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정체성 (7) >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보러 가도 되겠습니까?”
정체성이라는 단어.
초췌한 인상의 전사가 했던 말이 유령처럼 머릿속을 떠다녔다.
미지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전에는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안내해드리죠. 저도 마침 새로 들어온 죄수 때문에 감옥에 들르려던 참입니다.”
이졸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황국의 감옥에는 몇 가지 결여된 게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인권이었다.
애초에 황국법엔 징역이란 개념이 존재치 않았다. 이곳의 감옥은 오직 죄수에게서 정보를 뽑아내는 목적으로만 운영되었다.
"냄새가......."
소미가 코를 쥐며 손사래를 쳤다. 사람 두 명이 어깨를 맞대고 간신히 지날 수 있을 만큼 좁은 통로에 코가 마비될 듯한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으......."
간수가 횃불을 비출 때마다 길쭉하고 새카만 벌레들이 어둠을 찾아 흩어졌다. 하나하나가 엄지손가락과도 견줄 수 있을 만큼 큼직했다. 그럴 때마다 소미가 연신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소미의 안색이 점차 질려가는 걸 보며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인간이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게 이래서인가보다. 분명 그녀는 전생에선 벌레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통했을 텐데.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이곳에서부터는 간수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이졸데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머지않은 감방에 이판이 몰라보게 피폐해진 모습으로 갇혀 있었다. 발가벗겨진 몸뚱이엔 채찍자국이 가득했고, 자신만만하던 눈은 죽은 물고기처럼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 야즈 형님이십니까?”
이판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정기호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판이 절박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나는 정기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냥 가자.”
“...잠시만 기다려라.”
정기호가 기어이 이판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감옥 창살에 다가서자, 죽어있던 이판의 눈에 활기가 돌아왔다.
“형님...!”
이판이 사슬에 묶인 손목을 흔들며 정기호에게 빌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제발, 지난 정을 생각해서라도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주십시오!”
정기호가 이판을 무심하게 쳐다라보았다. 이졸데가 뚜벅뚜벅 걸어와 정기호의 옆에 서자, 이판은 몸을 흠칫 떨며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오랫동안 바라왔었다.”
정기호의 나즈막한 음성이 낮게 깔렸다.
“피붙이에게 배신당했다고 여겼다. 누구도 믿고 싶지 않았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했지. 내겐 네가 그 이유였다.”
이판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부르튼 입술을 작게 벌렸을 뿐.
“다시 태어나거든 한때 네게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걸 위안으로 삼아라.”
정기호가 몸을 돌려 멀어져갔다.
이판은 더 이상 정기호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설령 불렀다고 한들 이젠 누구도 그에게 귀를 기울여주지 않을 것이다.
감옥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길은 마치 쩍 벌린 괴물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나선형으로 꼬인 계단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이윽고 계단을 벗어나자 다소나마 밝은 공간이 나타났다. 벽에 걸린 유등이 사라질 듯 존재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곳입니다.”
간수는 우리를 창살이 없는 큼직한 방으로 안내했다. 그가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어 돌리는 동안, 나와 소미는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
나는 소미의 표정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읽어냈다. 나는 품에서 소미의 얼굴이 프린트된 작은 손부채를 꺼냈다. 정신에 작용하는 술법에 대응하고자 만들어진, 일명 소미 굿즈였다.
“팀장님도요.”
“안 가져왔습니다.”
정기호가 딱 잘라 말했다. 소미는 품 안에서 부채를 두 장 꺼냈다.
“자요, 그럴 줄 알고 한 장 더 가져왔어요.”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이, 얼른 받으세요.”
소미는 정기호에게 부채를 안기다시피 떠넘겼다.
곧 감방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전까지의 악취를 합해놓은 듯한 가공할 냄새가 코를 엄습해왔다.
방 안에는 보기만 해도 으스스한 고문용 도구들이 즐비했다.
검은 머리에 노란 피부를 가진, 비쩍 마른 동양인이 보였다. 팔과 다리는 족쇄로 잠겼고, 옆구리에는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큰 상처가 나있었다.
“이놈입니다.”
