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정체성 (9) >
“이대로 지켜만 볼 순 없겠죠?”
소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코가 석자인데 다른 나라까지 챙길 순 없지.”
“하지만 ..일본은 우리 이웃나라잖아요. 망하는 걸 두고만 봤다간 한국도 휘말리고 말 걸요.”
“그 나라도 우리만큼의 양심이 있다면 좋을 텐데.”
“어쩌겠어요. 언젠가는 착해지겠죠.”
소미가 푸념 섞인 투로 말했다. 나는 깐깐하게 굴면서도 일본을 도울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킬데인은 곰팡이 같은 존재였다. 한 번 뿌리를 내리도록 두면 국경을 가리지 않고 독버섯처럼 퍼져나갈 것이다.
“공식적으로 경고를 보내자. 정신 바짝 안 차리면 살아있는 좀비 떼한테 점령당하고 말 거라고.”
“경고는 그쪽 환생자분들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의 전령이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건...”
“환생자들은 나처럼 일반인으로 살다가 특채된 공무원이 대부분일 테니 국가 전체를 움직일만한 힘이 없겠지. 외교채널로 메시지를 보내면 알아들어먹을 거야.”
나는 일부러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았다. 우리에겐 정말이지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각자가 자신의 몫을 해줘야만 할 때였다.
“자, 군체의식을 상대할만한 묘수를 가지고 계신 분?”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정기호는 천장을 바라보며 담배연기만 뻐끔뻐끔 피워 올렸다. 나는 나대로 생각에 잠겼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십 년 전에 봤던 영화가 떠오르는군.”
문득 정기호가 서두를 열었다.
“어느 날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했다. 지구인은 외계의 우월한 기술력을 당해내지 못했지.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와중에, 인류는 외계 모선에 침투해서 조종실 컴퓨터를 해킹하는 데 성공한다.”
“잠깐만요, 외계인 컴퓨터를 어떻게 해킹해요? 방금 외계인이 우월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는데.”
정기호는 소미의 태클을 못 들은 척 흘러 넘기며 설명을 계속했다.
“모선이 해킹되자 작은 비행선들은 힘을 쓰지 못하고 격추되고 말았다. 결말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여차저차해서 미국이 N번째로 세계를 구했다는 할리우드식 마무리였던 것 같군.”
“...그래서?”
“그 중국인이 자신들은 평등하다고 말했지. 하지만 내 경험상 어떤 조직도 머리가 없이는 똑바로 굴러가지 못한다. 한 번 이런 가정을 해보자는 거다. 그들에게 모선에 해당하는 컨트롤타워가 존재하고, 나머지는 컨트롤타워의 필요에 따라 쓰이는 장기말일 뿐이라고.”
“그놈이 거짓말을 했다고?”
“그랬을 수도 있다. 지금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좋다. 네 권능이 그놈들을 대상으로는 잘 먹히지 않는 것 같으니.”
나는 정기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내 권능은 양심과 도덕을 잣대로 삼는다.
하지만 수십 수백만의 자아가 합쳐진 초자아에게 양심이라는 게 존재할까? 그들에게서 죄업이 감지되지 않았던 건 그들이 도덕이나 윤리를 완전히 초월해버린 탓이 아닐까?
“나는 장기말끼리도 서로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네 부하가 잡아온 놈은 약해서 정찰병으로밖에 써먹지 못하겠지만, 군대가 그런 쭉정이들로만 채워져 있다면 어떻게 전투를 치렀겠나.”
“일리가 있는 말씀 같아요. 아무리 자아를 공유한다고 해도 사람마다 가진 능력의 한계는 다르기 마련이잖아요. 능력이 다르다면 쓰임새도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쓰임새가 달라지는 순간 서로가 공평하다는 말은 말장난밖에 안 되는 거죠.”
“그렇다면 굳이 내게 말장난을 걸어온 이유가 뭘까.”
“첫째, 오빠를 잠재적인 흡수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죠. 최대한 좋은 인상을 남겨서 자발적인 합류를 바라게끔.”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둘째는?”
“팀장님이 말씀하신 그 컨트롤타워? 그걸 지키려는 게 아닐까요. 머리가 당하면 손발은 알아서 떨어져 나갈 테니까요.”
“그럴듯하긴 해.”
나는 소미의 가설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게 영화시나리오였다면.”
“...역시 무리수일까요?”
“머리만 쳐내니 알아서 전부 자빠지더라. 그렇게 간단할 상대 같았으면 울토르가 당하지도 않았겠지.”
“울토르님이 당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무적이십니다.”
내내 침묵을 지키던 오르기가 힘주어 말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 울토르를 거론할 때엔 확신이 넘쳤다.
“......정말로 당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는 몇 초를 버티지 못하고 풀죽은 투로 되물었다.
“모르죠. 북풍의 전사단이 울토르와 함께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으니.”
울토르에게 직접 힘을 하사받은 북풍의 전사단이라면 진실을 알고 있겠지만, 그들은 서부전선의 궤멸과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크록 정찰병의 영상에 찍힌 전사는 미쳐버린 듯하고.
“의미 없는 말들이 넘쳐나는군.”
료헤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구석진 의자에 앉은 채 손수건으로 검날을 닦는 중이었다.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냐?”
“너희들은 군체의식이란 걸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 중국은 내세울 게 인구 말고는 없는 나라다. 그 많은 인구가 더 강해졌다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는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개성이 없던 나라가 더 몰개성해졌다는 것 말고는 바뀐 게 없지 않나.”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료헤이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검날을 비추었다. 잘 닦인 검날이 햇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번뜩였다.
“벤다.”
그의 목소리에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게 장기말이건 머리건, 내 앞을 가로막는 놈들을 모조리 벤다. 베고 또 베다보면 머지않아 밑천을 보게 되겠지.”
