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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90화 (90/205)

90화. < 잠들지 않는 자 (1) >

드디어 중국군이 지평선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좌우익을 넓게 벌려 적을 포위하겠다는 황자의 야심찬 계획은 아군의 세 배가 넘는 대군세에 단박에 좌절되었다.

창작물에서 글로만 봤지, 실제로 백만대군을 눈앞에 두자 살 떨리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실감이 났다. 그들이 함성을 내지를 때마다 발밑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마치 야지 전체가 한 덩어리로 뭉친 생물 같았다.

실제로 그러하다지만.

“장갑차가 보입니다!”

“왼쪽 후방에 적 포병부대입니다!”

적이 나타난 순간부터 사령부로 급보가 미친 듯이 날아 들어왔다. 그간은 적이 현대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찰을 마음껏 보낼 수가 없었다. 누락되었던 데이터가 한꺼번에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그들은 우리를 충분히 원거리에서 타격할 수 있는데도 진채를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이 전투가 길어질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의외로 탱크 숫자가 적네요?”

소미가 창문 난간에 기댄 채 쌍안경으로 들판 너머를 살펴보며 물었다. 나는 눈대중으로 적의 전력을 가늠해보았다.

“중화기 자체가 적어. 아무래도 서부전선에서 입은 피해가 컸던 것 같다.”

아무리 중국이라도 대당 수십억이나 하는 기계화장비를 무한정 투입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쪽수가 생각보다도 훨씬 많았다. 어떻게 저 많은 인원을 징집했으며, 저 많은 군대를 다 무장시킨 것인지, 적을 목도하고서도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남았다.

“창과 방패를 장비한 병력이 절반 이상이라고 합니다. 근접전으로 승부를 보지 않을까 합니다.”

라드가 뻣뻣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염을 기른 그는 아버지인 기엔 영주와 판박이였다.

“근접전이 벌어진다면 우리가 훨씬 유리하지 않을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갑자기 영주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황자 우르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이졸데부터 찾았다.

“대영주. 의식은 어떻게 됐나?”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만, 사제들이 절차상의 문제 때문에 집전이 어렵다고 알려왔습니다.”

“무슨 절차상의 문제?”

“그것은 황자저하만이 아실 거라며...”

이졸데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황자가 말하는 의식이란 일곱 권능의 축복을 비는 의례를 말함이다.

일곱 권능은 실체를 가진 신앙이었다. 그들에게 치성을 다하면 가시적인 보상이 뒤따랐다. 그러나 현재 네 번째와 일곱 번째 권능이 부재중이기 때문에, 지금 의식을 치렀다간 황국을 지탱하는 기둥 두 개의 부재만 알리게 될 것이다.

“일곱 권능이 아니다. 내 아버지를 위한 의식을 준비해라.”

“예? 그건...”

이졸데가 난색을 보였다. 우르의 지시는 국법에 정면으로 반하는 발언이었다. 황제를 향한 사랑은 무조건적인 순정이어야만 했다. 황제에게 대가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경죄였다.

“내가 명령하지 않나.”

우르가 사나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대리인이 되겠다. 위대한 황제 에신 템의 둘째아들 우르 게네발의 이름으로, 이 군대에 축복을 내려주시길 요청하마. 너희 인간들이 항상 그렇게 떠들지 않느냐? 자식의 앞날은 아버지가 밝혀주는 법이라고.”

“알겠습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겠다. 의식을 속행해라!”

영주들이 사령부를 우르르 빠져나갔다. 황자가 말하는 의식이란 삼십만 병단 전체가 각개로 벌이는 대규모 종교제례였다. 오직 마법 병단 모네모의 멤버 몇 명만이 남아 황자 개인의 의식 준비를 도왔다.

우르가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얼굴은 가렸을지 모르나 몸짓이 여실히 말해주었다. 그는 끊임없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창문 밖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모두 나가라.”

그는 지휘관들에게도 축객령을 내렸다.

“당신들만 빼고.”

