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정체성 (14) >
“저희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청년들이 내게 점잖게 인사하고 물러났다. 나는 그들을 떠나보낸 뒤 자매단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이윽고 그녀들의 상징인 황금갑옷이 마냥 찬란하기만 하지 않다는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갑옷을 장식하는 여러 흉터들 중에서 총알의 흔적을 어렵잖게 찾아냈다. 소총, 혹은 기관총이 만들어낸 탄흔이었다.
장비를 정비할 틈조차 없었던 걸 보면 전선에서 복귀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오죽 급했으면 쉬지도 못하고 이런 곳에서 진을 치고 있는지.
“죄송합니다만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
여성 무장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흉터가 인상적인, 노련한 검사였다.
그녀는 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부연했다.
“귀인을 모시라는 카둔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신성한 임무를 수행중이니 출입 일체를 금합니다.”
“귀인이 누굽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엘리시아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까?”
내가 알기로 자매단에 남은 간부라고는 부단장인 엘리시아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울토르의 부관이니, 울토르와 함께 서부전선에서 몰락했어야만했다 .
“그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그녀가 완고하게 대답하며, 위협을 하듯 창대로 바닥을 한 차례 찍었다.
“당신들이 모실 귀인이 누구인지 몰라도, 별궁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모두 내 부하들입니다. 저는 그저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자 할 뿐입니다.”
나는 무관을 부드럽게 타일렀다. 어차피 그녀는 받은 명령을 따를 뿐인 무인이었다.
그녀는 잠시 갈등하더니, 머뭇거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를 지나쳐 별궁으로 들어갔다. 나올 때 텅 비었던 별궁 복도를 강철의 자매단원이 점거중이었다. 나는 그녀들이 터놓은 길을 별 생각 없이 지나가다가, 문득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왜 자매단에 비익족밖에 보이지 않는지.
물론 비익족이 폼 나긴 한다.
우아하고 아름답고, 강하기까지 하다. 의장대로는 이만한 종족도 없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가 퍼레이드나 하려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녀들은 사선을 넘어, 호흡이 턱 밑까지 차오른 상태에서 이곳에 왔다.
응접실 문은 열려있었다. 문가에 닿기도 전에 이미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엘리시아가 확실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엘리시아이나, 그녀의 겉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져있었다.
피막.
그녀의 날갯죽지에 돋아난 건 검고 거무튀튀한, 피막으로 뒤덮인 흉측한 박쥐날개였다. 비익족의 자긍심인 순백의 날개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바뀐 날개가 수치스러웠는지 끈으로 칭칭 동여매어두었다. 저래서는 날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그때는 미안했다.”
밑도 끝도 없는 사과.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오르기와 소미, 이졸데, 아길리, 라드가 모두 나와있는 가운데, 그녀는 소미와 대면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너란 사람에 대해 아무런 확신이 없었다.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마족 출신의 외부인을 무작정 단장으로 앉힐 수는 없었으니까.”
소미는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올라앉은 채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엘리시아를 쳐다보았다.
방 안이 춥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하얗게 물들인 머리카락만큼이나 소미의 마력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 천것이 분수를 모르는구나. 내세울만한 가문도 없는 주제에 감히 단장 자리를 넘봐?
엘리시아의 날카로운 경고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엘리시아는 전생에서 소미를 죽이는 데 가담한 인물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마침 나도 전생의 나를 죽이는 데 가담한 인물을 만나고 온 참이었다.
하지만 나는 우르 게네발을 미워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제거 당한 건 어디까지나 자업자득이다.
살업을 그만큼이나 쌓고도 늙어죽길 바랐다면 양심이 없는 거지.
그러나 소미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녀는 천민으로 태어나 귀족의 유흥거리로 전락해 천천히,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는 엘리시아를 미워할 권리가 차고 넘친다.
“내가 단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미가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강철의 자매단이 찾아온 건 역시 소미 때문이었다.
“서부전선에서 돌아오자마자 카둔께서 네 이름을 거론하셨다. 전임 단장인 이라올라님을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고, 전황이 촉급하니 네게 찾아가 자매단의 운명을 맡기라고 말씀하셨다.”
“왜 너희만 돌아온 거니? 울토르님은 어쩌고.”
엘리시아가 윗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가 변명거리를 떠올리고 있다는 건 굳이 술법을 쓰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싸워봤자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전력을 보존해서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상하네, 그런 판단은 네가 내리는 게 아닐 텐데.”
“단장대리로서 내게도 자매단을 이끌 지휘권이 있다. 현장의 상황은 현장지휘관이 보고 판단하는 게 옳다.”
“울토르님은 현장에 계시지 않았나보다. 아니면 후일을 도모하고 싶지 않으셨다던가.”
나는 소미가 이렇게 무서운 여자일줄 몰랐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엘리시아의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그녀가 누차 강조했던 게 쇼 엔터테이너적인 포장기술이라는데, 눈빛만 봐서는 연기인지 아닌지 분간이 불가능했다.
“울토르님도 감당하지 못하는 전장이라 판단하고 내린 결단이었다. 그마저도 늦어 보병까지 구해낼 순 없었다.”
“네 날개는 어쩌다 그 모양이 된 거니?”
엘리시아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새파란 눈동자에서 심장을 저미는 듯한 섬뜩한 살기가 쏘아져나왔다. 그러나 소미는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그녀의 살기를 받아내었다.
“왜, 쪽팔려서 말 못하겠어?”
“이건, 부상을 치료한, 대가다.”
“참 악취미네.”
