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정체성 (13) >
“날더러 전투에 앞장서라고? 제 이 황자인 이 우르 게네발이 말이냐?”
“그게 싫으면 나라가 망할 때까지 방구석에서 계속 음모나 짜시던가.”
“너는 화법에 문제가 많군. 설령 네가 일곱 번째 권능이 되더라도 내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할 권리는 없다.”
“존중을 받고 싶거든 먼저 그럴만한 자격을 보여야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놈에게는 보일 존중이 없어.”
“내가.......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다고?”
그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별안간 내게 격한 분노를 토해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지껄이느냐? 지고무상의 존재에게 피와 살을 나눠 받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네깟 것이 알기나 아느냐? 나라고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겠느냐? 나라고 에사인이 되고 싶지 않았겠느냐? 꿈을 꾼다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고, 세상 모든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허황된 약속을 할 때 나는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기나 아느냔 말이다!”
그는 할 말을 폭풍처럼 쏟아낸 뒤 쇠로 만든 가면을 움켜쥔 채 거칠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무래도 나는 그의 역린을 건드려버린 모양이었다.
지고무상의 존재의 형상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가면.
저 가면이 바로 황제의 핏줄을 옥죄는 족쇄였다. 그들은 결코 황자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세상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얼굴조차 내세울 수 없으니, 그들이 쌓인 울분이 어떠할지는 추측만 해볼 뿐이다.
“아무래도 네겐 사랑이 부족했던 모양이네.”
“이미 네 화법을 지적했을 텐데.”
“그럼 나라도 허황된 약속을 하나 하지.”
나는 그에게 힘주어 말했다.
“꿈을 꾼다면 뭐든 이룰 수 있다, 그게 황자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개소리하지 마라. 너는 이 거룩한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그러니까 그만 징징대고 그 거룩한 집구석에서 기어 나오라고. 나가서 이황자 우르 게네발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란 말이다. 그 잘난 머리로 전쟁이 네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지. 목숨 걸고 싸워서 백성들을 지키는 거, 그거 네 아버지도 못 보여준 모습 아니더냐?”
“가면을 벗지 못하는 이상 나는 결코 나 자신이 될 수 없다. 애초에 왜 내가 형님을 셋이나 두고서도 이황자라고 불리겠느냐? 형제중 하나가 죽으면 그의 호칭은 자동으로 다음 사람으로 넘어간다, 그뿐이다. 내게 붙은 숫자는 황제의 자식들을 헤아리기 위해 달아둔 꼬리 표에 지나지 않아.”
“가면이 문제가 된다면 뿔이라도 달지 그래.”
“...뭐?”
“너만의 아이덴티티가 필요하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간단하네. 어떤 가면을 써야 하는지까지 세세하게 정해두진 않았을 테니, 머리에 꽃을 꽂아두건 뿔을 달건 창작욕을 발휘해 보라고. 가면 자체에 개성을 부여하면 되잖아.”
“가면은 가면일 뿐이다.”
“장담하는데 가면도 정체성이 될 수 있어.”
가면이 정체성이 될 수 있다는 건 만화나 영화 등에서 활약한 여러 히어로가 증명한다. 그들은 본인의 정체를 숨기려는 용도로 가면을 사용했으나, 황자는 가면이라도 써서 정체성을 보여야한다는 게 다르긴 하지만.
그러고 보면 최근 날 둘러싼 상황이 유독 정체성이라는 단어와 연이 깊은 것 같다. 자신을 내세우지 못해 괴로워하는 황자와 모두를 위한 하나가 되어버린 중국. 결국 그 둘은 숙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
“그건 진실의 에사인이라는 네 힘으로 내다본 통찰이냐?”
“물론.”
“여러 시각을 충분히 고려해보진 않았다는 걸 인정하지. 그래봤자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순 없겠지만.”
