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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89화 (89/205)

89화. < 정체성 (16) >

내가 부사령이라고?

대체 어느 틈에 그런 협의를 마쳤던 거지?

당황스럽긴 했으나, 방금 그녀의 발언은 나를 띄워주려는 게 아니라 황자를 디스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마족의 사정에 밝고, 에사인과 겨뤄봤으며, 강한 군대를 거느린 전사.

이건 대놓고 황자 들으라는 소리잖아. 황자는 마족의 사정을 모르고, 에사인과 겨뤄보지도 않았으며, 군대는커녕 수행원도 없이 홀몸으로 왔으니까.

덧붙여서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 사람의 목을 매달 권력까지 가지고 있다.

일국의 운명을 건 중차대한 전투였다.

역량을 집중해도 이길까 말까한 판국에 황족 도련님의 뒤치다꺼리나 하게 생겼으니 열 받는다는 거지.

“라힐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황자는 전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 듯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너희들에게도 안목이라는 게 있군. 성격은 나쁘지만, 그 정도면 내 군대의 부사령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우르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쌍으로 돋은 뿔이 위협적으로 눈앞을 오락가락했다. 그 모습이 흡사 번식기를 맞이한 수사슴을 보는 듯 했다.

결론적으로 이졸데의 디스는 실패했다. 황자의 자존감은 그녀가 감히 건드려볼 수도 없을 만큼 고고했다. 그의 뇌는 자신의 능력이 남보다 처질 수도 있다는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부사령으로서 작전에 대한 복안이 있나?”

“그쪽 생각부터 먼저 들어보고 싶은데.”

“내 생각은 우리가 그냥 이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적을 공포에 떨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감히 이 땅을 넘본 걸 꿈에서도 후회하게 끔.”

그가 지도상에서 스트리아령의 서쪽에 펼쳐진 평원을 가리켰다.

“우선 이곳, 평원에 나가 진을 친다. 가급적 양익을 넓게 벌려서 황군의 위엄을 과시해야겠지.”

“...그리고?”

“중군은 내가, 왼쪽은 아르세니오가, 오른쪽은 네가 맡는다. 적을 넓게 포위하여 압도적인 힘의 격차로 일거에 소탕하는 게 핵심이다.”

“어떻게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보여주겠다는 건데?”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

황자는 당당했다. 돌이켜보면 울토르도 그런 식이었다. 울토르는 나와 처음 만났던 평원에서 총사령관의 몸으로 마그나크록과 일대일 결투를 펼쳤다. 뒤에서 부하들이 아작나건 말건 개의치 않으며.

황국은 수천 년간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여본 적이 없는 국가였다. 수천 년 전 기록을 뒤져봐도 ‘일곱 권능이 막강한 힘으로 적들을 쳐부수셨다’이상의 전략전술은 존재치 않았다.

“알아서 할 것 같으면 대체 작전은 왜 물어본 거냐.”

“울토르가 당한 경위 정도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상고시대부터 황가에 충성을 다한 전사였다. 최강의 에사인이라고는 말하지 못해도, 최고의 에사인이라고는 말할 수 있었다.”

“울토르님의 행방은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적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대략적으로 윤곽이 나왔지.”

나는 그에게 ‘하나의 중국’이란 개념과 정신계 술법, 사회주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는 중국이란 나라가 어쩌다 군체의식을 이루게 됐는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모든 인민이 평등하다고? 그러면 그들에게는 황제도, 군주나 귀족도 없단 말인가?”

“그렇다고 하네. 이론적으로는.”

“터무니없는 궤변이로군. 가진 능력이 평등하지 않은데 어떻게 인간이 평등할 수 있다는 거냐.”

“사회주의도 능력의 격차까지는 인정할걸. 다만 재화가 공평하게 분배되어야한다는 게 핵심이지. 똑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하루 종일 일해도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밖에 못 벌고, 누구는 부모 잘 만났다는 이유로 궁궐에서 갖은 호사를 누리는 건 이상하다는 거라.”

“그게 왜 이상하다는 거냐. 태생이 다르니 누리는 삶도 다른 게 당연하지 않은가?”

