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 정체성 (8) >
마치 연기를 하는 듯한 저 어색한 웃음, 감옥에서 봤던 포로와 판박이였다.
“또 만나다니, 무슨 소리냐.”
나는 답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되물었다.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것으로도 좋겠으나, 너는 그 정도로 아둔한 인간이 아니었을 텐데.”
그가 나를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탐색하는 듯한 시선 또한 앞서 만났던 자와 똑같았다.
정체성.
드디어 미스테리가 풀렸다.
그는 앞서 만난 중국인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거대한 하나의 의지로 통합되었다. 하나의 중국이란 말이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들에게는 개별적인 정체성이 존재치 않았다.
“미친놈들...”
욕설이 절로 나왔다. 암살자 노릇을 해오며 볼 것 못 볼 것 없다고 자부하는 몸이었으나, 이것만큼은 선을 넘어섰다.
“드디어 이해한 모양이로군.”
그가 태평하게 말했다. 나는 죽어가던 중국 병사가 그토록 여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의 몸은 족쇄에 묶인 채 퀴퀴하고 냄새나는 지하 골방에 갇혀있었으나, 정신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거대한 의식과 줄곧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이런 짓거리를 벌여온 거냐.”
“이런 짓거리라 함은 어떤 걸 말함이냐.”
“네 미친 짓 말이다! 언제부터 개체의 자유의지를 빼앗아온 거냐!”
나는 그의 멱살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마력의 발산을 억제하기 힘들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앞서 남자도 나이가 삽십대였고, 이 자도 서른 안팎.
이들에겐 한때 독립된 개체로서 살아온 삶이 존재했다. 부모도, 자식도, 함께 술잔을 나눌 친구들도 있었을 테지만, 이제는 모든 게 무로 돌아가고 말았다. 강력한 주술사가 개개의 존재를 흡수통합해 버렸으니.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모르겠군. 진정해라. 네가 멋대로 판단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지극히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평온하고...행복하다고?”
“네 모습을 돌이켜보아라. 숨결이 거칠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나’는 적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는데도 동요하지 않지.”
“그야 너는 여기서 죽는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니니까.”
“정답이다.”
그의 입가가 조금 더 크게 썰룩였다.
“우리는 너희를 동정한다. 우리는 아직 우리가 되지 못한 개별 자아들을 동정한다. 너희는 존재가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공포,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불안, 그로 인해 파생되는 질시, 반목, 슬픔 등, 개별 자아들이 빚어내는 수많은 불협화음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너희에게 삶이란 곧 고통이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마치 네게 합쳐진 사람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그랬다는 듯이.”
“자발적인 의지였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지.”
나는 그의 멱살을 더 강하게 틀어쥐었다.
그는 지금껏 내가 만나왔던 악인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괴물이었다. 집단의식이란 집단살해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자발적인 의지로 하나가 되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차분하게 올려다보았다.
“인민은 모두 평등하며, 재화는 적소에 공평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동의했다.”
“이상적인....사회주의 국가라고?”
“그렇다. 과거 사회주의적 이상향을 건설하려던 실험이 실패했던 이유는 개별개체의 욕망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남보다 더 부유해지고 싶은 욕망, 타인을 조종하려는 야망, 그러한 개별개체의 탐욕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사회주의란 공허한 이념으로만 남을 뿐이다.”
"......."
이상적인 국가의 건설을 위해 개체의 자유의지를 내려놓는다니.
우리나라라면 농담도 되지 못할 소리가 중국에서는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게 무서웠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 모두가 만족한다. 우리는 이제 평등하며, 재화는 적소에 공평하게 배분되고 있다.”
“정말로 만족한다면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너희는 패권국가를 지향하지 않나. 집단이 되었어도 다른 집단보다 부유해지려하고, 다른 집단을 이겨서 조종하려 든다면 모처럼 개인의 속성을 내려놓은 의미가 없지 않나? 너희는 덩치만 클 뿐 또 다른 형태의 개인이 아닌가?”
“날카로운 분석이다. 네가 우리에게 합류한다면 우리의 무력과 지적인 수준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라. 모가지를 꺾어버리기 전에.”
그의 시선이 왜 기분이 나쁜지 알 것 같다. 그의 눈은 크나큰 의식의 바다에 정보를 업로드하는 창구였다. 이 순간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에게 나란 인간의 정보가 전해졌을지 상상하니 소름이 돋았다.
“물론 집단으로서 하나가 되었다는 게 우리가 완전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외부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있다. 우리의 생존에 위협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고, 유능한 개체를 끊임없이 흡수해 집단으로서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게 우리의 당면한 과제다.”
“결국 다른 나라에 민폐를 끼치겠다는 거 아니냐. 개인으로 하던 일을 집단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하겠다는 소리네.”
“다른 나라라는 게 굳이 존재해야 하나?”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집단이 되어서도 여전히 갈등과 반목이 존재한다면, 개인을 통합했듯이 집단도 통합해버리면 그만이다.”
...환장하겠네.
일본은 애교였다. 중국은 드디어 전체주의적 사고의 종착점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군체의식.
끊임없이 재생하는 히드라를 죽일 수 없듯이, 개별의식을 공유하는 군체를 모조리 쳐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중국인 숫자가 오죽 많나. 그 많은 중국인이 모조리 군체의식에 합류했을 것 같진 않으나, 뉘앙스로 짐작컨대 적은 숫자가 합쳐진 것도 아닌 듯했다.
“에사인도 마찬가지다. 이 땅에는 너무 많은 에사인이 난립하고 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상징성을 내세우며 사회 통합을 저해하고 있지. 하나의 중국은 그들 또한 포용할 것이다.”