그는 진심으로 살기에 충천해있었다.
“일단 부딪혀봐야 알 것 같다.”
정기호도 료헤이의 의견을 부분적으로 거들었다.
부딪혀봐야 알 것 같다는 말엔 나도 동의했다. 현재로서는 판단의 근거가 적이 일방적으로 던져준 떡밥밖에 없으니.
긴급히 소집된 2차 대회의는 전보다 훨씬 흉흉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군체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영주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난상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생산적인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울토르의 본대가 패퇴한 시점부터 그들은 모든 희망을 내려놓은 듯했다.
이졸데는 큰망치 전사단장 요론의 호위를 받으며 단상 위 왕좌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말없이 영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다가 토론의 주체가 누구를 먼저 피난시키느냐로 옮겨가자, 마침내 그녀가 목소리를 내었다.
“조용히들 하라.”
이졸데의 삼백안이 영주들의 기선을 내리눌렀다. 연인이자 정적이었던 이판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며 그녀의 권한은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그녀는 좌중을 완전히 제압한 뒤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알기로 우리는 아직 적과 대면하지 못했다. 영지를 버리고 떠나는 건 우리가 가능한 수단을 모두 취한 뒤 고려해도 늦지 않다.”
그녀의 낭낭한 목소리가 대전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항복도 안 될 말이다. 적의 능력이 라힐님께서 말씀하신대로라면 우리는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정체성을 잃게 된다.”
“다가트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이 겁쟁이들의 골통을 중국놈들보다 먼저 쪼개버렸을 겁니다.”
요론이 껄껄 웃으며 영주들을 조롱했다. 영주들의 심기가 불편해졌으나, 그들은 정기호와 이졸데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자리에서 대영주 직속 전사단장을 성토할 만큼 간이 크지 못했다.
“대영주님, 저를 선봉으로 임명해주십시오. 당장 출진하여 저 간악한 마족 수괴의 목을 베어오겠습니다!”
물론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충성주의자도 존재했다. 한 영주가 과격한 동작으로 무릎을 꿇으며 피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졸데는 왼손으로 턱을 괸 채 미적지근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경은 자신이 있는가보군.”
“검술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울토르님과 겨루더라도 말인가?”
“그, 그건 아닙니다만…”
그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을 더듬었다. 그는 이졸데가 그런 류의 무책임함을 얼마나 경멸하는지, 왜 기엔이 즉결처분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귀공의 용기는 높이 사겠으나, 내겐 내 병사를 사지로 몰아넣는 취미는 없다. 적을 알지 못하고 시작하는 싸움은 필패한다. 우리는 카룩카이님의 정찰결과를 확인할 때까지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졸데가 뒷말을 잡아끌듯 늘였다.
“전략을 세우기에 앞서서 판단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서부전선을 궤멸시킨 적을 주체적으로 상대할 역량이 있느냐는 점이다. 내 판단으로는 없다는 것인데, 이점은 경들과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더군.”
그녀의 시선이 내게 날아들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든든한 우군이 함께한다. 라힐님께서 공화국 휘하 군대를 지원하겠다고 약조하셨다. 여러분들도 들어 알고 있겠지만 라힐님의 군대는 전원이 크록으로 이루어진 일당백의 강군이다.”
영주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이졸데는 약을 파는 걸 멈추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고무적인 사실은 여기 계신 라힐님과 소미님께서 에사인에 근접한 위대한 전사라는 점이다. 지난 천 년간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 경지에 오르신 분들이다. 기엔 영지에서 라힐님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다들 알고 있을 터.”
영주들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소미는 한 손을 가슴 위에 얹으며 우아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쇼 엔터테이너답게 범접하지 못한 경지에 오른 주술사 역을 훌륭히 소화하는 중이었다.
에사인 중의 에사인, 무적의 울토르를 찜 쪄 먹은 군대가 왜 되다만 에사인 둘을 못 당해내겠냐만, 그들에게는 잡을 지푸라기가 절실했다. 아무런 희망 없이 전쟁을 치를 순 없었다.
“라힐님, 저희에겐 삼십만의 정병이 있습니다. 예비대까지 동원한다면 닷새 안에 십만을 더 편성할 수 있겠습니다만, 유의미한 전투원은 아닙니다.”
예비대란 밭 갈고 가축을 치며 생업에 종사하던 농부들에게 창이나 쇠스랑 따위를 쥐어주는 걸 가리켰다.
“예비대는 만약을 위해 후방에 남겨두는 게 좋겠습니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군대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요론과 귓속말을 몇 마디 나누더니, 자세를 바로하며 내게 물었다.
“저희가 놓치고 있는 점이 더 있을까요?”
“중국이 얼마나 많은 현대전 무기..마족의 기계를 가져왔는가를 보고 판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관총 정도만 있더라도 평지에서 벌이는 회전은 어떻게든 피해야겠지요.”
나는 머리를 더 굴려보았다.
“그리고, 포로로 잡힐 것에 대비하여 병사들에게 강도 높은 정신교육을 실시할 필요도 있겠습니다. 사회주의의 허구성에 대해 충분히 알려서 적의 세를 불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죠. 여러분들은 사회주의에 대해 잘 모르실 테니 이건 저희가 도와드려야겠습니다.”
“혹시 저와 함께 황도로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나는 뜻하지도 않던 말을 듣고 반문했다.
“전황이 여의치 않으니만큼 황제폐하께 사정을 고하고 지원을 부탁드릴까합니다. 허나 저희는 군체의식이란 것도, 중국군이 가진 능력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라힐님께서 함께해주신다면 폐하와 귀족들을 설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황도와 직통하는 포탈이 있으니 당장에라도 다녀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