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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84화 (84/205)

84화. < 정체성 (11) >

물론 그를 직접 만나볼 기회는 없었다. 그는 구중궁궐의 심처에 틀어박힌 황자이고 나는 일개 암살자에 불과했으니.

그는 내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어쩌면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저지른 짓들을 정확히 기억했다. 그가 어떻게 정적들을 막다른 길로 몰아갔고, 형제들을 하나하나 제거했는지. 다섯 째로 태어나 어떻게 이황자란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는지.

“황제께서는 하는 일이 없으시네요.”

소미가 신랄하게 평했다. 주변에 듣는 이가 없는지 확인한 후에.

“칩거한지 오래됐을 거야. 아까 시종이 한 말 있지? 폐하께서 어떤 분의 접견도 안 받는다는 멘트. 그거 거의 인사말이나 다름없을걸.”

“하지만 지금 나라가 망할 위기 아니에요? 이런 상황에서도 엉덩이가 무겁다는 건 너무 무책임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반대지. 위기일수록 황제는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해.”

“모르겠네요. 저는 너무 자기 체면만 따지는 것 같아요. 마치 조선시대 사람들처럼.”

“에신은 그 체면이 전부야. 믿음이 실체를 가지는 세계니까.”

“그럴까요...”

소미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천민 출신이기에 다른 환생자들과 달리 황제신앙을 가져보지 못했다.

황제신앙을 믿는 황국인에게 황제란 지고무상의 존재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답시고 황제가 여기저기 싸돌아다닌다면 그 자체로 더 큰 혼란을 야기할지도 몰랐다. 그땐 진짜 이 나라가 망하는가보다 싶겠지.

“그러면 저흰 이졸데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그냥 기다려야 할까요?”

“이졸데님은 실패할 거야. 개인적으로 이황자란 사람을 조금 알거든. 인맥 같은 걸로 움직일 성격이 아니더라.”

“황제는 체면이 우선이니 그렇다고 치고, 국사를 담당하는 황자가 우리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나요?”

“황자는 우리를 무시하지 않을 거야, 다만 버릴 수는 있겠지.”

“네? 버리다니요?”

“내가 아는 이황자는 확실하지 않은 승부에 카드를 낼 사람이 아니거든. 그 사람은 스트리아령을 제물로 삼으려고 할지도 몰라. 중국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아내기 위해 바치는 제물.”

“...안일한 판단이네요”

소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중국을 더 키워줘선 안 돼요. 그 나라를 시급히 막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어떤 변화도 불러올 수 없는 단 하나의 의식으로 합쳐지고 말거에요. 그건 닫힌 세계보다 더 끔찍한 세계일 테죠.”

“동의해. 그러니 우리가 나서야겠지.”

“오빠가 공화국의 왕이라는 걸 내세워서요?”

“아니, 닳고 닳은 암살자라는 걸 내세워서.”

나는 그녀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고고하신 황자님을 놀래킬 만한.

이졸데는 저녁 무렵에 돌아왔다. 그녀는 응접실 문을 열자마자 남방식 사투리로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아왔나 싶을 정도로 걸쭉한 욕설이었다. 그녀는 뒤늦게야 우리들의 존재를 눈치 채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전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만.”

나는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테이블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녀는 사양하지 않으며 의자를 빼서 앉았다.

“모멸적이었습니다.”

이졸데가 두 주먹을 쥔 채 분노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황자는 만나보지도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어떻게든 삼상회 귀족들과 만날 수는 있었습니다만, 대화 자체가 되지 않더군요. 그들은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평화에 절어서 위기에 대응할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아직도 일곱 에사인의 권능에만 기대면 뭐든지 저절로 해결될 거라고 믿는 듯했습니다.”

“그 간사한 놈들이 황자님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제 손으로 목을 치고 책임을 졌어야하는데...”

라드가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를 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황도 바깥에서 만났더라면 눈알을 뽑아버렸을 겁니다.”

아길리는 살기마저 뿜어내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미 쌍도끼를 꺼내서 손에 쥐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황도에서 이런 일은 일상이라는 것을. 셋 다 지위는 높으나 젊어서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혀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내일은 라티카 황녀님께 접견을 요청해볼 생각입니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친분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군무와는 거리가 먼 분이지만, 저희가 사람을 가릴 처지는 아닌 것 같더군요.”