나는 어차피 나갈 생각이 없었다. 소미는 난간에 걸터앉아 다리만 까딱였다. 황자는 소미가 나와 동등한 신적 존재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둘만 남겼다는 건 에사인과 관련된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다.

“너무 이른 감이 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때가 오면 아버지와 대면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일황자가 되는 날이 그 날일 거라고 여겼었다. 보라, 당신의 피를 물려받은 자식들 중에서 내가 가장 우수하다는 걸 입증하지 않았나. 한 몸에서 나왔다고 해서 우리가 다 같진 않다고.”

그는 독백을 하듯 조용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는 지금부터 아버지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입증을 해야만 한다. 아버지의 축복이 나를 통해 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야만 한다. 만약 실패한다면, 기도를 했는데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삼십만 신민의 목숨과 함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겠지.”

“무섭나?”

“거듭 말해두지만 원해서 오른 시험대가 아니다. 네가 나를 여기로 밀어 넣었다.”

“일전에 그랬었지. 네가 고작해야 여러 황자와 황녀들 중 한 명이라며.”

“그렇다.”

“그 말 취소하마. 지금은 아니야.”

난 팔짱을 낀 채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젠 널 다른 황자들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황가에서 오직 이황자 우르 게네발만이 나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노라고.”

“저도 증인이 될 거예요.”

소미가 쾌활하게 거들었다.

“시작하겠다.”

그가 맑은 액체로 찰랑이는 잔을 머리 위에 기울였다.

몸달래풀의 즙.

마력이 깃든 약초는 단지 치유의 용도만이 아니라, 신적 존재와 소통을 하고자할 때도 쓰였다.

그럴 자격이 있는 자에 한해서만 유효한 용도였다.

주르륵......

투명한 물줄기가 가면의 굴곡을 따라 흘러 황자가 입은 부드러운 모직물을 짙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황자는 고개를 위로 젖힌 채, 알아듣지 못할 몇 마디의 말을 중얼거렸다. 상고시대에 쓰인 고어일 것이라 추측만 해볼 따름이었다.

“이제 나가다오. 여기서부터는 혼자여야만 한다.”

그는 한 차례 짧은 기도를 마친 뒤 우리에게 자리를 비워줄 것을 청했다.

“황자님, 힘내세요.”

소미는 황자에게 주먹을 들어 파이팅자세를 취하더니, 창문 너머로 후다닥 사라졌다. 나는 문을 통해 얌전히 사령부를 나섰다.

“안녕하세요, 라힐님.”

문을 나서자마자 가죽 갑옷을 입은 비익족 소년이 날 반겨주었다.

“아르세니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래 봬도 아주 강한 분이시거든요.”

아르세니오가 흰 날개를 파닥이며 야트막한 돌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문 밖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를 모두 엿들은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천진한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저 순진함이 진짜인지, 아니면 가식인지, 그의 별칭이 광기라는 걸 알게 된 후 유난히 신경 쓰였다.

“너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구나.”

“그런가요?”

아르세니오가 헤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 이유 없이 온 게 아니에요. 라힐님께 숨겨둔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려고요.”

“어떤 이야기?”

아르세니오가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동작에서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검 손잡이를 쥐었다.

동시에 그의 손바닥에서 소량의 마력이 방출되었다. 진실의 추만큼이나 흔적을 캐치하기 어려운, 은밀하기 짝이 없는 기술이었다.

“......방금 뭐냐?”

“역시 대단하시네요. 이걸 반응하실 줄은 몰랐는데.”

아르세니오의 동그란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불쾌한 감정이 스멀스멀 치솟았다. 나는 대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여차하면 그를 단숨에 베어버리기 위해.

“오해하지 마세요, 그저 시간의 흐름을 잠시 멈췄을 뿐이니까.”

나는 그제야 그와 나를 제외한 모든 세계가 멈춰버렸음을 깨달았다. 멈췄다기보다 멈춘 것이나 마찬가지일 만큼 느려졌다. 마치 세상 만물이 오직 우리 둘만을 위한 배경으로 전락한 듯했다.

