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정체성 (6) >
"...아바르님이 인정했다고요?”
이판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가 참관중이던 사제단을 향해 물었다. 이제 좌중의 관심은 아바르를 대리한 사제에게로 옮겨갔다.
아바르의 사제가 쭈글쭈글한 손으로 깊게 덮어쓴 후드를 벗었다. 인자하고 넉넉한 인상을 지닌, 검버섯이 곳곳에 핀 노파였다.
니피.
그녀와는 벌써 세 번째 만남이었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내게 기도하라던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아바르의 사제라면 누구라도 섬기는 자의 뜻을 알고 있을 것이라 여겼으나, 니피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다. 과연 운명의 에사인다운 안배였다.
“라힐님을 뵙습니다.”
“여전히 정정하시네요.”
“이래봬도 소천할 날이 머지 않았답니다.”
니피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운명을 관장하는 에사인의 사제가 저런 말을 하면 농담 같지가 않았다.
“들으셨겠지만 여기 사람들이 제 권능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늙은 것마저 들을 수 있었습니다. 눈을 뜨고도 보질 못하고, 귀가 열렸는데도 듣지를 못하니 그야말로 어리석음의 소치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니피가 이판을 나무라듯 쳐다보며 말했다. 이판은 몸을 움찔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아바르께서는 라힐님의 성취와 역경을 자신의 일처럼 각별한 관심으로 살피고 계십니다. 또한 라힐님께는 서쪽에서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곳으로 나아간다면 잠들지 않는 자를 조심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니피는 할 말을 마치자 다시 후드를 덮어쓰고 사제단의 틈바구니로 되돌아갔다.
그나저나 잠들지 않는 자를 조심하라니.
정체성의 뒤를 잇는 뜬구름 잡는 발언이 나왔다.
예언이라는 게 대부분 이렇듯 두루뭉술하다. 지나가고 나서야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 만큼.
그러나 아바르의 계시는 여느 예언과는 무게감이 달랐다. 그녀의 예지는 미래에 대한 간섭이자, 필연의 변주였다. 그녀가 내다본 미래는 당사자의 행동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뭣들 하시오.”
사회를 보던 노인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미 두 손을 바닥에 짚은 채 엎드리고 있었다.
두 번째 권능이 새로이 에사인이 될 자를 공인한 마당이었다. 보너스로 말로만 듣던 미래시를 통한 계시까지 내려졌다.
영주들이 노인의 뒤를 따라 분분히 무릎을 꿇었다. 이판은 이맛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가장 마지막에 마지못해서 무릎을 꿇었다.
“모두들 일어나시죠.”
나는 여전히 양손검에 손을 올린 채 짧게 명령했다.
“이제 선택을 합시다. 내 권능 앞에서 당신의 결백을 맹세하던가, 아니면 일곱 권능의 가호를 빌어 결투로 판가름을 내던가, 본인에게 유리하다 싶은 걸 고르면 됩니다.”
이판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전하의 권능에 맹세코 저는 야즈님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진실의 추가 침묵했으나,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판은 확실히 정기호를 멕일 정도 잔머리는 있는 친구였다.
“청부하지도 않았습니까?”
“물론입니..끄아아악!”
이판의 왼쪽 다리가 뒤틀렸다. 그는 잘생긴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허벅다리를 부여잡고 나동그라졌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의사당 돌벽에 부딪혀 오페라마냥 메아리를 쳤다.
“자업자득이네요.”
소미가 짧게 평했다.
나는 이판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을 흡족하게 감상했다.
“깜빡하고 제 권능이 거짓을 단죄한다는 걸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다음에는 자신이 맹세할 힘이 어떤 종류인지부터 살피고 나서 행동에 나서심이 좋겠습니다.”
나는 정기호를 흘끗 쳐다보며 발언을 마무리했다.
“어디까지나 다음 기회라는 게 당신에게 남아있다면.”
정기호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가 이판의 멱살을 쥐었다. 이판은 그의 팔힘에 매달려 공중으로 끌어올려졌다.
“왜냐?”
