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정체성 (12) >
“참고로 내 이름은 라힐이다. 황제의 아들이라면 내 이름 정도는 들어봤겠지.”
가면 때문에 그의 표정을 읽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건 잠깐의 침묵만으로도 유추가 가능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암살자 시절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네 이름 따위를 내가 알아야하나? 너는 형님의 죽음으로 한몫 잡아보려는 협잡꾼이 아니더냐?”
물론 그는 나에 대해 알 필요가 없었다. 예의나 격식을 갖출 필요도 없었다. 에사인을 제외하고는 하늘아래 그의 위는커녕 동등한 자 조차 존재치 않으니. 그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오직 같은 황족, 에사인, 그리고 삼상회의 귀족들뿐이었다.
“협잡꾼이라, 재밌는 말인걸.”
나는 보란 듯이 피식 웃었다.
“네 둘째 형의 죽음으로 한몫 잡은 협잡꾼은 내가 아니라 너겠지. 너는 그가 사냥에 미쳐있다는 걸 이용했어. 평범한 사냥감을 보기 드문 성수인양 위장해서 깊은 숲까지 끌어들인 후 암수를 썼지. 그에게 사냥감에 대한 이야기를 흘린 자, 사냥터를 관리하는 영주, 하다못해 잡담을 나누는 시녀나 몰이꾼조차 네 안배가 아니었나. 지금은 다 죽어서 증언해줄 사람조차 남지 않게 되었지만.”
“.......들을 가치도 없는 낭설이로군.”
그는 내 말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내 말을 부인하고자 했다면 당장 병사들을 불러다가 날 찢어죽이라고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이야기가 먹혀드는 걸 확인한 나는 더욱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유탄 대영주의 죽음도 낭설인가? 너는 그의 장손에게 죄를 뒤집어씌웠지만, 실은 네가 누이와 합작하여 조작한 죽음이었지 않나. 누이는 무대를 준비하고, 너는 잘 드는 검을 대고. 누명을 뒤집어씌워 한 가문을 완전히 파멸시키고도 너는 아무렇잖게 잘 살아가고 있구나.”
“...넌 뭐하는 놈이냐?”
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이졸데가 주지시켰듯이 그는 인내심이 많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치밀한 음모의 대가였으나, 그 바탕에는 타인의 존재를 참지 못하는 잔인함이 깔려있었다.
“나는 라힐, 진실의 에사인이다.”
나는 표정, 눈빛, 자세, 나를 나타내는 모든 외적인 신호에 심혈을 기울이며 말했다.
“진실의 에사인이라고?”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바로 그렇다. 나는 차원 너머에서조차 네 죄업이 풍기는 악취를 맡을 수 있었다. 음습하기가 남방의 늪지대 못지않더군.”
오데르의 자식들은 의뢰인에 대한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했다. 그게 신성한 계약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무덤에 한 번 다녀왔다. 게다가 이젠 오데르를 섬기는 몸도 아니니 직무상 취득한 비밀을 어떻게 쓰든가는 내 맘 아니겠어.
“재미있는 놈이로군.”
그가 차갑게 웃었다.
“자신을 에사인이라고 주장하려면 그에 걸맞은 위명이 있어야하지 않나. 그러나 나는 널 듣도 보도 못한 마족이라고 소개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만큼은 한층 누그러들었다. 황자는 결코 에사인의 위가 아니었다. 황제가 불멸자이기 때문에, 황족에게는 미래권력이 약속되어있지 않았다. 황자란 그저 당대에 황제가 낳은 수많은 자식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내겐 네가 듣도 보도 못한 변방의 황자일 뿐이지. 마족에 대해 네가 알고 있는 건 뭐가 있을까? 황국의 서부방면군이 몰살당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울토르가 패퇴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우리도 후속조치를 논의중이었다.”
“나온 결론은?”
“논의중이라지 않았나.”