간수의 어조에서 은근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고문을 해보았습니다만 머지않아 아무 소용이 없겠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 일에 평생 몸담아왔습니다만 이런 놈은 처음 봅니다.”
“수고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간수는 눈짓을 받고 감방을 나섰다. 나는 시험 삼아 죄수를 불러보았다.
“중국인인가?”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상처가 곯아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판처럼 죽어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살아있는 것도 아닌, 보고 있노라면 왠지 기분이 나빠지는 눈빛이었다.
“그래, 우리는 중국인이다.”
그가 능숙한 에신어로 대답했다. 나는 이쯤에서 그에게 진실의 추를 시전했다.
“환생자인가?”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환생자가 아니라고요?”
소미가 믿기 힘들다는 투로 반문했다.
“에신어가 이렇게 유창한데 환생자가 아니라니, 이상하네요.”
“어학에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발음까지는...”
그녀가 발음을 지적하는 이유가 있긴 했다. 그는 아주 짧게 한 마디를 말했을 뿐이지만, 현지인이 아니고서는 흉내를 내기 어려울 만큼 음조가 정확했다. 나나 소미보다도 유창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일단 계속 물어보지.”
“네."
“중국은 어떤 이유로 황국에게 전쟁을 선포했나?”
그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내가 그를 캐내려고 하듯, 그는 나를 탐색하려 드는 것 같았다.
“중국은 지구상의 유일한 패권국가가 되도록 운명지어졌으니까.”
“누가 너희 군대를 이끌고 있지?”
“우리에게는 리더가 없다. 중화민국 인민은 사회주의 이념 아래에서 하나가 되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한때 파시즘적 프로파간다에 사로잡혔던 료헤이와 견줄만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더 이상 사회주의 국가라 부를 수 없게 된지 오래였다. 그보다 독재국가에 더 가깝겠지.
설령 중국이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한들, 사회주의가 리더가 없는 체제를 의미하진 않았다.
“거짓말 아니에요?”
소미가 물었다.
“아니야.”
어이가 없는 건 그의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진실의 추가 아직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료헤이는 그래도 마음으로 의심은 했다. 자신의 신념이 실은 거짓된 토대 위에 쌓아올린 것일 수도 있겠다고.
그러나 이 자는 본인이 하는 말이 진실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 모양이었다.
“놀랄 것 없다, 세상에는 이보다 더한 멍청이도 많아.”
정기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도 그에 동의하는 바였다. 그저 세뇌가 기동차게 잘 됐다고 여기기로 했다.
“그래도 군대인 이상 지휘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니냐. 지휘관의 이름 정도는 말해줘야 편의를 봐줄 수 있겠는데.”
“어차피 이 상처로는 오래 살지 못한다.”
“중국에도 에사인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있겠지?”
“중국은 가장 위대한 에사인을 보유하고 있다.”
옳다꾸나 싶었다. 나는 놓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그 에사인의 이름은?”
“하나의 중국.”
나는 소미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거 농담이겠지.”
“오빠 술법은 아직인가보네요.”
“아직.”
지금까지 그가 한 모든 말은 그의 양심에 기반한 진실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닐지 몰라도.
설마 술법이 작동하지 않는 건가.
그렇지는 않다. 내 술법은 세계를 구성하는 질서였다. 막힐 수는 있어도, 작동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득 또 다른 사실을 자각했다. 그에게서 죄업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죄업을 짊어지고 살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죄업을 조금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마치 순백색 도화지를 보는 것만 같았다.
- 이 일에 평생 몸담아왔습니다만 이런 놈은 처음 봅니다.
간수가 남기고 간 말이 귓전에 아른거렸다.
이런 인간은 나도 처음이었다.
진실의 추를 피해가는 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죄를 판단하는 기준이 내 도덕적인 잣대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족히 서른 살은 넘어보였는데, 암만 내 기준이라지만 삼십년 동안 손톱만큼의 죄도 짓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존재할 수가 있을까?
“아무래도 질문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
정기호가 운을 떼었다.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해봐라.”
“예시를 들어다오.”
“중국 최고지도자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지, 아니면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만 조금 더 뛰어날 뿐인지.”
