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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92화 (92/205)

92화. < 잠들지 않는 자 (3) >

메뚜기가 다시 언월도를 크게 휘둘렀다. 내 반격은 중국인의 방패에 가로막혔다. 방패에 검이 막힌 사이에 장총이 다시 불을 뿜었다. 갑옷이 가리지 못하는 옆구리가 불에 덴 듯이 화끈해졌다.

“항복해라!”

이번에는 메뚜기도, 중국인 장수도 아니었다. 웬 잡졸이 검을 휘두르며 내게 덤벼들었다. 나는 대검 자루로 놈의 안면 중앙을 강타했다. 놈은 안면이 함몰된 채 나뒹굴면서도 내 발목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졌다.

“죽음이란 어떤 기분인지 궁금하군. 한때는 존재의 소멸이 내게도 걱정거리였지.”

중국인이 방패 너머에서 이죽거렸다. 죽음을 강 건너 불구경처럼 말하는 걸 보니 놈의 자아는 불완전한게 틀림없었다. 홀로 독립적인 의지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느낌.

그야말로 병정개미.

“키이잇!”

또다시 협격이 시작되었다. 메뚜기가 언월도를 풍차처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내 가드는 방패에 무력화되었고, 그 틈을 장총이 다시 한 번 귀신같이 노렸다.

총격은 어찌 막아냈으나, 메뚜기의 다리까지 막진 못했다. 삐죽삐죽한 외골격이 허벅다리를 깊게 베고 지나갔다.

후두둑.

선혈이 풀잎사귀를 붉게 물들였다. 나는 몇 걸음 후퇴해 자세를 정비했다.

소미, 아길리.

시야가 닿는 범위내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금쯤이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곤경에 처해 있을 것 같았다.

“네가 죽는다면 네 무리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겠지. 인간이란 종족의 구심력은 한없이 나약하니.”

“네가 죽는다면 슬퍼해줄 사람이 있기는 할까?”

“다른 개체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게 바로 너희가 열등하다는 증거다.”

중국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기합을 크게 넣으며 놈의 면상을 후려쳤다.

놈은 온 몸을 방패에 기댄 채, 종아리가 바닥에 파묻힐 지경이 되어서야 간신히 공격을 상쇄할 수 있었다.

확실히 개인기량은 내 쪽이 위였다.

“키잇!”

다만 성가신 메뚜기가 붙어있다는 거.

나는 고개를 숙여 메뚜기의 언월도를 간발의 차로 피해냈다. 그 다음부터는 또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언월도의 난타를 막아내다가, 방패가 빈틈을 벌리고, 그 사이를 파고든 공격에 당하고 만다.

"큭...!"

메뚜기의 다리가 복부를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날카롭게 베인 갑옷이 움직일 때마다 문풍지마냥 너덜거렸다. 놈의 외골격은 잘 드는 검이나 다름없었다.

놈들은 내가 밀리는 걸 알면서도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느슨해지지도 않았고, 기계처럼 약속된 패턴을 반복할 뿐이었다.

“라힐 님!”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저도 가세하겠습니다!”

라드가 검과 방패를 든 채 가쁜 숨을 내쉬며 내게 달려왔다. 오면서 몇 명을 처리한 듯 사슬갑옷 자락이 피에 물들어 있었다.

“멈춰!”

나는 메뚜기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네 상대가 아니다, 당장 돌아가!”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짐덩이 하나를 안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내 반응이 놈들을 자극하고 말았다.

방패를 든 놈이 나와 라드 사이를 가로막았다. 언월도를 든 놈은 날개를 활짝 펴며 라드에게 날아갔다.

라드의 사색이 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실로 그의 죽음이 몇 초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비켜라!”

온 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살린 놈인데 눈앞에서 떠나보낼 순 없었다.

오데르의 창.

가능할 리가 없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찌르기 자체가 불가능해진 건 아니었다. 나는 찌르기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대검 끄트머리를 방패 중앙에 전심전력으로 꽂아 넣었다.

콰자자작.

방패가 휴지조각처럼 우그러들었다. 검극이 방패를 관통해 반대쪽으로 뚫고 나왔다. 중국인의 팔은 뼈가 팔꿈치를 찢고 나올 정도로 크게 뒤틀리고 말았다. 그러나 막판 뒷심부족으로 몸통에 직접적인 데미지를 주진 못했다.

