 흡사 타다 만 목탄 같았다.
“너무 잔인해요...왜 자기 아들을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대하는 걸까요?”
소미가 내게 물었다. 나도 도무지 연유를 모르겠다. 황제도 새로운 에사인이 만들어지는 걸 싫어하나? 자기 유전자가 남달라서?
그렇다면 처음부터 자식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자식은 자식대로 낳아놓고 이게 무슨 패악인지.
물론 황자 앞에서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육신의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듣자하니 오늘 전과가 나쁘지 않았다더군. 하지만 내일은 아무런 축복 없이 싸워야한다. 그러니 나 우르 게네발이 전사들을 이끌겠다. 전사들에게 황가의 가호가 함께한다는 걸 보여줘야...”
우르가 고개를 급하게 숙이며 밭은기침을 했다. 기침을 할 때마다 검은 피가 입과 코로 역류했다. 전투는 고사하고 오늘 밤을 넘길지도 의문이었다.
“아르세니오 말이 맞아. 이런 상태로는 싸울 수 없어.”
“공연히 힘 빼지 마라.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우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것 같았다. 온 몸이 숯처럼 바스러지고서도 눈만큼은 독수리마냥 부리부리했다.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은 말려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 죽지 마라. 난 로켄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다고.”
나는 그에게 엄포를 놓았다. 살아서 약속을 지키라는 의미로.
“물론이다. 나는 언제나 악독하게 살아남는 역이었다.”
그가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당장에라도 사그라들 듯이 희미한 웃음이었다.
둘째 날, 나는 중군으로 배속을 바꿨다. 나 대신 정기호가 우익으로 빠지고, 정기호의 보좌를 소미가 맡았다.
내가 중군으로 온 이유는 황자를 가까이서 경호하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아르세니오도 중군에 남았다.
황자는 다시 가면을 쓰고, 화상을 알아볼 수 없도록 갑옷과 의상으로 전신을 빈틈없이 가렸다.
그러나 나는 그의 타다 만 살갗이 썩어가는 악취를 여실히 맡을 수가 있었다. 그는 그 상태로 전군의 지휘에 나섰다. 수십만 군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손수 자신의 머리 위에 몸달래풀의 기름을 부었다.
우르의 이름이 온 천지에 진동했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턱을 높이 쳐든 채 전사들의 환호를 만끽했다.
“당신이 옳았어.”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인생 최고의 순간이로군.”
부우우우......
나팔수가 나팔을 불었다. 우르가 큰 소리를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를 대신하여 진격명령을 내렸다.
삼십만에 달하는 대군이 들판을 집어삼키며 진격했다. 적들은 아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 맹렬히 포화를 퍼부었다.
나는 황자가 탄 마차를 몰아 아군 선봉을 뒤따랐다. 황자는 이따금 전선의 빈 곳을 향해 마법을 쏘았다. 대단찮은 위력은 아니었으나, 전사들은 황자가 존재감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용기백배했다.
“궁성에서 지낸 세월이 아깝다고 느껴지긴 처음이다.”
“그렇지?”
“물론 저들이 내게 거는 기대치가 높은 건 아버지의 그림자 때문이겠다만.”
“네 출발점이 남보다 유리한 건 사실이지. 그러나 거기서 뭘 더 보여주느냐는 네 몫이라고..”
나는 그를 다그치듯 말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피를 타고난 자도 한갓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아버지의 사랑에 목마르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갈구하는, 그저 평범한 인간.
전사들은 확실히 기세를 탔다. 그러나 전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축복의 부재가 느껴졌다.
황자가 마법을 사용하는 빈도가 점점 늘어만 갔다. 가끔은 전선을 뚫고 달려와 내가 칼을 쓰게끔 만드는 놈도 있었다.
“아르세니오.”
아르세니오가 날개를 파닥이며 마차 곁으로 날아왔다.
“상황을 말해다오.”
“왼쪽, 오른쪽은 우리가 유리해요. 하지만 가운데가 많이 힘들어요.”
“내가 유능한 장수를 둘이나 묶어두고 있으니 그렇겠지.”
“아니에요, 황자님. 적도 이쪽으로 총력전을 펼치고 있어요. 라힐님이 말씀하신 장군급 개체들이 굉장히 많이 보이네요.”
“몇이나?”
“스물? 서른일까요?”
어제 나를 고전시켰던 장수 두 놈. 그런 놈이 서른 명이나 있다면 감당이 될 리가 없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어제 중국이 보인 전력은 그들의 최고전력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흩뿌린 시체는 우리의 전력을 가늠하기 위한 가늠자였겠지.
“저들이 노리는 건 나다.”
우르가 말했다. 내가 즉시 반박했다.
“자의식 과잉이야. 너 아직 그렇게까지 유명해지진 않았어.”
“저들이 뛰어난 개체를 흡수해 종의 개량을 노린다지 않았나. 그렇다면 황제의 피를 타고난 나만큼이나 저들을 강화할 수 있을 소재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날 내치신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군.”
"......."
나는 우르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슬슬 준비를 해두는 게 좋겠다.”