“그야...당연히 완전무결하다고 하지 않겠어?”
“하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죠. 이 사람은 환생자가 아니잖아요. 아무리 세뇌가 잘 되었다고 해도, 살아있는 사람을 신처럼 떠받들긴 힘들 거예요.”
“너희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우리에게는 리더가 없다, 말했다시피.”
그가 입가를 살짝 씰룩였다. 그에게는 그것이 웃음이라는 듯했다.
“이 사람, 정말 단단히 세뇌됐네요.”
“...더 물어봤자 시간낭비일 것 같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술을 거둬들였다.
“나갈까요? 신선한 공기가 간절해져요.”
소미가 코를 틀어쥐며 호소했다. 우리는 간수에게 뒤를 맡기고 감옥을 빠져나왔다. 악취 때문에라도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감옥을 나서자 낯익은 얼굴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료헤이였다. 그는 언제와 같은 남루한 와이셔츠 차림에 일본도 한 자루를 허리에 매고 있었다.
“간만이다, 료헤이.”
“다가오지 마라, 불쾌한 냄새가 난다.”
료헤이가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씨익 웃으며 그에게 성큼 다가섰다.
“늪지에 박혀 살던 놈이 이 정도도 못 참아서야 되겠냐.”
“우리는 나름의 위생기준이 있었다.”
“본진에 다녀왔다던데, 어떻게 됐냐?”
“이야기하자면 길다, 밤이 깊었으니 내일 정리해서 말해주마.”
“알았다.”
“그리고 네 부하, 크롱크인가 하는 크록이 소식을 전해달라더라. 중국 병사 한 명을 포획해왔다고.”
“벌써 포로를 잡았다고?”
“정찰병인 것 같다더군. 정확한 소식은 직접 들어라.”
료헤이는 돌아서려다가, 나와 소미, 정기호에게 한 차례씩 시선을 주었다. 정확히는 우리가 들고 있는 부채를 향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정기호가 강하게 부인했다.
다음날 나는 해가 뜨자마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시를 빠져나갔다.
포로를 심문해보았으나 중국인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어나기만 했을 뿐이었다.
나는 반드시 진실을 캐내리라 마음먹었다. 필요하다면 내게 주어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크록들은 주변의 나무를 베어와 목책을 두르고 구덩이를 파 제법 그럴듯한 숙영지를 만들었다.
유일하게 집 같이 생긴 구조물이 바로 포로를 잡아둔 곳이었다. 총화기를 멘 전사들이 나무를 얽어 만든 조잡한 입구를 철통같이 경계 중이었다.
“크롱크.”
“라힐님, 드디어 오셨군요, 큼.”
크롱크가 기쁜 듯이 볏을 활짝 펼치며 내게 기어왔다.
“명령하신 대로 중국군 포로를 잡아두었습니다. 멍청하게도 제 형제들이 숨어있는 곳 근처를 정찰하러 나왔다더군요. 실력이 형편없어서 포획하기 어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큼.”
이상했다. 어제 그 포로도 그렇고 크롱크에게 잡힌 자도, 소문이 전해오는 것만큼 무시무시한 적은 아닌 것 같았다. 무적의 울토르를 패퇴시킨 군대치고는 뭔가 허술했다.
“심문을 해보시겠습니까?”
“뭐 캐낸 게 있나?”
크롱크가 쉿쉿거리며 혓바닥을 내밀었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취하는 동작이었다.
“술법을 썼는데도 도무지 쓸 만한 정보를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잔챙이라 그런지 아는 게 없으면서 고집만 세더군요. 왠지 기분 나쁜 인간이었습니다, 큼.”
“..기분이 나쁘다고?”
나는 그의 뒷말을 무심코 따라하다가, 난데없이 데자뷰가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스멀스멀 치솟았다. 나는 즉시 크록들이 만든 임시 감옥을 향해 걸어갔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나는 전사들이 고개를 숙이는 걸 본체만체하며, 얄팍한 문을 다짜고짜 완력으로 뜯어냈다. 볼우물이 홀쭉 들어간 동양인이 작은 감방 안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또 만나는군.”
그가 날 쳐다보며 입술을 슬쩍 씰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