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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91화 (91/205)

91화. < 잠들지 않는 자 (2) >

드디어 황제의 축복이 임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눈부신 빛의 기둥이 벌판 전체를 뒤덮었다.

포격 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종국에는 아군의 함성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전사들은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대는 게 크록 못지 않았다.

절대자의 힘이라는 게 이런 건가.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확실히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황제가 나까지 축복을 해줄 줄은 몰랐다. 심지어 크록들까지 도매금으로 축복을 받았다.

우리는 그의 신도도, 신민도 아닐진대.

내게도 축복을 나눠준 건 황제가 우릴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미운 놈에게 떡까지 물려줘야 할 정도로 전황이 불리하다는 건가.

“소미.”

그러나 그걸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다급히 소미를 찾았다. 그녀는 나만큼이나 넋이 나간 채 빛기둥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네?”

“장교들을 준비시켜야 해, 당장.”

“지금요?”

“축복이 영원할 리가 없잖아.”

“아...!”

그녀가 놀라 입을 벌렸다. 축복은 원거리 무기를 조준사격하는 입장에서는 섬광탄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축복이 두드리면 나오는 서비스는 아닐 테니, 지금이 적진으로 돌입할 다시는 오지 않을 호기였다.

“나팔을 불어라!”

나는 좌익 지휘부로 돌아가며 연거푸 소리쳤다. 나팔수들이 진격을 알리는 뿔나팔을 힘차게 불었다.

뱃고동 같은 뿔나팔 소리가 함성소리를 덮어씌웠다. 좌익에서부터 퍼져나간 고동은 중군으로, 이윽고는 군 전체에 전염되었다.

드디어 도합 삼십만에 달하는 군대가 진군하기 시작했다. 거인 병단을 필두로 다양한 에사인을 섬기는 전사단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기운차게 달려 나갔다.

나는 그들의 최선봉에 섰다. 에신에서 장군이란 후방으로 빠져 전술이나 짜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런 건 장교들의 몫이고, 장군은 강력한 무력으로 쐐기의 첨단이 되어 적을 꿰뚫는 자를 의미했다.

나는 그 역할에 누구보다 충실할 작정이었다.

예상한 대로 축복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빛의 장막이 가시자 적진이 보다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잡한 목책을 세워둔 채, 돌입을 저지하기 위해 기다란 창을 내밀고 있었다. 창과 창의 틈바구니엔 총구가 삐져나와 있었다.

타타타탕...!

적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어냈다. 그러나 가장 앞서 달리는 자들은 나름대로 총기에 대한 대처가 되는 자들이었다. 갑옷에 마력을 불어넣어 물리력을 상쇄하는 게 일반적인 방법이었으나, 다가트의 용사들은 맨몸으로 총알을 받아내는 무식함을 선보였다.

백 미터 앞.

적병의 얼굴이 또렷이 들여다보였다. 그들은 우리처럼 함성을 지르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침착한 표정으로 조준사격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동양인이 아니었다. 내가 크록을 포섭했듯이, 중국군은 변방에서부터 여러 종족과 섞여 이곳에 이른 듯했다.

나는 대검을 횡으로 눕혀 가로베기를 준비했다. 황제의 축복으로 증폭된 마력이 길 잃은 바람처럼 날뛰고 있었다.

이 엄청난 힘을 살아있는 생명에게 쏟아내도 될까.

고민은 잠깐이었다. 어차피 어느 한쪽은 다 죽어야 끝날 전투였다. 나는 빗발치는 총탄세례를 거슬러, 대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힘껏 그었다.

두두두두......

검풍이 태풍처럼 일어나 조잡한 목책을 쓸어 담았다. 소총수와 창병들은 목책과 함께 낙엽처럼 휩쓸려 날아갔다.

“드디어 왔구나!”

나를 부른 건 내 동료가 아니었다. 발밑에 쓰러진 듣도 보도 못한 잡졸이었다.

"네가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오늘의 무대는 널 위해 준비된 축제다, 하하하!”

그가 입술을 비틀 듯 말아 올리며 웃었다. 나는 발로 그의 목울대를 밟아 그가 떠드는 소리를 멈추게끔 했다.