소미가 새액 미소 지었다. 두 여성이 칼부림을 부리는 환상이 불현 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날개는 비익족에 있어서 단순한 신체기관이 아니라 명예, 긍지,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였다. 비익족은 날개를 잃느니 목숨을 버리는 걸 택할 것이다.
변화의 에사인도 그걸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부상을 치료해주는 대가로 날개를 저렇듯 자기 취향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카둔께는 나도 신세진 게 많아. 그분이 부탁하시면 거절할 수 없겠어.”
“단장직을 맡아주겠느냐?”
“근데 너, 단장한테 원래 그렇게 반말하니?”
소미가 무릎을 가슴께로 끌어 모으며 천진한 투로 물었다. 이때 엘리시아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해있었다. 불끈 쥔 그녀의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게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결국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소미를 점지한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가 모시는 에사인이었으니.
“아직 단장을 맡겠다고 확답하지는 않았...”
“맡을게, 까짓거.”
"........"
“대답이 없네.”
“알겠, 알겠습니다.”
“그게 다야?”
엘리시아가 허리를 천천히 펴더니,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얹었다. 상급자에게 취하는 황군 공용의 예우였다.
“참 보기 좋네, 명망 높은 마르밀 가문의 장녀가 천민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엘리시아가 복부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소미가 환생자였다는 것만 알았지, 천민인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녀에게 천민이란 내키는 대로 가지고 놀다 싫증나면 죽여 버리는, 이른바 귀족놀이란 가학적인 행위의 대상이었다. 평생 살아오면서 사람대접은커녕 애완동물만큼의 취급도 해준 적이 없었던 존재를 이제 상전으로 모셔야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장이 꼬이는 기분이 들 법도 했다.
게다가 소미가 이죽이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그녀를 악역으로 착각할 정도로.
실제로 라드와 오르기는 그렇게 착각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소미에 대해 호감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청순한 미모와 청아한 목소리는 우호적인 선입견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그녀의 바뀐 캐릭터에 충격을 받아 대화가 오가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빠, 마침 잘 왔어요. 이제부터 중요한 얘기를 해보려는 참이니까.”
소미가 해맑게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 엘리시아는 나를 보더니 눈빛이 더 흐트러졌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자 더욱 자신의 굴욕이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았다.
나는 소미의 옆에 말없이 가서 섰다. 소미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엘리시아에게 물었다.
“중국군한테 왜 졌어? 너희들이 그리 약한 애들은 아니잖아. 혹시 마족의 무기 때문이니?”
“...아닙니다. 마족의 무기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대처 가능했다고? 어떻게?”
“그들이 쓰는 무기에 대한 정보는 충분했습니다. 저희는 비행전단을 조직해 그들이 장갑차라고 부르는 법구를 신속하게 제압했고, 투사체를 막는 방어마법으로 그들의 주술구를 무력화했습니다. 적 개개인의 무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아서, 주술구를 봉인한다면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보다 조금 나을 정도였습니다.”
엘리시아의 호흡이 조금씩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사무적인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녀는 빠르게 본분을 되찾았다.
“그런데?”
“적의 지휘관들이 전략상의 우위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을 만큼 강했습니다.”
“강한 전사라면 우리도 많잖아?”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울토르님조차 버거워하실 정도였습니다.”
소미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믿을 수 없다는 저 얼굴, 지금 내가 짓고 있는 표정이 딱 저렇겠다.
울토르조차 버거워할 실력자라면 에사인에 거의 근접했다는 소리인데, 그런 강자를 붕어빵처럼 찍어낼 수 있는 세력은 어디에도 존재치 않았다.
"공포에 질려서 헛것을 본 건 아니고?”
“저희는 훈련받은 전사입니다. 싸움에서 질 수는 있어도 보지 않은 걸 봤다고 하진 않습니다.”
“가설이 떠오릅니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오르기가 말문을 열었다. 그 말고는 달리 마법이나 술법에 관해서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가설입니다만, 군체의식을 가진 적이 외부자극에 대응할 때도 하나의 생물처럼 움직인다고 가정합니다. 모든 신체부위를 고르게 강화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는 효율이 낮습니다. 때문에 자연계에는 독샘을 발달시킨다던가 독침을 품는 등 특수한 대응수단에 집중하는 방식이 존재합니다.”
“...적의 지휘관이 독침이라고요?”
“불필요한 개체에게서 마력을 끌어와 재능을 가진 개체에 집중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들의 역할을 독침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기이하네요.”
“받아들이기 어려우실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들의 능력을 대범하게 상상할 때라고 봅니다.”
공감했다. 평소 소심하던 양반이 이론적으로는 대범해지는 게 기이하다는 말이긴 했다만.
“또 다른 건 없었고?”
“예, 패배의 주요원인은 적의 지휘관들을 막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 고생했어.”
소미가 웃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아참, 그리고 이제부터 넌 부단장이 아니야. 평단원이 되어도 변함없이 카둔께 봉사를 다하리라 믿어.”
"예?"
엘리시아가 멍하니 되물었다. 그녀는 몇 초 후 소미의 말을 접수하고 험악하게 따져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저는 지금까지 단장대리로서 자매단을 잘 이끌어왔습니다!”
“그랬던가?”
“이러시는 건 월권입니다! 카둔께서는 자매단의 운명을 맡기셨지, 마음대로 전횡을 부리라고 하시진 않았습니다!”
소미는 그녀의 반발에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나도 바보는 아니잖아. 현장지휘관이 날 버리고 도망치는 걸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