우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집중상태에 돌입했다. 긴 정신집중이 필요한 마법을 시전하려는 것 같았다.
머지않아 전방의 전선이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치 어제 내가 전선을 갈아버렸듯이, 수십 명에 달하는 중국군 장수들이 아군 전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선봉군을 이끌던 영주 몇 명은 어설프게 저항하려다가 순식간에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아르세니오, 우리도 준비해야겠다.”
“네, 라힐님.”
아르세니오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는 들고 있는 활로 장거리 저격에 나섰다. 외형은 장난감 같았으나, 위력은 전혀 장난이 아니었다. 그가 시위를 당길 때마다 누구 한 명은 반드시 죽거나 다쳤다.
이윽고 황제를 보위하는 최종 수비대인 큰망치 전사단이 행동에 나섰다. 그만큼 적의 정예가 가까워져있었다. 아길리는 급박한 순간에 쌍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나를 찾아왔다.
“오늘 전투에서 살아남거든 저를 라힐님의 친위대로 부려주십시오.”
그녀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어차피 돌아갈 곳이 없었다. 다스려야 할 영지가 중국군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미 큰망치 전사단은 적과 교전중이었다. 전사단원들은 다가트의 추종자들답게 방어를 도외시한 채 사생결단을 벌였다. 그러나 적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한 명 한 명이 정기호 이상이었다. 울토르의 군대를 잡아먹었던, '하나의 중국'의 최종병기가 저들임에 분명했다.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게 느껴졌다. 황자는 아직도 주문을 준비중이었다.
“아르세니오, 황자를 부탁한다.”
“네?”
나는 대검을 곧추세워 전사단의 지원에 나섰다.
처음 맞닥뜨린 적장은 외골격을 가진 벌레였다. 이쪽은 메뚜기가 아니라 사마귀라고 불러줘야 할 것 같았다. 놈은 내 전력을 실은 검격을 낫 같이 휘어진 흉악한 앞다리로만 막아냈다.
놈을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해야만 했다. 그래야 아길리를 비롯한 큰망치 전사단을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마음이 초조해지자 공격의 정교함이 떨어졌다. 수십 년간 갈고 닦은 평정심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놈을 빨리 처리하지 못하자, 나는 머지않아 십여 명의 장수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예상대로 큰망치 전사단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죽어!”
중국군 장수 세 놈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단 한 가닥의 검로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뒤통수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들려왔다.
“라힐님, 엎드리세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나는 땅바닥에 개미처럼 납작 엎드렸다. 아르세니오가 쏘아낸 화살이 무시무시한 폭음과 함께 날아와 적의 한가운데에 작렬했다. 엄청난 폭발과 함께 모래먼지가 바닥에서 용천수처럼 솟구쳤다. 장수들은 모래먼지에 휩싸여 일순간 타겟을 잃어버렸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검을 힘껏 휘둘러 사마귀의 몸통을 베어버렸다. 사마귀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싯누런 체액을 쏟으며, 두 쪽이 난 몸뚱이를 버르적거렸다.
쉬이익, 쉬이익.
아르세니오의 화살이 잇따라 날아들었다. 화살깃이 바람을 쉭쉭 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신궁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아르세니오는 화살 하나로 공격과 지원을 동시에 해내는 중이었다.
나는 그의 지원을 받으며 십여 명의 넘는 장군들과 맞불을 놓았다. 두 생애를 통틀어 내가 벌인 가장 무모한 전투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하아아!"
나는 기합을 끌어올리며 진력을 다해 대검을 휘둘렀다. 암살자였다면 진즉 내뺐어야 마땅했겠으나, 지금의 내겐 지켜내야 할 이름이 있었다.
갖은 종류의 무기가 내 골통을 쪼개버리기 위해 쉬지 않고 들이쳤다. 적의 무기를 서너 번 막을 때마다 몸에 상처가 하나씩 덧씌워졌다. 초당 검격이 수십 번씩 오가고 있으니, 나는 문자 그대로 난도질을 당하는 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등판이 익어버릴 것만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게 새롭게 난 상처 때문일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열기는 진정되기는커녕 더욱 커져만 갔다.
게다가 적장들도 열기에 영향을 받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나를 몰아붙이던 걸 멈추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나는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가쁘게 골랐다. 땀이 눈에 스미고 있어 시야가 온전치 않았다. 눈을 닦을 틈조차 허용되지 않는 접전이었다. 나는 방어자세를 취한 채, 그들이 쳐다보는 방향으로 흘긋 눈길을 주었다.
마차 위 허공에 어마어마한 게 떠있었다. 자체발광하는 거대한 빛의 구였다. 흡사 태양이 둘이 된 것만 같았다. 극도로 순수하며 터무니없이 강력한, 거대한 마력의 집합체였다.
"막아라!"
장수 한 놈이 동료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그는 잠시 후 다급하게 자기가 한 말을 정정했다.
“...아니, 피해라!”
“늦었어, 새끼야.”
나는 비틀거리며 선 채, 그에게 가만히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주었다.
동시에 황자의 마법이 작렬했다. 세상을 지워버릴 것만 같은 사나운 힘이 놈들의 틈바구니에서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