일황녀 라티카 게네발은 이황자보다 더한 권모술수의 대가다. 황도에 본적을 둔 귀족치고 권모술수에 능하지 않은 자가 없으나, 황녀는 그들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이황자와 그녀의 차이점이라면 그녀는 오데르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암살을 하지 않고도 정적을 파멸시킬 줄 알았다. 더욱 비참하고 잔인하게.

그래서인지 귀족들은 이황자보다 그녀를 더 두려워했다. 그녀가 비호한다고 알려진 귀족에겐 암살의뢰가 접수되는 일이 드물었다.

“황녀님이 군무와 거리가 멀긴 하지만, 황자님께 압력을 행사하실 수는 있겠죠.”

“예. 하지만 저는 왜 이리저리 둘러가야 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군요. 공전의 적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말입니다. 이건 스트리아령을 버리는 패로 보겠다는 처사가 아닙니까?”

정확합니다.

나는 이졸데에게 차마 그렇게 말하진 못했다. 대신 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저녁 8시, 귀족들이 식사를 마칠 무렵이었다.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되었다싶었다.

똑똑.

누군가가 응접실의 문을 두드렸다. 시종이 응접실을 노크하고 드나들 리가 없으니, 외부인임에 분명했다.

곧 문이 달칵 열리며 젊은 귀족 몇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차림새만 보아도 상당히 지체 높은 가문의 자제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라힐님 계십니까?”

그들은 다짜고짜 내 이름부터 불렀다.

“전하께 무슨 용무이십니까?”

오르기가 나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오르기는 내 신분을 그들에게 각인시키려 일부러 나선 듯했다.

“이황자님께서 면담을 청하셨습니다.”

“이황자님께서요?”

이졸데가 놀라서 되물었다. 라드와 아길리는 입을 벌린 채 나와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부재중이실 때 황자님께 따로 연락을 해두었습니다. 과거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 무시하지 못했나봅니다.”

“과거의 인연...역시 그랬군요.”

이졸데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과거를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틀림없었다.

대영주의 신분으로는 귀족 연합체, 삼상회의 원로들을 만나는 게 고작이었다. 대영주가 그러할진대 영주는 더욱 내세울 게 없었다. 그들은 황녀와의 만남에도 큰 기대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국왕이라고는 하지만 도시 하나만도 못한 세력을 이끄는 내게 황자가 다이렉트로 만남을 요청해왔으니 놀라 자빠질 수밖에.

그러나 그들의 놀람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언제 어디서 뵙자고 하십니까?”

“지금입니다. 밖에 탈것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이황자님의 별궁으로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아직 잔을 비우지 못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잠시 바깥에서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그들이 벙 찐 표정으로 반문했다. 내 말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 이황자의 청을 뒤로 물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하느니 차라리 귀를 의심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직 자리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불편하시면 그냥 내일 뵙자고 할까요?”

“아, 아닙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들이 서둘러 응접실을 떠났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찻잔을 들어 조신하게 한 모금 홀짝였다.

“라힐님, 죄송하지만 이래도 괜찮을지.......이황자께서는 그리 인내심이 많은 분이 아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졸데가 불안한 투로 말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쪽이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줘야죠. 당한 게 있으시잖습니까.”

“하지만 저를 박대한 건 이황자님이 아니라 삼상회였습니다.”

“이황자를 따르는 삼상회죠. 애초에 황자가 대영주들을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으니 아랫사람들이 그러는 겁니다. 본 게 그것뿐이라서요."

“그래도 아쉬운 건 저희인지라...”

“나라가 망할 판국에 아쉬울 사람이 따로 있겠습니까.”

나는 느긋하게 차를 홀짝였다. 주변 사람들만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오르기는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 짙어 이러다가 오데르의 하수인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역시 오빠답네요.”

여기서 내 의도를 이해한 건 소미가 유일했다.

“아까 에신은 체면이 전부라고 했죠. 대등하게 협상을 하려면 오빠가 황자에게 꿇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믿음부터 보여줘야죠, 맞죠?”

“맞아.”