“큭..크르륵...”

“개소리는 죽어서 혼자 해라.”

“우리는..........하나이자 전부다.......우리를 모두 죽일 수는...”

나는 불문곡직하고 대검으로 그의 목을 쳤다. 새빨간 선혈이 오랫동안 묻어뒀던 암살자의 본능에 불을 지폈다.

“우리를 모두 죽일 수는 없다!”

땅바닥에 숨죽여 엎드려있던 놈이 벌떡 일어나며 내게 검을 들이댔다. 그는 내 뒤돌려 차기를 맞고 허리가 꺾여 날아갔다.

“하나된 힘!”

이번에도 다른 놈이었다.

그러나 알맹이는 같았다.

나는 놈의 목을 무감각하게 쳐서 떨귀냈다. 뜨뜻한 피가 턱 밑을 흥건하게 적셨다.

이어서 다른 놈을,

또다시 다른 놈을.

놈들은 주문처럼 하나된 힘을 읊조리며, 불나방처럼 몸을 던졌다.

과연 그들이 불멸을 자신할만 했다. 한 명 한 명 쳐죽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들은 마치 무한히 재생하는 히드라처럼, 매번 몸을 갈아타 나와 새로운 대결을 펼쳤다.

“이야아아아!”

근처에서 전사 한 명이 적을 능숙하게 베어냈다. 그러나 그는 곧 세 명의 다른 적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놈들은 내가 도우고 자시고 할 틈도 주지 않고, 한 몸이 된 것처럼 협공해 전사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전선 전체에 걸쳐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들은 눈앞에서 아무리 동료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가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치 감정이 없는 목석을 상대로 싸우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 기술.

마력만 없다뿐이지 적병들이 구사하는 무기술은 범상치가 않았다. 그들은 수십 수백만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최고의 전투술에 대한 데이터를 추출해낸 것 같았다. 그들의 조직력과 기술이 워낙 뛰어났기에, 숙달된 전사도 아차하면 순식간에 쓰러지고 말았다.

“비켜라!”

나는 더욱 공세적으로 적진을 들이받았다. 말이 공세적이지, 인간 백정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이 순간 적을 인간이 아니라고 여겨기로 했다. 검풍이 닿는 곳마다 적들의 사지가 제초를 하듯 잘려 나뒹굴었다.

아군 백 명을 살리기 위해 삼백을 벤다.

천 명을 살리려면 삼천을 베야한다.

백 만을 감당하려면 갈 길이 아득하게 멀었다.

나는 백만 군세의 안쪽으로 거침없이 파고들며, 종족, 출신, 그들이 하는 말, 무엇 하나 개의치 않고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둘로 쪼개 버렸다.

질척이는 핏물이 옷자락을 무겁게 붙들고 늘어질 때, 잡병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강자들이 나타났다.

한 놈은 흡사 메뚜기를 의인화해놓은 듯했다. 곤충처럼 팔다리가 가느다란 데다가, 몸 전체에 녹색 외골격을 둘렀다.

눈은 육각형의 겹눈이었고, 기다란 더듬이가 허리어림까지 내려와 있었다.

놈의 무기는 언월도였다. 그러나 허리에 찬 장총이 장식은 아닐 것 같았다.

다른 한 놈은 전형적인 동양인이었다. 길에서 마주쳤으면 금세 잊어버렸을 듯 무미건조한 얼굴에, 인민해방군의 군복을 입었다.

그의 무기는 두 개의 두꺼운 방패였다. 짐승 머리가 양각된 방패 표면에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네가 바로 그놈이로군.”

동양인이 내게 알은척을 했다. 메뚜기는 애초에 말을 할 수 있는 구강구조가 아니었다.

“왜 날 처음 본다는 듯이 말하지? 너흰 정신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 않나.”

메뚜기가 뒷다리를 날개와 비벼 희한한 마찰음을 만들어냈다. 추측컨대 저게 저 종족이 웃는 방식인 것 같았다.

“아직 우리에 대해 잘 모르고 있구나.”

“말을 안했는데 어떻게 아냐, 인마.”