“적당히 흘려들어, 어차피 나도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이념을 정립한 사람도 시스템까지는 정립하지 못하고 죽었을 정도로 어려운 개념이라더라. 다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건 이 이념이 전투에 미칠 영향이지.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한다, 사회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천민에게는 매력적일 말이잖아.”

“자아를 버릴 정도로 말인가.”

“그 점은 나도 의문이다. 그게 자발적일 수가 있는 건지.”

“저는 정신계 술법이라고 확신합니다. 최소한 스트리아에는 그런 허황된 말에 넘어가 자아를 버릴 사람이 없습니다.”

이졸데가 단언했다. 나도 술법이라는 데 마음이 쏠리는 중이었다. 다만 정신계 술법의 양상이 워낙 천태만상이어서 미리 알고 대비를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아무튼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병사들에게 정신교육을 실시해야 해. ‘하나의 중국’의 목적은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게 아니라 자아를 흡수해 육체를 빈껍데기로 만들어버리는 데 있다고 확실하게 주지시켜야겠지.”

“알겠다, 그리고?”

“마족의 주술구.”

나는 정기호를 쳐다보았다. 정기호가 허리춤에서 권총을 끌러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빈총으로 몇 차례 시범사격을 해보았다.

“보여?”

방아쇠에서 달칵 소리가 연이어 났다. 나는 군대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대로, 총구를 사람이 없는 빈 공간으로 돌리며 말했다.

“이 구멍과 직선상에 있는 사람은 죽는 거다.”

“흐음.......”

황자가 불편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었다.

"주술구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정교하게 제작된 기계장치야. 마력이 없는 일반인도 간편하게 사용할 수가 있지. 수십만 명이나 되는 군대가 이런 무기로 공격해온다고 상상해보라고.”

“마력이 깃들어있지 않다고?”

“그렇다니까.”

“그럼 뭐가 문제냐? 원거리 투사체를 차단하는 방어벽을 전개하면 그만인데.”

“삼십만이나 되는 군대를 다 보호할 수 있느냐가 문제지.”

“마력도 없는 공격을 막아내는 게 뭐가 어렵겠나.”

나는 오르기를 돌아보았다. 황자의 호언이 허풍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기엔 수성전 때 마법사들이 박격포 사격을 막아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도시 전체를 가리지도 못했고, 방벽에만 집중하느라 시체걸이의 습격조차도 당해내지 못했다.

“가능합니다.”

오르기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력만 막아낸다고 가정한다면 모네모의 힘만으로도 군대 전체를 보호하는 방벽을 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러려면 정말로 적이 마법력을 쓰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물리력만이라도 막아내는 건 가능하다고요?”

“그렇습니다.”

오르기는 자신이 있어보였다. 그가 자신감을 내비칠 정도면 그건 물어볼 필요도 없을 일이었다.

"그게 된다면.......정말로 평원에 진을 쳐도 되겠는데?”

“대신 적이 가진 다른 수단을 간과해선 안 되겠죠. 정신계 술법을 쓰는 에사인은 다른 에사인보다 강하다고 평가받는다는 걸 유념하셔야 합니다.”

이졸데가 심각한 투로 끼어들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무적의 울토르보다 상위에 위치하는 셋, 길레악, 아바르, 로켄 모두 정신계 능력자이니.

“그렇습니다만, 술법에 대한 대처는 지형과는 큰 관계가 없으니까요.”

“말했다시피 우린 그냥 승리해선 안 된다. 우린 적을 압도해야만 한다. 그게 네 목적에도 부합할 터.”

황자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가 말한 목적이란 일곱 번째 권능을 노린다는 우리사이의 협정을 가리켰다.

“너도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거다. 네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을 다시없을 적기니까.”

나는 말을 하다말고 그의 뿔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상한 별명이 붙게끔 하진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만.”

남겨진 시간은 사흘. 그러나 최소 하루 전에 작전지역에 도착해 진지를 구축해둬야 했으니 실제로는 이틀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

이틀 사이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정신교육, 보급, 무장점검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사기 고취를 위해 행군간에 군가도 따라 불렀다. 군가란 얼마 전에 작곡된 공화국 애국가였다.