“성질이 급하다는 건 알고 있는데,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야? 한달음에 에사인이 될 수 없듯이 네 꿈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어. 우선은 황제의 자식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식이 되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전쟁에서 활약해서 말인가?”
“그래.”
“그럴듯한 말이긴 하다만, 여전히 걸리는 게 있군. 너는 마치 나를 위한다는 것처럼 말하지만, 네 목적은 어디까지나 일곱 번째 권능으로 추대되는 게 아닌가. 한데 네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들고 나온 수단은 내 과거를 캐내서 협박하는 것이었지. 내 경험상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수단이 떳떳하지 않은 자는 목적도 떳떳하지 않은 게 대부분이더군.”
거의 넘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만만치가 않다.
“더군다나 너는 내 과거를 훤히 알고 있으나, 나는 왜 네가 일곱 번째 권능이 되고자하는지 모르지 않나. 네가 마족의 끄나풀이라면 나는 이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갈 치명적인 과오를 저지르는 셈이다.”
“날 여기로 데려온 건 아바르와 울토르다. 울토르는 연락이 닿지 않으니 아바르한테 가서 물어봐. 라힐이란 놈이 마족의 끄나풀인지 아닌지.”
“네가 라힐이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지?”
“제가 보증할게요.”
문득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나와 우르는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나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훤히 열린 창가에 아주 작은 체구를 가진 소년이 앉아있었다. 방에 들어설 때부터 열려있던 창문이었다. 뺨을 스치고 지나간 바람이 저곳에서부터 불어왔음에 분명했다.
그러나 그땐 소년을 보지 못했다. 어느 타이밍에 나타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경지에 오른 전사인 나와 황국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울 대마법사 우르의 이목을 속인 것만으로도 소년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아르세니오, 창문으로 내 얘기를 엿듣는 거 그만두라고 했을 텐데.”
우르가 소년을 나직하게 타일렀다. 특유의 냉소는 여전했으나, 태도는 친구를 대하듯이 부드러웠다.
“황자님께서 몰래 사람을 들였다기에, 또 나쁜 짓을 꾸미고 계신가 걱정이 되어서요.”
아르세니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미소를 짓는 것만으로도 보조개가 패는, 사랑스러운 인상을 가진 소년이었다.
흰 곱슬머리는 마치 솜털을 얹어놓은 것처럼 복슬복슬했고, 새하얀 날개는 어깻죽지 뒤로 고이 접혀있었다.
소년은 비익족이었다. 여느 비익족이 그렇듯이 한 번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만큼 미모가 빼어났다.
그러나 나는 소년의 외모나 실력보다, 저 악독한 이황자에게서 인간미를 이끌어내는 정체가 더 궁금했다.
"엿차."
아르세니오는 높다란 창틀에서 내려와 바닥에 안전히 착지했다. 그는 파란 눈동자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뵙게 되네요, 라힐님.”
“날 알고 있나?”
“꿈에서 뵀었어요.”
"꿈?"
“라힐님과 나란히 서서 마족과 싸우는 꿈이었죠. 처절하고 잔인한 전투였지만, 끝에는 영광된 승리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설마 너는 로켄의.......”
“네, 맞아요.”
아르세니오가 알아봐줘서 기쁘다는 듯이 헤죽 미소를 지었다.
세 번째 권능인 로켄은 꿈의 지배자라고도 불린다. 그는 실체가 없이 오직 꿈 속에서만 존재하는 에사인이었다.
로켄은 칩거한 황제의 진정한 대리인이었다. 그는 꿈에 황제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신관들에게 계시를 내렸다.
아주 드문 경우이나, 평범한 사람이 그의 계시를 받고 잠재력을 각성하여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케이스가 존재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영웅이나 용사라고 불렀다.
“저도 라힐님과 함께 싸울게요. 저는 폐하께 선택 받은 용사에요.”
아르세니오는 우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황자님께서도 같이 가주실거죠?”
"아르세니오......."
