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정체성 (15) >
소미가 냉정하게 말했다. 엘리시아는 창백한 낯으로 가만히 선 채 소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좋습니다.”
그녀가 분노를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하지만 마르밀 가문은 결코 은원을 잊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라는 걸 잊지 마시길. 환란이 끝나면 당신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겁니다. 그때가 오면 오늘 당신이 섣부르게 내린 결정을 돌이켜보게 될 테지요.”
“네 가문이 은원을 잊지 않는다고?”
소미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나는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는 엘리시아보다 소미의 저 웃음이 더 무서웠다.
스윽.
소미가 의자에서 일어나 두 발로 바로 섰다. 엘리시아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소미가 뿜어내는 살기가 엘리시아의 기운을 완벽히 압도하며 응접실 전체를 숨 막힐 듯이 억죄었다.
엘리시아는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지만, 감히 검을 뽑지는 못했다. 그녀는 칼자루를 쥔 채 그대로 얼어붙고 만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의 힘의 격차는 개미와 코끼리를 떠올릴 만큼 압도적이었다.
“부디 잊지 말아줘. 그래야 지켜보는 재미가 있으니까.”
소미가 엘리시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엘리시아는 경악하여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녀는 자신이 들은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것 같았다.
“이만 가 봐. 병사로서 네 할 일은 끝났으니.”
소미가 엘리시아에게 고갯짓으로 명령했다.
엘리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거친 걸음걸이로 응접실을 떠났다. 잠시 후, 그녀에게 걷어 채였는지 화롯불이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후우.”
소미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알던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건 표정만 봐도 알겠다.
“저 너무하는 거 같았나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나는 그녀가 동료들에게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도록 변호할 필요를 느꼈다.
“전혀. 전생의 널 죽인 여자 아니니? 나라면 더했을 거 같은데.”
“오빠가 그랬죠. 진짜 복수는 그 사람을 규정하는 모든 걸 부정하는 거라고. 저 단단히 결심했거든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진짜 복수를 해낼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여자 날개를 보니까 마음이 약해지는 거 있죠.”
“마음 약해진 것 치고는 잘하더라.”
“마음이 약해져서 이 정도인 거예요.”
소미가 건조하게 웃었다. 가식과 진심이 반반섞인 웃음이었다. 그녀는 내게 착한 동생으로 남길 바라면서 복수심에 찬 악녀이길 원했다.
“마르밀 가문의 장녀가 전생의 소미님을 죽였다는 겁니까? 제가 들은 게 맞습니까?”
이졸데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네."
“역시 소미님이 이유 없이 그러시진 않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마르밀 가문은 삼상회의 원로로 자타가 공인할 만큼 권세가 높습니다. 그 여자 말대로 뒤탈이 나오지 않으려면 전쟁 후를 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우리가 직면한 전투부터 넘어서야겠죠.”
“그렇긴 합니다.”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 이황자님이 불렀던 거.”
“잘 됐어.”
“어떻게요?”
“이황자가 참전한다더라.”
“이황자님이 직접요?”
“그래.”
난데없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약 삼 초 후, 폭탄이 터지듯 저마다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황자, 우르 게네발님께서 전투에 직접 나서신다는 겁니까?”
이졸데가 내 멱살을 쥘듯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나는 그녀가 이렇게 감정이 풍부한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역시 라힐님이십니다.”
반면 아길리는 자신의 주군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녀는 열성팬답게 당연히 내가 해낼 거라고 믿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놀라는 대신 두 손을 맞잡으며 헐벗은 복장만큼이나 부담스러운 눈빛을 발사했다.
“한 명 더 있어. 아르세니오라고, 로켄이 점지한 용사라던데.”
“광기의 아르세니오 말입니까?”
이졸데가 놀라 되물었다. 나는 그녀가 붙인 수식어가 더 당황스러웠다.
“아르세니오가 맞습니다만, 어째서 이름 앞에 광기가 붙나요?”
“그는 마족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폐하의 소명을 받은 영웅입니다. 시대의 부름에 응했다는 점과 강한 힘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구원자로 떠받들어지고 있습니다만, 어린 나이에 너무 큰 힘을 각성한 탓인지 가끔 이성을 잃고 날뛸 때가 있다고 합니다.”
나는 아르세니오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마치 눈송이 같던, 한없이 순수해보이기만 하던 비익족 소년.
그에게 그런 석연찮은 별칭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폐하의 부름을 받은 영웅이 왜 정신이 불안정해진 거죠?”
소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오르기가 이졸데를 대신해 대답했다.
“그걸 캐묻지 않는 게 마법계의 오래된 불문율입니다.”
“어째서요?”
“마법이란 오랜 시간 주어진 재능을 점진적으로 개발해나가야 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꿈의 에사인은 마법사들의 상식을 뛰어넘어 하루아침에 ‘용사’라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평생 농사만 짓던 농부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대마법사가 되어있더라는 겁니다. 정신을 조작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논란이 많았으나, 지금은 거론 자체가 금기시됩니다.”
“맞춰볼게요, 신성모독이라는 거겠죠.”
“그렇습니다.”
“뭐, 지금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니까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인데.”
“고양이가 뭡니까?”
“저희 같은 마족을 집사로 부려먹는 요물이에요.”
소미가 장난스럽게 둘러댔다. 오르기는 무서운 상상을 했는지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그럼 황자님과 용사님에, 강철의 자매단까지 가세했으니 해볼 만한싸움이 되었네요. 병력의 질은 우리가 더 높다니까 지휘관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싸움이고요. 그렇죠?”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여 소미에게 맞장구쳐주었다.