에사인마저 통합하겠다고.
왜 이게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는 걸까.
군체의식은 최강의 에사인이라는 길레악을 무력화할수 있다. 길레악은 마음을 조종하는 힘만으로 첫 번째 권능의 자리에 오른 자다. 그러나 개별개체의 마음을 조종하는 능력이 군체에겐 아무런 효과가 없으리라는 게 자명했다.
당장 내 권능인 죄업을 읽는 능력이 그들에게 작동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두려운가?”
그의 입가가 또다시 씰룩였다. 나는 점점 그, 아니, 하나의 중국이란 존재가 참기 어려울 만큼 거슬려지는 중이었다.
“정찰에 열심이더군. 너희가 바라마지않는 정보를 주도록 하마. 우리의 본대는 이곳에서 도보로 닷새 거리에 도달해있다. ‘무적의’ 울토르를 격파한 바로 그 부대지.”
“울토르는 어떻게 됐냐.”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냥 불어, 인내심 테스트하지 말고.”
“네 협박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너희들의 저항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가 되던가, 도태되던가.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다.”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웃었다. 그는 내게 심리전을 걸어오는 중이었다. 나는 그 강인해 마지않던 북풍의 전사가 왜 넋이 나가버렸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 정체성...
북풍의 전사는 울토르를 따라 대륙을 가로지르며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 죽음은 그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정체성이란 말 한 마디밖에 읊조리지 못할 만큼 넋이 나간 이유는 죽음보다 더한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믿어 마지않던 동료들이 거대한 하나의 의지에 합류하는 모습을 보았음에 틀림없었다.
“재밌네.”
나는 그에게 뒤틀린 미소를 띄웠다.
“...너희는 한 가지 실수를 했어. 술법을 겨룰 때는 자기 패를 함부로 까면 안 된다는 거.”
나는 그의 멱살을 거칠게 풀어주었다.
“술법의 대결이 아니라 대의의 대결이다. 대의가 우리에게 있는 이상 너희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마음대로 생각해. 곧 주둥이 함부로 놀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나는 감옥을 박차며 밖으로 나왔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었다.
“크롱크!”
크롱크가 네 발로 냅다 기어왔다. 다른 크록들은 잘만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데 왜 이 녀석만 기어 다니는지 전부터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항상 기어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대체로 급한 상황일수록 앞다리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었다.
“부르셨습니까, 라힐님, 큼.”
크롱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크롱크의 모습이 우습기도 해서 잠시 상념에 사로잡혔다. 역시 개체의 개성은 보존되어 야겠다고.
“심문 끝났다.”
“인간은 어떻게 할까요? 계속 잡아다둘까요?”
“처리해.”
나는 차갑게 대답했다.
“인간이 아니라 CCTV다."
나는 도시로 돌아가 이졸데에게 다시 대회의를 소집할 것을 건의했다. 마침 영주도, 군대도, 모든 것이 한 장소에 모여 있었기에, 정보를 전달하고 뜻을 하나로 모으기만 한다면 늦지 않게 요격에 나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국의 실체를 전해들은 동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멍청이들이 모여 만든 국가가 할법한 발상이로군.”
정기호가 두 다리를 꼬아 테이블에 올린 채 허공 위로 담배연기를 뿜어 올렸다. 한가롭기 짝이 없는 모습이 흡사 활동을 앞둔 휴화산을 연상시켰다.
“끔찍하네요. 그런 존재는 반드시 사라져야만해요.”
소미는 나와 함께 분노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오르기도 소미와 반응이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그는 마법사답게 지적 호기심도 드러내었다.
“여러분들은 중국이라는 나라를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잘 알죠.”
“여러분의 세계에서도 저러던 나라였습니까?”
“군체의식 말이죠?”
“예."
“그런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때가 많긴 했어요. 술법이 없을 때도 그랬으니 지금은 더하겠죠.”
가장 반응이 밋밋한 건 료헤이였다. 그는 본국에서 뭘 보고 왔는지 팔짱을 낀 채 내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료헤이, 오늘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고 했었지.”
“그랬지.”
료헤이는 그 사이 수염을 더 길렀다.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하나로 이어질 만큼 무성했다. 교사를 연상시킬 만큼 지적이던 분위기는 잘 다듬어진 수염 덕에 야성적으로 변모했다.
료헤이는 턱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운을 떼었다.
“본국은 전진기지를 철수시켰더군. 군대가 주둔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포탈 주변에는 여전히 여단급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으나, 나는 탈주한 배신자로 취급받고 있기에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빈 손으로 돌아오지는 않았겠지.”
“물론이다. 나는 내 부하로 일했던 환생자와 따로 접촉했다. 환생자끼리는 관료들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연락이 유지되고 있다. 그 자는 아바르를 따르는 사제인데, 몇 가지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아무래도 우리는 킬데인과 계약한 대가를 치를 것 같다.”
료헤이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부패의 에사인은 우리가 들인 방사성 폐기물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 물질을 충분히 확보한다면 싸우지 않고도 세상을 황폐화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겠지. 그러나 일본이 예상보다 훨씬 약했던 탓에, 그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나는 료헤이가 할 말을 알아버렸다.
욕이 튀어나오지 않은 건 순전히 중국 덕에 내성이 생긴 탓이었다.
“...부패의 전령이 일본에 침투했군.”
“그렇다.”
료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 분별이 어려운 죽은 자들이 영내에서 관측되었다는군. 고위관료의 출입증을 걸고 버젓이 포탈을 드나드는 놈도 있다고 했다. 그 숫자는 나날이 늘어가 환생자의 세력을 압도중이라고 한다.”
료헤이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 못지않게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바야흐로 현실과 에신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