“...로켄이 이런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로켄은 꿈의 에사인이다. 게다가 시간을 조절하는 에사인은 내가 알기로 존재치 않았다.

“이건 폐하께서 이끌어내신 제 힘이랍니다. 라힐님이 라힐님만의 힘을 가지고 있듯이, 영웅에겐 영웅만의 힘이 있어요.”

“하지만 자신만의 힘이 허락된 건...”

“에사인과 여정에 오른 자 뿐이라고요?”

아르세니오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라힐님도 여정의 끝에 다다르지 못하면 영웅으로 남겨지지 않을까요? 이런, 술법의 유지시간이 짧아서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드릴게요. 로켄님의 전언이에요. 여정에 오른 자는 에사인의 힘을 흡수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해지는 장소는 서로의 정신세계 안이다. 이상입니다.”

아르세니오가 내게로 향한 손을 아래로 내렸다. 즉시 시간의 흐름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아르세니오는 디딤발을 힘껏 딛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살아서 다시 봬요, 라힐님.”

그는 파닥거리며 진지의 왼쪽으로 날아갔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꽁무니를 쳐다보았다.

에사인끼리 서로의 힘을 흡수할 수 있다니, 쉽사리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설마 그래서 일곱 권능 중 정신계 에사인의 서열이 더 높은 건가?

모르겠다, 그러나 모르는 게 정상이었다. 이 세계의 실체는 신화와 설화 속에 조각조각 파편화되어있다. 에사인에 오른 자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지 못했다.

“오빠, 거기서 뭐하세요?”

소미가 건물 뒤에서 빼꼼히 머리를 내밀었다.

“슬슬 우리도 돌아가야 해요. 이미 저쪽 유효사거리 안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나는 비로소 미몽에서 깨어났다. 지금 급한 건 당면한 적이었다. 나는 소미와 함께 우익을 지휘하기 위해 부대로 복귀했다.

8만.

내 손에 운명을 맡긴 전사들의 숫자였다. 그들은 무릎을 꿇은 채 머리 위로 몸달래풀의 기름을 흠뻑 부었다. 그들은 몸달래풀의 효험에 의지해 위대한 존재와 소통하길 간절히 기원했다.

오직 다가트의 전사들만이 다른 의례를 치렀다. 그들은 국부가리개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벌거벗은 채, 몸뚱이에 용맹의 문양을 덕지덕지 그렸다.

아길리도 예외가 없었다. 그녀는 다가트의 전사들을 이끄는 전사장중 하나였다. 원시적인 문양으로 전신을 휘감은 그녀는 전설이 이르는 아마조네스를 연상시켰다.

크록 전사들.

그들에겐 아직 의례랄만한 게 존재치 않았다. 그들은 대신 본능을 따랐다. 그들은 늑대가 하울링을 하듯, 눈알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무기를 쳐들며 내 이름을 울부짖었다.

나는 중군의 사령부를 쳐다보았다.

전사들의 염원이 하늘에 닿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중군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온다!”

별안간 누군가가 목청이 찢어지듯 크게 외쳤다. 적의 포병진지에서 흰 연기가 솟구쳤다. 포탄이 대기를 가르며 날아와 마법사가 구축해둔 방벽을 두들겼다. 새빨간 화염이 머리 위에서 맹위를 떨쳤다.

첫 일제사격을 신호로 삼아 적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흡사 폭풍이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방벽 너머로 폭음이 끊이질 않았다.

“온다!”

또다시 누군가가 소리쳤다. 별안간 머리털 끝이 쭈뼛 곤두섰다. 이번에 그가 가리킨 건 포탄 따위가 아니었다.

짙은 구름이 갈라지며, 찬란한 서광이 대지를 비추었다. 뜨거운 마력이 하복부에서 왈칵 치밀었다. 전사들은 무기를 움켜쥔 채 감격에 겨워 부르짖었다.

“영원불사의 황제를 찬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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