“여러분 모두가 적 장수를 한 명이라도 더 요격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전투에 임해야 할 겁니다. 더 자세한 정보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서부방면군이 패잔병조차 남기지 못할 만큼 참패한 바람에 현재로서는 이렇다 할 방도가 없겠군요.”
우리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스트리아령으로 돌아왔다. 자매단원의 숫자가 보기보다 상당해서, 모든 인원의 이동이 끝나자 해가 완전히 져 오밤중이 되고 말았다.
나는 스트리아 왕궁의 내빈실에서 숙박했다. 황자더러 침구 운운했던 내가 정작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 때문에 잠을 설치고 말았다.
다음날, 드디어 카룩카이가 정찰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오르기와 함께 부스스한 얼굴로 식당에서 대충 아침을 때우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이다, 라힐.”
카룩카이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인사했다. 그는 좁고 가느다란 눈알만 드러낸 채 철갑옷으로 전신을 중무장하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 카룩카이.”
그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손에 크록 머리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근데 그건 뭐냐?”
“모르겠다, 너라면 답을 알 것 같아서 가져왔다.”
터억.
크록의 머리가 돌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들쭉날쭉한 절단면에서 죽은 피가 스프레이처럼 엷게 뿜어져 나왔다.
“한때 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기를 거꾸로 쥔 시점에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다.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정신계 술법인가.”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주군.”
오르기가 떨어진 머리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는 마력을 끌어올려 머리를 한 차례 스캔해보았다.
“마력반응이 느껴집니다. 술법이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긴,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설득하고 다녔을 리가 없지.”
역시 말만 번지르르한 놈들은 믿을 수가 없다. 이상적인 국가니 어쩌니 떠들더니만.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고?”
“적 본대가 가까이 다가왔다. 사흘 혹은 나흘. 임무를 더 끌었다가는 제때 돌아올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복귀했다.”
“잘했어. 괜히 무리할 필요 없지. 그만 가서 쉬어.”
카룩카이가 꼬리를 질질 끌며 병영으로 돌아갔다. 남긴 수프를 마저 처리하려고 스푼을 쥐자마자, 식당 문이 떨어져나갈 듯이 거세게 열렸다. 젊은 전령이 경박스러운 몸놀림으로 뛰쳐 들어왔다.
"라힐님!”
나는 대답 대신 시선만 주었다. 설마 적이 벌써 도착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이황자님께서 포탈을 타고 납시셨습니다!”
놀래라.
여기 사람들에겐 경천동지할 일이겠으나, 내겐 황자가 아침부터 부지런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만 가보세요.”
“...예.”
전령이 석연찮은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이게 아닌 것 같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는 식사를 마친 후 황자가 있을법한 곳을 찾았다. 듣자하니 그는 망루에 올라 운집한 병사들에게 한 차례 손을 흔들어준 뒤, 이졸데와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고 한다. 황제의 자손이 이런 변방까지 내려온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황자 이야기뿐이었다.
정확히는 황자의 가면 이야기를.
“그 가면, 너무 망측하지 않아요?”
“도대체..........듣던 이야기와 너무 달라서...”
시녀들이 남사스럽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간절히 원했던 대로 남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엔 성공한 것 같았다.
“아, 예의를 모르는 에사인이 왔군.”
회의실로 들어서자마자 황자가 나를 맞아주었다. 옆에는 아르세니오도 함께했다. 헐거운 갑옷 차림에 자그만 활을 든 아르세니오는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전령, 큐피드를 연상시켰다.
나는 자리에 앉기 전 우선 황자의 가면부터 확인해보았다. 밋밋하던 쇳덩이가 까맣게 색이 칠해졌고, 이마엔 위로 휘어진 뿔이 쌍쌍이 달렸다. 전날 본 그가 감정이 없는 양철인간 같았다면, 지금은 중세 태피스트리에 수놓아진 악마가 따로 없었다.
“...개성을 부여하라고 했지 막나가라고 하진 않았는데.”
“뿔을 추천한 건 너다.”
무척 흡족한 목소리였다. 그에겐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음악처럼 감미롭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하긴, 외모로 주목 받아본 게 태어나서 처음일 테니.
“그래, 네가 좋으면 됐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른 인물들이 하나둘 자리를 찾아가자, 우리는 잠깐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다릴 수가 없다.”
우르가 조바심을 내며 말했다.
“적이 고작 며칠 거리에 다가왔다는군. 황군이 한 수 접어주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터이니, 우리도 지체 없이 출군을 해야 한다.”
“황자님, 송구하오나 지휘권과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냐? 가급적 짧게 해라.”
우르가 신경질적으로 이졸데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는 과연 대영주 따위는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졸데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꿋꿋하게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저희에겐 전쟁에 능숙한 지휘관이 없습니다. 때문에 지금껏 누가 군을 이끌어야할지 의견이 분분했으나, 황자님께서 오신 이상 총사령에 대한 고민은 사라졌습니다.”
“당연하겠지. 그래서?”
이졸데가 흘끗 나를 곁눈질했다.
“하지만 부사령의 자리를 두고 여러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저희는 논의 끝에 마족의 사정에 밝고, 에사인과 겨뤄본 적이 있으며, 강한 군대를 거느린 뛰어난 전사를 부사령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