“오빠는 벌써 정치인 다 되셨네요. 얼마 떨어져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네 분야와 비슷해. 연예인도 우리와 다를 게 없는 사람인데, 포장을 잘 해놓으니 과분한 사랑을 받잖아.”

“맞아요, 포장기술이 핵심이죠.”

소미가 스스럼없이 웃었다. 나는 그녀와 잡담을 나누며 약 이십여 분을 하릴없이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이졸데가 압박감으로 질식하기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다녀오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물어오도록 하죠.”

나는 응접실 문을 홀로 나섰다. 고삐를 채우고 안장을 씌운 괴조가 포장도로 위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타시죠, 이제 가셔야합니다.”

귀족들이 안절부절 못하며 내게 자리를 권했다. 괴조는 나를 태우자 호기롭게 괴성을 지르며 하늘 위로 훌쩍 날아올랐다. 주변 풍경이 삽시간에 장난감마냥 작아졌다. 나는 발치 아래 펼쳐진 장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선형으로 꼬인 일곱 개의 기둥이 상아색 왕성을 떠받치고 있었다. 저것이 그 유명한 7만 7777개의 계단과 질서의 성이다.

조형의 아름다움은 둘째 치고, 규모에서부터 압도되었다. 마침 황혼이 드리울 때라 왕성 벽이 층층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흡사 천국을 발아래 둔 것만 같았다.

뒤늦게야 소미를 데려왔어야 한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녀가 있었더라면 남은 휴대폰 배터리를 여기서 다 썼을 텐데.

괴조는 나를 별궁의 높다란 탑 안에 내려놓았다. 마치 비행전단이 연착륙을 하듯 뒤따르던 탈것들이 속속 탑 안으로 날아들었다.

“이쪽입니다.”

귀족들은 나를 황자의 별실 앞까지 안내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셔야합니다.”

그들은 나를 복도에 남겨두고 물러났다. 나는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며 잠시 각오를 다졌다.

긴장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세계의 중심권력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될 순간이었다.

황제가 칩거한 이상 이 나라 최고권력은 황자와 황녀들이다. 그들은 삼상회란 것을 조직하여 국정을 오래 전부터 뜻대로 좌지우지해왔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우르 게네발.

예전에 울토르와 조약을 맺을 때, 재벌가와 혼약 이야기가 나왔던 그 자다. 성미가 급하고 잔인하며, 오데르의 검을 자기 수족처럼 부렸던 자.

내가 그에게 제거됐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자신의 죄가 알려지길 원치 않았다. 오데르의 자식들은 결코 의뢰인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지 않지만, 그는 그래도 나를 없애야만 완전범죄가 성립한다고 여겼다. 그는 나름대로 완벽주의자라고 할 수 있었다.

끼이익.......

나는 가만히 문을 열어젖혔다. 창문을 열어뒀는지, 차가운 바람이 다가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황자는 방 한가운데 홀로 서있었다. 방이 너무 넓어 어디를 한가운데라고 칭해야할지 정확하진 않았으나,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드디어 왔군. 날 기다리게 하다니 대단한 배짱이야.”

황자는 가면을 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황족, 특히 남성 황족이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가리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아버지인 황제와 생김새가 판박이였기 때문에.

지고무상한 존재의 얼굴로 인간 노릇을 하는 게 불경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늦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돌아가신 내 둘째 형님에 대한 진상을 알고 있다던데. 이미 수년 전 장례를 치르고 영면에 든 황족의 죽음에 대해 주절주절 떠드는 게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 네 보잘것없는 삶에 어떤 결과를 불러들일지 알고 있나.”

섬찟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는 강력한 마법사이기도 하지만, 이 기세는 그의 권위가 만들어낸 압력이었다. 수십억 명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며 자연스레 체득한 아우라라고나 할까.

“잘 알고 있다, 우르 게네발.”

나는 그의 살기를 받아내며 조용하게 대답했다. 나는 일부러 그에게 경어를 쓰지 않았다. 이때 만들어진 인상이 에사인으로 향하는 나의 여정을 좌우할 것이다. 소미가 가르쳐준 쇼 엔터테인먼트적 자질을 남김없이 발휘해야 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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