모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아직 적을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닌데도, 이 전투가 생애 마지막 불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숨 한 번 들이키는 것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스쳐가는 나무들, 발목을 간지럽히는 풀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원소들이 포탈을 갓 건너왔을 때보다 더 눈에 밟혔다.

“라힐님, 정면을 쳐다봐주십시오, 큼.”

크롱크가 비디오카메라를 든 채 내게 요구했다. 최근 그는 영상기록물에 강한 흥미를 보이는 중이었다.

“좋습니다. 이제 저를 바라봐주십시오.”

그는 이러다 종군기자라도 되려는 것 같았다. 나는 촬영에 적극 협조해주었다. 부하가 일을 열심히 해보겠다는데 돕지 않을 이유가 있겠어.

우리는 크롱크의 감시를 받으며 마침내 목표한 평원에 도달했다. 시선이 머물 곳이 없을 만큼 사방으로 탁 트인 벌판이었다.

크록들은 진지를 구축하는 데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다른 부대들이 천막이나 치며 깔짝거릴 때, 크록들은 넘쳐나는 힘으로 운하를 방불케 하는 깊은 도랑을 파고, 나무를 베어와 나를 위한 임시 처소까지 장만했다.

최종적으로 우익에 배속된 장군 및 영주들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부사령이자 우익군의 지휘를, 소미가 내 부관을 맡았고, 노출증 여전사 아길리와 혈기 넘치는 젊은 영주 라드가 부장이 되었다.

아길리는 내 곁에서 역사를 만들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으나, 라드가 나와 남은 건 의외였다.

정기호는 료헤이와 함께 좌익으로 갔다. 이졸데는 카룩카이와 크롱크를 데리고 중군에 배속되었다.

내 장군들이 대거 중군으로 빠진 이유는 황자가 크록이란 종족에 흥미를 느낀 나머지 억지를 부렸기 때문이다.

진지가 완성된 후 나는 부장들을 데리고 군의 시찰에 나섰다.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는지, 어떤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이졸데는 매일 탈영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군대의 사기가 낮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 황자의 합류로 인해 상당히 기세가 오른 것 같았다. 황자에게 기대를 거는 건 당연하다 하겠으나, 내게 쏟아지는 성원은 솔직히 의외였다.

“라힐님께서 오셨다!”

한 남성이 천막에 말뚝을 박다말고 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윽고 전사들이 여기저기서 메뚜기 떼처럼 뛰쳐나와 우리를 구름떼처럼 에워쌌다.

“저보다 인기가 많으시네요.”

소미가 재밌다는 듯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여기 머문 시간이 기니까.”

“머문 시간이 길다고 누구나 이렇게 되진 않아요. 오빠는 어두운 시대의 희망인 거예요. 여기 사람들은 이제 누구에게 기도해야 할지도 잘 모르거든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내가 그들에게 기적을 뿌리고 다니는 구세주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기댈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임엔 틀림없었다. 황제는 까마득하게 멀어 손에 닿지 않고, 일곱 권능은 패퇴를 거듭했다. 이 암울한 시대에 자신들을 지휘하겠다고 나선 강자가 그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일까.

“오빠, 잊지 말아요. 쇼맨십.”

소미가 한국어로 말하며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나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높다란 천막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나는 전사들을 내려다보며 등에 찬 대검을 천천히 뽑아들었다.

그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검을 동시에 뽑았다. 나는 그들의 눈에서도 생애 마지막 불꽃이 될지도 모르는 강렬한 에너지를 발견했다.

“전사들이여.”

고요한 병영에 내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나는 전신의 마력을 일순간에 끌어올렸다. 휘황한 빛무리에 휘감긴 대검이 하늘 끝을 힘차게 가리켰다.

“나 라힐이 있는 한 너희는 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온 몸의 투기를 발산하며 짧게 선언했다. 전사들이 진영 전체가 떠나갈 듯이 함성을 질렀다.

그들의 함성을 들으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전투가 내 정체성도 결정지을 거라는 것을. 어떤 에사인이 될 것인지, 이제 사람들에게 답을 줘야 할 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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