“네 초라한 별궁이 잿더미가 될 때까지 논의만 할 작정이냐? 이런 국난상황에서 너 같은 소양부족의 지도자를 두고 있다는 게 신민들의 불행이로군.”
“말조심해라. 네가 정말로 에사인이라고 한들 그런 무례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는 내 인색한 평가에 기분이 상당히 나빠진 듯했다. 어깨 위로 아지랑이 같은 마력이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그러게 대접을 받고 싶었다면 처신을 잘했어야지. 돌려 말하지 않으마. 나는 네가 저지른 악행을 공론화할 수도 있다. 일황자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던데, 네가 형제의 피로 손을 더럽혔다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한걸.”
“...너는 방금 선을 넘었다.”
우르의 손바닥 위에서 강력한 기운이 솟구쳤다.
위이이잉.......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초고속으로 응축되었다. 크기는 야구공만 했으나, 담긴 위력은 터무니없었다. 별궁을 통째로 날려버리고도 남을 힘이었다.
“감히 에사인에게 대적하겠다는 거냐.”
“나는 직접 본 것 외에는 믿지 않는다. 내가 본 건 감당하지 못할 이야기를 나불대며 명을 재촉하는 버러지 하나일 뿐.”
우르가 삭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오르기보다 윗줄의 마법사였다. 대마법사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자가 있다면 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황제의 직계란 에신에서 가장 사기적인 혈통이었다. 그는 남들이 죽어라 노력해서 닿을 수 있는 경지를 숨만 쉬어서 도달했다.
다만 그는 에사인이 될 수는 없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했다. 그가 쌓는 모든 위명이 황제인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지기 때문에.
"좋아, 나도 말보다 이쪽이 더 편해.”
나는 그를 향해 응보의 족쇄를 시전했다. 타겟은 그가 사용중인 기술.
응보의 족쇄는 무조건적으로 단 하나의 기술을 봉인한다. 여러 제약이 붙은 내 기술들 중에서 유일하게 사전조건이 필요 없는 술법이었다.
“......뭐지?”
우르가 만들어낸 마력의 구가 산산이 흩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물끄러미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제이드처럼 기술 하나가 막혔다고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으나,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만큼은 확실했다.
“시시하군. 더 쓸만한 재주를 보여봐라.”
나는 그가 하찮다는 듯이 실소를 지었다. 우르는 충분히 다른 기술로 공격을 이어나갈 수도 있다. 전력으로 붙으면 망신을 당하는 건 내 쪽이 될 공산이 높았다. 개망신만 당하고 말면 좋게, 저잣거리로 끌려가 육포가 뜨이고 말겠지.
나로서도 목숨을 건 도박이다.
그래서 연기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 사람들이 오빠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두시면 안 돼요.
나는 소미가 주문했던 것에서 한 술 더 떴다. 이 순간 나는 무적의 울토르였으며, 심판의 그니르였다.
“덤비지 않을 셈이냐?”
나는 거만한 투로 그를 도발했다. 일부러 마력을 끌어올리지도 않았다.
이 순간 중요한 건 내게 그를 이길 능력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속이지 못한다면 남을 속이지도 못할 테니.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손을 내밀자, 그가 재빨리 방어마법을 시전했다. 어떤 구동어도 딜레이도 없는 데다가, 두껍기가 문짝보다 더할 수준의 듣도 보도 못한 방어술법이었다. 그는 겹겹히 둘러친 방벽 속에서 내게 덤덤히 말했다.
“좋다, 네가 에사인이라는 건 인정하지.”
“이제 와서 말이냐?”
“안 될 게 있나? 우린 지금까지 줄곧 대화를 나눴는데.”
“...그런가.”
“원하는 게 뭐냐? 내 과거나 캐내자고 만나자고 한 건 아닐 테고.”
“물론 내겐 원하는 게 있지. 지금 일곱 번째 권능의 자리가 공석일 터.”
“설마......네가 그 자리를 원한다는 것이냐?”