무척 복잡한 심경이 담긴 목소리였다. 저 차가운 가면이 이토록 많은 감정을 담아낸 적이 없었다.
그는 한참 고민한 끝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간다면 나도 가겠다. 대신 너는 항상 내 뒤에만 있어야한다. 네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황자님 뒤에만 숨어있으면 참전하는 의미가 없는걸요?”
“말 들어. 명령이다.”
“네."
우르가 강하게 나오자 아르세니오는 군말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표정은 전혀 수긍한 것 같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어디로 튈지 모를 장난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우르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앞머리를 쥐어뜯더니, 내게로 화살을 돌렸다.
“스트리아라고 했나?”
“그래.”
“촌구석이로군. 제대로 된 침구나 있을지 모르겠다.”
“필요하다면 길바닥에서 잘 각오도 해야 할 거야.”
“내일 오후에 만나지. 삼상회를 말없이 비울 수는 없으니까.”
“좋아.”
“단, 네가 주장하는 그 낭설들이 다시는 나를 협박하는 데 이용되어선 안 된다. 네가 아닌 그 누구의 입을 통해서라도. 이걸 확약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나와 함께 파멸할 각오를 해둬야 할 것이다.”
“맹세하마.”
나는 허리에서 장검을 꺼내 손가락을 얕게 베었다.
“나는 우르 게네발이 과거 저지른 죄로 그를 협박하지 않겠다. 이를 어길 경우 나는 로켄의 악몽 속에서 영원히 헤맬 것이다.”
핏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흘린 피는 바닥에 닿자마자 연기처럼 기화했다.
에신인들이 서약을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에사인 한 명의 이름을 대고, 그가 내릴 수 있는 형벌을 언급한다.
에사인은 약조가 이루어진 경위와 경과를 살펴보고 필요하다면 벌을 내린다.
그러나 이 언약이 만능은 아니었다. 말장난으로 벌을 피해가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무식하게 힘을 내세워서 돌파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에사인의 진신이 나서지 않는 이상 사제가 형을 대리집행하게 되니, 사제를 제압할 능력이 있다면 언약의 구속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언약은 이황자 우르 게네발이 나를 일곱 번째 권능으로 추대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무효화된다.”
그래서 단서조항을 잘 달아둬야만 했다. 말장난이 가능하지 않게끔.
“이제 떠나라, 내일 스트리아로 가겠다.”
우르가 쌀쌀맞게 축객령을 내렸다.
"라힐님, 제가 모셔다드릴까요?”
아르세니오가 물었다. 나는 그의 다 자라지 않은 날개에 부담을 주기 싫었다.
“괜찮아, 탈것이 있으니까. 내일 보자.”
나는 황자의 방을 떠나 탑 꼭대기로 되돌아왔다. 나를 데려다주었던 젊은 귀족들이 잡담을 나누며 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들은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한 마디도 묻지 않고 나를 다시 탈것에 태웠다.
푸드덕...
탈것이 힘차게 날아올랐다. 나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등자에 발을 단단히 걸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응접실은 질서의 궁과 이어진, 커다란 별궁의 일부였다. 날이 저물자 백색 마법등이 꽃이 개화하듯 궁 여기저기서 화려하게 피어났다. 나는 발밑을 도도히 흐르는 마법등의 은하수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 왔습니다, 고삐를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별궁 앞은 떠날 때와 달리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탈것에서 내리고서야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비익족, 그냥 비익족도 아닌, 찬란한 황금 갑옷을 입은 여전사들 수백 명이 별궁 앞에 질서정연히 도열해있었다.
그녀들은 창촉이 하늘로 향하도록 쥔 채, 조각상처럼 서서 별궁 입구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흐르는 분위기는 빈소를 연상시키듯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하필 그녀들이 주시하는 입구가 내가 들어가야 할 입구였다.
“강철의 자매단이 여긴 어쩐 일이지?”
날 가이드했던 귀족이 의아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들도 연유를 모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