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정체성 (10) >
황도는 대륙 최대의 도시이자 황제신앙의 성도였다. 강력한 에사인과 광신적인 추종자들이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자에 깃들어 숨어다니던 전생에서는 도시 문턱에 발을 붙여보지도 못했다.
“좋습니다, 준비가 되면 불러주시죠.”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진짜 괜찮겠어요?”
소미가 작게 속삭이며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직까지도 나는 황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있다. 황제는 어둠의 자식들을 지속적으로, 꾸준히 이 세계에서 배제시켜왔다. 내가 죽었던 것도 황제와 무관하진 않았다.
그러나 전생의 일은 전생의 일이다. 황도에 발 한 번 붙여보지 않고 어떻게 공화국 수장 노릇을 하겠어.
“감사합니다. 경들도 수행에 나서주면 도움이 되겠는데, 혹시 이 짧은 여정에 합류할 분이 있는가?”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기엔의 아들 라드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그를 필두로 여러 젊은 영주들이 앞 다투어 나섰다.
“그만, 그만하면 됐다.”
이졸데가 엷게 웃으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기엔의 라드, 탈라로른의 아길리. 두 사람은 곧장 떠날 차비를 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라드가 기운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이졸데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충성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게, 아버지가 대영주의 목숨을 위협한 역적임에도 불구하고 이졸데는 그를 아무런 사심 없이 중용하니.
“알겠습니다, 대영주님.”
아길리는 초면이었다. 그녀는 용맹의 에사인 다가트의 열성적인 신도였다. 그것은 그녀가 시선을 어디 둬야할지 모를 정도로 민망한 옷을 입었기 때문에 쉽게 유추가 가능했다. 가느다란 끈으로 이어진 초미니 비키니가 구릿빛으로 그을린 탄탄한 몸매를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털가죽 망토만이 유일한 의복 같은 의복이었다. 망토 뒷자락에는 커다란 도끼머리가 좌우 쌍으로 교차되어 대롱거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힐 전하.”
그녀가 기쁨에 찬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올렸다. 갈기처럼 거칠게 기른 금빛 머리카락이 가슴 위로 치렁치렁하게 늘어졌다. 나는 시선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쓰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가트의 신도들은 헐벗을수록 방어력이 증가했다. 그런 특성 때문에 다가트를 신봉하는 큰망치 전사단에는 여성이 매우 드물었는데, 일개 귀족도 아니고 영주가 다가트의 신도를 자처하는 건 정말이지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상으로 대회의를 마치겠다. 경들은 영내를 벗어나지 말고 남아서 군대를 정비하도록.”
이졸데가 산회를 선언했다. 그녀는 대전사인 요론과 함께 곧장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정기호.”
“불렀나.”
정기호가 팔짱을 낀 채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었던 권력을 놓아주고서도 느긋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여긴 네게 맡긴다. 혹시 내가 돌아오기 전에 전투가 시작되거든 절대 무리하지 말고 시간만 끌어.”
“알겠다.”
그는 전직 황국군 장교로서, 군사이론에 관한 한 우리들 중 최고의 전문가였다. 물론 그가 복무했던 황군과 각종 현대식 화기로 무장한 크록군이 같지는 않겠으나, 나 같은 선무당이 지휘하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료헤이, 너는 남아서 정기호를 도와. 편제상 네 직속상관이다.”
“그랬군.”
료헤이가 미스테리가 풀렸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절 두고 간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소미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조바심을 내며 말했다.
“정팀장님은 대귀족 출신이시니까 황도에 질리도록 가보셨을 테지만, 저는 얘기만 들어본 게 다에요.”
“무슨 얘기?”
“다들 아시잖아요. 살아서는 닿지 못하는 7만 7777개의 계단, 질서의 궁, 카둔의 성소와 영광의 용광로...”
그녀가 꿈을 꾸듯 아련하게 읊조렸다. 정기호가 무심한 투로 끼어들었다.