“네 패배다.”

중국인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메뚜기의 언월도가 어느 틈에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라드는 오로지 나를 끌어내기 위한 셋업이었다.

선택의 시간이었다.

나는 방패에 꿰인 대검을 내던지며, 무력화된 중국인에게 달려들었다. 일순간 그의 눈동자가 큼지막하게 떠졌다.

“끼이이이이익!”

곤충 울음소리가 소리 높이 울려 퍼졌다. 내 주먹은 중국인이 아니라 메뚜기를 가격했다.

메뚜기는 내가 최소한의 방어마저 포기하고 공격에 올인하자, 중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경로를 수정했다.

내가 목숨을 건 게 그 지점이었다.

메뚜기가 중국인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거.

아무리 생각해도 에신에 이런 곤충형 지성체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

하등생물의 정신을 연결해서 요긴하게 써먹고 있는 게 아니냐고.

오른 주먹이 단단한 외피를 뚫고 몸통 깊숙이 박혔다. 메뚜기는 상체를 흔들며 발광하더니, 낫 같은 앞발을 내 목에 걸었다.

까드득.....

앞발이 갑옷 상판을 우그러뜨리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앞발과 조금이라도 닿은 피부는 개복수술을 하듯 쩍쩍 벌어지며 선혈을 움큼 토해냈다.

메뚜기의 겹눈에 내 모습이 수백 갈래로 비쳐보였다. 나는 왼손으로 놈의 얼굴을 움켜쥐어 수도꼭지 돌리듯 돌려버렸다. 겹눈이 머리통과 함께 뽑혀 나오며, 두터운 외골격에 감춰졌던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났다.

"라힐 님!”

라드가 날카롭게 외쳤다. 동시에 등허리가 뜨끔해졌다. 중국인이 내가 떨어뜨린 장검으로 기습을 감행해왔다. 그러나 팔뼈가 으스러진 상태라 충분한 힘을 싣지는 못했다.

나는 죽은 메뚜기를 밀쳐낸 뒤, 몸을 돌려 그의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컥, 크억…!”

놈이 내 팔목을 쥐며 바동거렸다.

“다행이다, 난 네가 정말로 죽음에 초연하면 어쩌나 싶었다.”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쳐다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결론적으로 놈에게 조금이나마 자아가 허락된 건 맞았다. 놈이 잡졸들처럼 단일의식으로 이어져 있었다면, 다른 개체를 희생해가면서 까지 자신의 몸을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하다고 했지? 이젠 알려줄 수 있겠다.”

“커어어억....”

손끝에서 뚜둑 소리가 잇따라 났다. 놈은 내 악력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나는 축 늘어진 놈의 몸뚱이를 저만치 던져버린 뒤, 라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라힐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적의 장수 두 명을 동시에...”

“라드. 다시는 그러지 마라.”

나는 그의 어깨를 쥐며 사납게 말했다.

“넌 아직 전사로서 한 사람 몫을 해내지 못해. 상대의 역량도 모른 채 날뛰다 죽는 건 명예도 뭣도 없는 개죽음이다.”

“...알겠습니다.”

라드가 풀이 죽은 모습으로 대답했다.

“명심해, 네가 묻힐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걸.”

나는 그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라드는 금세 기운을 회복했다. 그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종자 역할을 자처하며 나뒹구는 내 장검을 주워왔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피를 이렇게 많이 흘려본 건 또 간만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초점을 바로잡았다.

“어떻게 되어가지?”

“아군이 유리합니다. 소미님께서 큰 활약을 해주고 계십니다.”

때마침 저만치에서 무시무시한 폭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중국군이 박살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군 전사들의 기세등등한 함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도 소미의 백 퍼센트를 보지 못했다. 그녀가 나보다 더 강할 거라고 추측만 할 따름이었다.

전사들은 실로 열심히 싸우는 중이었다. 내가 앞뒤 가리지 않고 미친놈처럼 들이받은 바람에 전선의 일부가 뿔처럼 도드라지고 말았다. 전사들은 그 지점을 기점으로 삼아 전선 전체에 압력을 넣었다.

“후방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지휘관들에게 강한 적을 만나거든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전해.”

“예!"