가면 너머로 그의 동요가 느껴졌다. 자신의 부정을 밝혀냈을 때보다 더 놀라는 것 같았다.
“그렇다. 나를 공석인 일곱 번째 권능으로 추대해라.”
그의 눈동자가 커지는 게 보였다.
그래, 이게 내 진정한 목적이다.
일곱 번째 권능에 등극하여 오데르의 가장 짙은 그림자, 우르술라를 내 그림자로 삼는 것.
“가능하지 않을 요구를 하는군. 일곱 권능이란 누가 원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언제까지 에사인의 죽음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케이드를 따르던 사제들이 모조리 실직했는데.”
“그들은 모두 서약을 한 몸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기가 섬기던 에사인의 소멸을 밝히지 않을 거다.”
“그렇게 믿고 싶겠지. 일곱 기둥의 한 축이 무너졌다는 걸 인정하면 황제신앙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말 테니까. 믿음이 곧 에사인의 전부가 아닌가? 에사인은 곧 이 나라의 전부인 것이고.”
“믿음이 전부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젠 네 번째 권능마저 공석이 되었지 않나. 이젠 몇 명의 입을 막아야할지 헤아릴 수조차 없겠군.”
나는 그를 비웃어주었다. 이 웃음은 진심이었다.
황국은 치명적인 구조적인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믿음으로 쌓아올린 세계이기에,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위선과 위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쇠락한 기존 질서를 끌어안고 멸망하던가, 새로운 질서를 추대하던가. 선택은 네 몫이다.”
나는 냉정하게 그를 몰아붙였다. 그는 팔짱을 끼고 오래도록 고뇌했다. 나는 그와 마주 팔짱을 낀 채, 타들어가는 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참 후, 그는 장고를 마치고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현실적으로 내겐 널 일곱 권능으로 만들 만큼의 권한이 없다. 나는 고작해야 여러 황자와 황녀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
“널리고 널린 황족은 아니지. 삼상회의 세 수장 중 하나이니.”
“설령 내게 삼상회의 수장이라는 지위가 있더라도, 일곱 권능이란 에사인의 필두가 되어 만방의 섬김을 받는 자리다. 내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있지 않다. 내가 귀족사회의 여론을 모아줄 순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 자리는 너 스스로 인망을 얻어내야만 해.”
“그래서 하는 말이다. 날 위해 스트리아령에 지원군을 보내라.”
“스트리아령에? 갑자기 말인가?”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중국을 물리치고 황국을 위기에서 구해낸다면, 만방의 섬김을 받을만하지 않겠나.”
“...과연.”
드디어 그가 납득했다.
나는 이졸데처럼 그에게 지원군을 보내달라며 빌 마음이 없었다. 그 같은 인간에게 저자세를 취하면 얕잡히기만 할 뿐. 나를 위해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게 이 회동의 목표였다.
“서두르는 게 좋아. 적이 당도할 때까지 길어야 닷새밖에 남지 않았으니.”
“닷새면 너무 이르군. 내가 알기로 스트리아령에는 군대를 투입할만한 포탈이 없다. 변방에는 수도와 직통하는 포탈을 설치하지 않는 게 법이다.”
물론 귀족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법이었다. 당장 우리부터 포탈을 통해서 왔으니까.
그러나 우리가 타고 온 귀족전용의 보안채널은 대군이 넘나들기엔 너무나도 비좁았다.
“그러니 소수정예로 지원을 나와야지. 어차피 약한 놈들은 발목만 잡을 뿐이야.”
“나는 군무를 담당하고 있지 않다. 내 권한으로 전선에 영향을 미칠 만큼의 정예부대를 움직이려면 게라르 형님의 동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형님은 내가 뭘 해보려는 걸 달갑게 여기지 않겠지.”
“네가 있잖나.”
나는 고갯짓으로 그를 가리켰다.
“뭘 고민해? 황제의 혈통께서 몸소 나서면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