“황도는 사람이 아니라 질서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막상 가보면 스트리아 같은 변방이 얼마나 자유롭고 인간적인 곳인지 알게 됩니다.”
“알아요, 그런 환상이 얼마나 덧없는지. 그래도 제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꿈을 꿔볼래요. 황도는 모두가 행복한 파라다이스일 거라고. 그게 불운했던 전생의 삶에서 유일한 희망이었거든요.”
“희망을 계속 간직하려면 안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젠 저도 어른이 되어야죠.”
“어차피 같이 가달라고 부탁하려던 참이긴 했어. 그니르가 신경 쓰여서.”
그니르는 지난 천 년간 새로운 에사인이 탄생하는 걸 막아왔다. 황도는 황제신앙의 근거지이니만큼 놈의 추종자들도 우글거릴 터였다.
"참, 그니르를 잊고 있었네요. 그 찌질한 에사인.”
"말조심해, 누가 들을지도 모르니까.”
“아무리 그니르라도 황제가 지켜보는 곳에서 날뛰진 못하겠죠. 그렇죠, 오르기님?”
“제 어머니께서 그니르의 추종자들에 의해 돌아가신 곳이 황도입니다.”
오르기가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다운되고 말았다. 소미는 당황했는지 오르기의 어머님도 어딘가에 환생해서 살아계실 거라는 둥 무리수를 잇따라 두었다.
“오르기님, 당신도 저와 함께 갑니다. 저희는 마법을 모르니, 마법으로 치는 장난질은 오르기님이 살피셔야합니다.”
“언제나 주군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오르기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제이드와 싸울 때, 흥분해서 마력조절에 실패했던 일을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듯했다.
“수석마법사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었다. 이졸데는 영주들에게 약을 팔 때 몇 가지 오류를 저질렀다. 소미를 전사라고 말한 점, 오르기를 누락한 점.
소미가 주술사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 자라면, 오르기는 차세대 마법을 선도할 인재였다. 나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이 부끄러움 많은 청년이 향후 세상을 덮을 거목으로 자라나는 걸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우리는 떠날 준비를 마친 뒤 대영주의 궁에서 다시 모였다. 수행역을 자처한 라드와 아길리가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라힐님,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대영주님께서는 지휘권 문제로 조금 늦으신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아길리가 살갑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여전히 헐벗은 차림이었다. 허벅지 근육이 꿈틀거릴 때마다 다가트의 문신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충만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었다.
“전선에서 전하의 곁에 서게 되는 미래를 고대했습니다. 곧 그 꿈이 이루어질 것 같아 기쁩니다.”
“저도 등을 맡길 수 있는 훌륭한 전사와 함께해서 기쁘군요.”
“제겐 감히 전하의 등을 맡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야즈님과 카룩카이님이 계시는 이상은요.”
“카룩카이를 아시나봅니다.”
“예,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제 쌍도끼를 정면에서 막아낸 분은 야즈님 이래로 처음이었죠.”
“...카룩카이와 비무를 해봤다고요?”
“예."
그녀가 생각만 해도 뿌듯하다는 듯이 가슴을 활짝 펴며 대답했다.
“그분께 전하의 활약상을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다르마알의 아바타를 물리친 이야기, 흉신 마그나크록을 토벌하신 이야기, 성문이 뚫리는 걸 막기 위해 거인의 머리 위로 뛰어내린 이야기, 모든 이야기가 제가 어릴 적 전사의 길을 소망하며 읽었던 영웅설화를 까마득히 뛰어넘는 위업이었습니다. 과연 카룩카이님 같은 위대한 전사가 따를만한 주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나는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운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내 팬이었다. 옷차림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내게 생긴 첫 팬이라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맹목적인 추종자들은 제법 거느렸으나, 내 행적을 정확히 알고 좋아해주는 사람은 드물었던 것 같았다.
“아길리님은 탈라로른...의 영주라고 하셨던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진 영지이기에 이름만 남았을 뿐입니다.”