“우리가 모두 하나의 의식으로 통합된 건 아니다. 우리들 중 일부는 필요에 의해 자아를 가진다.”

나는 그의 말이 진실인지 가늠해보았으나,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술법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이상한걸. 내가 만났던 중국인은 아직 자기네하고 합쳐지지 못한 개별자아를 동정한다며 주접을 떨던데.”

“물론 우리의 하부는 하나로 뭉쳐진 자아가 통솔한다. 그 편이 관리하기 더 쉽기 때문이지. 그러나 획일화된 단일의식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다양성을 배양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게 너희라고?”

“자격이 있는 일부라고 해두지.”

"...코메디가 따로 없네.”

비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대중을 통제하는 사회.

그거 지금의 중국과 다를 게 없잖아.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 운운하더니, 이상적인 독재국가를 만들어낸 모양인데.

“그 사실을 너희의 ‘하부’도 인지하고 있나? 자신이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게 뭐가 중요한가? 각자가 주어진 역할에 따라 충실하기만 하면 사회는 문제없이 돌아간다.”

“주어진 역할은 누가 정하고?”

“강한 자다.”

동양인이 오만하게 말했다. 확실히 자아라는 게 있기는 한 모양이다. 오만이란 상대적 비교우위에서 나오는 것이니.

“너도 충분히 자격있는 일부가 될 수 있다. 여기서 허망히 죽는 것보다 훨씬 값진 삶을 누리게 될 터.”

“허망하게 죽는 건 내가 아니라 너고.”

“우리는 인간의 영혼을 바닥까지 바라보았다. 본디 환생을 수십 번 거듭하며 점차적으로 끌어냈어야 할 잠재력을 영혼의 심층에서 건져 올렸다. 우리는 한 명 한 명이 여정에 오른 자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디딘 어떤 세력보다도 강하다.”

그가 두 개의 방패를 바닥에 강하게 박아 넣었다. 메뚜기는 내 뒤로 돌아가 비스듬히 언월도를 겨누었다.

“항복해라.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메뚜기의 겹눈을 겨냥해 대검을 내리꽂았다. 메뚜기는 날개를 쫙 펼치며 검격의 범위를 고속으로 벗어났다. 놈은 그 와중에 내게 장총으로 사격을 가했다.

이런 놈들이 얼마나 많은 거지?

나는 대검의 옆날로 총탄을 막아내며 자문해보았다. 인민군의 체계를 알 순 없으나, 상교가 낮은 계급은 아닐 것 같았다.

쐐애애액.

메뚜기가 바람을 가르며 내게 쇄도했다. 날카롭게 갈린 언월도가 목을 향해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대검과 언월도가 허공에서 몇 차례나 얽였다. 시퍼런 불꽃이 폭죽처럼 화려하게 비산했다.

과연 실력을 자신할만 했다.

놈은 근래 더욱 강해졌다고 자부하는 나와 호각을 겨루었다.

나는 그의 언월도를 떨쳐낸 뒤 허리춤에서 장검을 꺼냈다.

장검 자루가 손에 달라붙다 못해 팔이 길어진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 놈의 배, 숨구멍에 장검 끝을 쑤셔 넣었다.

타앙.....

거친 소음과 함께 장검이 튕겨져 나왔다. 장검을 막아낸 건 중국인의 방패였다. 그는 한쪽 방패로 메뚜기를 지키며, 다른 방패로 가슴을 거칠게 후려쳤다.

"큭...!"

고통을 표현할 새도 없었다. 뒤로 물러났던 메뚜기가 빠르게 가세했다. 그의 언월도를 어찌어찌 튕겨내자, 방패가 기가 막히게 빈틈을 몰아붙였다.

의식을 공유하는 자들의 협격.

흡사 네 개의 팔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두 개의 다른 각도에서.

이런 싸움은 전생에서조차 치러본 적이 없었다. 이 정도 강자들을 동시에 둘이나 상대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궁지에 몰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상하게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의 말마따나 영혼의 심층에 잠재력이 깃들어있다면, 여기가 내 바닥은 아닐 거란 근거없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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