정기호가 이판의 눈을 들여다보며 사납게 물었다.
“난 너를 정말로 형제처럼 여겼다.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뭐든지 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는 이미 내게 전권을 위임받아 대영주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대체 뭐가 모자라서 날 죽여야만 했던 거냐.”
"......."
이판은 대롱대롱 매달린 채, 고개를 억지로 돌려 주변을 살폈다. 의사당 분위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누구 하나 그에게 동정을 보내는 이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계책이 파국을 맞이했음을 직감했는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렇지만...내가 대영주인 건 아니잖습니까.”
정기호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가 이판의 죽빵을 돌려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탄하는 중이었다.
“발언하겠다.”
정기호가 사회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예, 말씀하시죠.”
“일곱 권능과 신생공화국의 지도자 라힐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나는 현시간부로 스트리아령 대영주직에 대한 권리를 영원히 포기하겠다. 나를 지지해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다. 다행히도 스트리아령에는 나보다 더 훌륭한 적임자가 있으니, 앞으로 그를 잘 보필해 영지를 바르게 이끌어 가리라 믿는다.”
정기호가 손에서 힘을 풀자, 이판의 몸이 거칠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신임 대영주에게 한 가지 청을 할까 한다.”
이졸데가 정기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듣고 있어요, 오라버니.”
정기호를 대하는 그녀의 어조가 변해있었다. 특유의 차가움은 여전했으나, 혈육에 대한 정을 숨길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차원을 초월해 재회하여 마침내 서로에 대한 앙금을 털어버린 듯했다.
“정의를 보여다오.”
“기필코.”
그녀의 삼백안이 이판을 향해 냉엄한 빛을 발했다. 연인을 보는 눈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이판이 몸을 던져 정기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자, 잠깐만! 잠깐만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정기호가 무심한 표정으로 이판을 내려다보았다. 이판은 눈물을 쏟으며 애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제가 미쳤었습니다, 권력에 눈이 멀어 제가 얼마나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제게 바람을 불어넣은 그 독버섯 같은 인간들을 멀리했을 텐데...!”
그가 도끼눈을 뜨며 영주들을 노려보았다.
“저 혼자 이런 일을 꾸밀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신다면 오산이십니다. 애초에 배운 것이라고는 칼 쓰는 재주밖에 없는 제가 뭘 안다고 암살자를 섭외했겠습니까? 야즈님을 음해하던 사람들이 이 자리에도 얼마나 많이 와있는지 아십니까?”
“여죄는 밝혀낼 것이다.”
이졸데가 정기호를 대신해 말했다.
“관련된 자는 누구도 심판을 피해갈 수 없을 테니, 그 점은 안심해도 좋다.”
“그런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래요, 놀아났던 겁니다. 제게 죄가 있다면 너무 순진해서 그들이 하는 말을 다 믿었다는... 끄아아아악!”
이번에는 그의 오른다리가 역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주먹으로 바닥을 쾅쾅 내리쳤다.
소미가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기에, 나는 나를 위한 변명을 주워섬겼다.
“고문하는 취미 없어. 자업자득이라고.”
“알아요. 사람이 어쩜 이렇게 어리석을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이어요.”
그 점은 동의했다. 거짓말을 하면 단죄받을 수 있다고 말한 지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정도면 거짓말이 일상화가 될 정도로 입에 달라붙은 인간이라고 보아야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정기호에게 진심이었던 적이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야즈님이 후계권리를 포기하셨기 때문에, 이졸데님이 대영주직을 유임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혹시 이의 있으신 분이 계십니까?”
사회자가 물었다.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 결과를 인정하시겠습니까?”
그는 이번에는 사제단을 향해 물었다. 일곱 사제 모두 침묵을 지켰다.
“그러면 이상으로 대회의를 마치겠습니다.”
“대영주 이졸데님 만세!”
라드가 장검을 빼들며 하늘 위로 쳐들었다. 영주와 대전사들이 라드를 따라 무기를 뽑으며 만세삼창을 했다. 라드는 전투에서 승리하기라도 한 것처럼 두 뺨을 붉게 물들이며 목청껏 이졸데의 이름을 외쳤다.