“사라졌다고요?”
“점령당했습니다, 중국에게. 아직 생존자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아......."
어렴풋이 기억났다. 울토르가 서부전선에서 군대를 물리는 바람에 점령당했다던 세 개의 도시,
아반, 탈라로른, 다이나르.
아길리는 그 셋 중 하나, 탈라로른의 후계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다르마알이 포탈을 연 나비효과로 가족과 삶의 터전을 모조리 잃고 말았다.
“위로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도끼가 중국놈들에게 몇 배의 응보를 돌려줄 겁니다.”
아길리가 씩씩하게 말했다. 그녀는 다가트의 신도답게 절망을 굴하지 않는 투기로 바꿔낸 듯했다.
“대영주님께서 드십니다!”
곧 이졸데가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수행원들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포탈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우리를 궁 상층에 위치한 구석진 쪽방으로 데려갔다. 쪽방에 설치된 포탈 골조는 우리 베이스캠프에 있는 것보다 좁아보였다. 이것은 군대나 물자의 이동을 위한 통로가 아니라, 상급귀족을 위한 보안채널이었다. 귀족들은 이렇듯 마법의 이기를 독점하여 암살위협을 유유히 피해가곤 했다.
“포탈을 가동하겠습니다.”
낯익은 마법사가 포탈 앞에 서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는 얼마 전에 사피스와 함께 공화국을 찾아왔었던, 자칭타칭 백 년만의 천재 발카사르였다.
위이이잉......
“...가동되었습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머지않아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은 철제 골조가 일그러진 장막에 뒤덮였다. 발카사르는 오르기를 일별하더니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못 보던 사이 그는 상당히 얌전해져있었다.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쯤 광 팔 타이밍이었는데 말이지.
곧 이졸데의 망토자락이 장막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녀를 뒤따라 두 번째로 포탈 안으로 진입했다.
순식간에 주변 광경이 전환되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여러 미술품과 조각상이 가득한 응접실이 나타났다.
"와아."
뒤에서 소미의 감탄이 들려왔다. 스트리아령도 돈이 아쉬운 영지는 아니었으나, 황도에 견주자면 초라한 감이 있었다.
“귀인께서는 소속과 신분을 밝혀주십시오.”
흰 예복을 입은 시종이 공손하게 말했다. 큰 눈이 똘망똘망한, 귀여운 인상의 청년이었다. 황성쯤 되면 일개 시종도 최소한 하급귀족의 자제 정도는 되어야만 맡을 수 있었다.
“스트리아에서 온 이졸데다. 동행인들의 신분은 내가 보증하겠다.”
“스트리아의 대영주님이셨군요. 황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시종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예를 올렸다.
“황제폐하를 뵙고 싶은데, 절차를 알아봐줄 수 있겠느냐?”
“송구하오나 폐하께서는 현재 어떤 분의 접견도 받지 않으십니다. 국사는 일황자 게라르 게네발님과 이황자 우르 게네발님께서 대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황자님을 뵙겠다. 서부전선과 관여된 시급을 요하는 사안이니 지체하지 말아다오.”
“그리 전하겠습니다. 좌측의 문은 귀빈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디 편히 머물러 주십시오.
시종이 자리에서 물러나 응접실을 떠났다. 이졸데는 초조한 듯이 응접실을 종횡으로 돌아다니다가, 뭔가 결심했는지 내게 다가와 말했다.
“편하게 머무르라는 말은 하루 이틀 걸린다는 소립니다. 황도 사람들 화법이 저렇습니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부득이하게 아버지의 인맥을 동원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방법을 강구해볼 테니, 그 동안 여러분께서는 편히 머무르시죠."
이졸데도 수행원들을 몰아 응접실을 떠났다.
나는 가죽 소파에 앉아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우르 게네발.
드디어 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되었다. 그는 오데르의 제일가는 단골이자, 마지막 임무를 마친 내게 추살명령을 내렸던 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