라드가 군말 없이 돌아섰다.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하는 전사들이 얼마나 내 말을 들을지는 의문이었다.

나도 다시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다. 적을 하나라도 더 해체하는 것. 강한 적을 베어 국면을 흔드는 것.

메뚜기와 방패를 쓰던 중국인 같은 강적은 한동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앞을 막는 자가 아무도 없으니 나도 거칠 게 없었다. 나는 크록 전사단과 함께 노을이 질 때까지 적진을 종횡으로 휘저었다.

둥, 둥, 둥.......

전장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투의 종료를 알리는 신호였다. 병사들은 기세가 단단히 올라 있었으나, 배를 곪아가면서까지 싸울 순 없었다.

우리가 본진으로 군대를 물리는 동안 중국군은 후퇴한 지점에 2차 저지선을 만들었다. 들판이 시체로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조금도 규모가 줄어들지 않은 것만 같았다.

나는 병사들을 인솔해 본진으로 복귀했다. 사령부로 향하는 길은 고행으로 가득 찬 순례길 같았다.

부상을 입은 전사들이 곳곳에 드러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내릴 수 있는 처방은 몸달래풀 즙이 전부였다.

아무리 몸달래풀이 만병통치약이라지만, 깊은 외상에는 외과수술이 훨씬 효험이 컸다. 그러나 에신의 외과술은 보잘것없었다. 부목을 대거나 붕대를 감는 게 고작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읽혀졌다. 병사들은 원 없이 본 피 맛에 잔뜩 흥분해있었다.

“오빠!”

소미가 먼발치에서 날 부르더니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녀는 원거리 술법을 주력으로 삼은 덕인지 옷에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내 곁에 바짝 붙더니, 주변 눈치를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황자님이 찾으세요.”

어조가 묘하기 그지없었다. 단순히 작전회의나 하자고 날 부른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며, 소매를 잡아당겨 걸음을 재촉했다.

대영주 직속 전사단, 큰망치 전사단원들이 사령부 주위를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드나들 만큼만 길을 터 나와 소미를 들여보내주었다. 아침에는 이 정도로 경계가 삼엄하지 않았었다.

정기호, 이졸데, 료헤이, 영주들, 지휘관급 인물들이 사령부 입구에 모조리 나와 대기중이었다.

“들어가시죠.”

그들은 최대한 말을 자제하며 나와 눈짓으로만 인사를 나누었다. 분위기가 흡사 초상집에 들른 것만 같았다.

나는 소미와 함께 사령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한 사내가 짚단을 모아 만든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사내는 전신에 엄중한 화상을 입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가 황자라는 걸 알아본 이유는 곁에 아르세니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르세니오의 큼직한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했다.

“황자?”

“아, 드디어 왔군.”

그는 가면을 벗고 있었다. 나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불경죄라는 신성한 존재의 얼굴을 드디어 정면으로 목도하게 되었다.

화상으로 그을리고 이지러져 있었으나, 그의 이목구비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젊고 뚜렷하다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이것 좀 보라지.”

그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검게 탄 팔을 들어보였다.

“아버지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

“황제가 널 왜?”

“모르지, 내가 그의 성에 차지 않았을지도.”

황자가 손으로 주먹을 가리며 연거푸 기침을 했다. 검은 피가 그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아. 아버지란 존재의 관심을 끌어본 게 처음이거든.”

신관이 그의 곁에 대기중이었으나, 그녀가 내릴 수 있는 처방이라고는 병사들과 같은 몸달래풀 즙이 전부였다.

“치료사는 돌려보냈다. 알다시피 내 아버지의 형체를 함부로 변형했다가는 목이 매달릴 테니. 참 웃기는 법이지 않나?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나. 우리의 적이 의식을 서로 공유한다는데, 나는 의식이 있어도 쓰질 못하니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로군.”

그가 아르세니오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상체가 움직일 때마다 검게 굳은 딱지가 촛농처럼 떨어졌다.

그는 상반신만 일으킨 채 바닥에 떨어뜨려둔 가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일은 나도 전투에 참가하겠다.”

“좋은 생각이 아니야.”

“당신이 그랬지. 황가에서 오직 이황자 우르 게네발만이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노라고. 하지만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이대로 끝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언제나 그렇듯이 아버지의 찬란한 위광만이 역사에 기록되겠지.”

그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난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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