그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다른 영주들에게 영향을 미칠 만큼의 행동력을 보이는 중이었다. 사실상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였던 이졸데는 오늘 대영주직을 보전받은 것도 모자라 든든한 지지자까지 확인한 셈이었다.
대회의가 끝나고 하루 후, 이졸데가 나와 정기호, 소미, 오르기를 불러 푸짐한 성찬을 대접했다. 형식상으로는 연회를 표방했으나, 성격상으로는 모임에 더 가까웠다.
우리는 음식과 음료를 나누며 쌓였던 이야기들을 격의 없이 풀어내었다. 전반부는 오르기가 어쩌다가 소속을 옮기게 되었는지가 주된 안주거리가 되었다.
“아까운 인재를 놓치고 말았구나.”
이졸데가 오르기를 멀거니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인재의 이탈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멋대로 판단을 내려서...”
“아니다. 곁에 두고도 재능을 몰라본 내 잘못이 더 크다.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마저 든다. 라힐님이라면 네 능력을 마음껏 펼치도록 해주실 테니.”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르기가 몸 둘 바를 몰라하며 대답했다. 오르기는 주눅이 들어 보일 만큼 겸손하기 그지없었다. 얼굴 잘났지 실력 뛰어나지, 발카사르처럼 본인이 백 년만의 천재라고 자부하고 다녀도 뭐라고 못할 텐데.
“정기호.”
나는 맞은편 자리에 앉아 말없이 잔을 기울이는 정기호를 불렀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내게 시선만 주었다.
“넌 동생한테 할 말 없냐? 곧 여길 떠야하니 할 말 있으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해.”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서로 말을 아끼는 게 정기호와 이졸데였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만 보이지 않는 가림막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이판을 처리하며 흉금을 털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으나,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갑자기 가까워지고 그러지는 않는 듯했다.
“...딱히 할 말이 없다.”
“나도 할 말이 없어.”
“의심해서 미안했다는 말 말고는.”
이졸데가 정기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기호는 그 말 한 마디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또 말없이 잔을 홀짝이기 시작했다.
“나도 오빠한테 미안하지, 자격이 없었다고 했던 거.”
“자격이 없는 건 맞다.”
“나라고 뭐 자격이 있었겠어. 닥치니까 해내야만 했던 건데.”
“자격 없는 놈이 한 마디만 더 하마. 그날 같은 상황이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선 안 된다.”
“어떤 상황?”
“기엔.”
이졸데의 호박빛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정기호는 손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위험을 자처하지 마라. 다음에도 내가 널 지켜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알았어. 그래서 이젠 요론을 데리고 다니고 있어.”
“알았으면 됐다.”
남매의 대화가 끝나자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이졸데는 슬슬 자리를 파하려는지 상을 치울 것을 지시하며 내게 물었다.
“곧 떠난다고 하셨는데, 어디로 가시는지요?”
“서부전선으로 향할까합니다.”
“그 말씀은 전하께서 황국과 전선을 함께한다는 의미입니까?”
“예."
나는 그녀에게 확답을 주었다. 이젠 내 이름을 앞세운 나라를 세웠으니 거칠 게 없다. 나는 황국의 편에 서서 참전할 것이다.
아바르의 예언이 내 의지에 기름을 부었다. 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혼돈은 에사인을 낳는다. 나는 전란을 발판으로 삼아 일곱 번째 권능으로 우뚝 서리라 결심했다.
"그렇다면 알아두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중국이 기묘한 권능을 앞세워 서부전선을 밀어붙인다는 정보입니다.”
“예, 그것 때문에 우리측 정보원이 중국군을 포획하러 전선에 나가있습니다. 직접 심문을 해봐야 권능의 실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공교롭군요.”
이졸데가 묘한 투로 말했다.
“마침 스트리아 시 감옥에 중국군 포로가 한 명 있습니다. 힘들게 잡아온 자입니다만 저희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캐낼 수가 없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라힐님께 부탁을 드려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