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정체성 (5) >
토론의 결렬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피를 부른다. 일곱 권능의 사제가 입회한 결투는 결과에 따라 작위나 영토가 오갈 정도로 무겁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누구나 무기술에 능할 수는 없으니, 귀족이라면 중요한 자리에 입회할 때 결투를 대리할 전사를 대동하는 게 관례였다.
“라힐님이 정녕 야즈님의 대전사가 맞습니까?”
노인이 정기호에게 물었다. 정기호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허나 일국의 국왕을 대전사로 임명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허용되어도 좋은지는 일곱 권능의 재가를 거쳐야...”
“법이 대전사의 자격에 제한을 두었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법은 일곱 권능의 재가를 거친 게 아닌가?”
“맞습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
노인이 단번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정기호의 리더십에 대한 의문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과거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영주 시키면 잘 할 것 같긴 한데.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재차 물었다. 이번엔 누구도 태클을 걸지 않았다. 이판이 내게 불편한 시선을 보내고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하여 여유를 잃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아직 자신의 설계가 무너지지 않다고 여기는 듯했다.
“저는 여기 계신 분들께 서운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차기 대영주직을 누가 가져갈지를 논하기 전에, 전임 대영주였던 야즈가 누구에게 죽었는가를 규명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요?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대영주를 새로 뽑아봤자 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옳습니다!”
라드가 날 위해 목소리를 내었다. 라드를 따라 몇몇 영주가 용기를 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주들은 침묵 속에서 상황을 관망하기만 할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눈에서 섣불리 나섰다가 전임 대영주처럼 제거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읽어냈다.
“발언하겠습니다.”
이판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가 드리는 말씀에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야즈님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밝혀내고 싶었던 게 저희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는 비보를 접하고 나서 슬픔에 사로잡혀 식음마저 전폐했던 분들도 많이 있으십니다. 저희는 흉수를 밝혀내기 위해 밤낮으로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만, 일곱 권능의 가호를 업고도 아무런 단서조차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때도 가능하지 않았던 게 많은 증거가 소실된 이제 와서 가능하리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포기하겠다고요?”
“어렵다기보다는 불가능합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불가능할 게 뭐가 있습니까?”
내가 정기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구보다도 확실한 증거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정기호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계획했던 대로였다. 이제 이판의 반응을 볼 차례였다.
“하하,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군요.”
이판이 사람 좋게 웃었다.
“마침 잘 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주제와도 맞닿아 있으니까요. 우리에겐 전임 대영주님의 사망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것보다 앞서서 해결해야 할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여기 앉아있는 사람이 정말로 야즈님의 환생체가 맞느냐는 것입니다.”
드디어 올 게 왔다. 아무런 정보 없이 얻어맞았다면 뒤통수가 제법 얼얼했을 돌변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분이 야즈님의 환생이라고 공언했던 게 이판님 아니십니까?”
이졸데측의 영주가 이판에게 질문했다. 이판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때는 기엔 영지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라 이것저것 잴 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죠.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돌아가신 대영주님과 형제나 다름없이 막역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근래 이 사람을 가까이하며 제가 기억하는 야즈님이 맞는지 검증해보았으나,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 지점이 많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정기호가 불쾌한 심사를 감추지 않았다. 이판은 정기호를 무시하며 발언을 이어갔다.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닐 겁니다. 여러분들도 돌이켜보십시오. 이 사람이 그간 이곳에 머물며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를. 그렇게 즐겨하던 사냥도, 비무도, 연회도 멀리한 채 정찰을 명목으로 끊임없이 군사작전에 매달리는 모습, 우리가 기억하는 그 야즈님이 맞다고 단언하실 수 있습니까?”
좌중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은 정기호가 대영주 노릇을 할 때 영지가 어떤 꼬락서니였는지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내가 한갓 오데르의 검에서 박봉팔이 되었듯이, 그에게도 철없던 대귀족의 망나니에서 정기호가 되어간 수십 년의 세월이 존재했다.
그는 사냥이나 비무, 연회에 이전만큼 큰 흥미를 두지 않았다. 이젠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오프로드를 질주하는 게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이제 그에게는 책임감이라는 것도 생겨났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꾸준히 적의 동향을 살필 정도로.
전생의 기억만으로 한 인간을 재단할 것 같으면 그는 야즈가 아니었다.
그러나 영혼을 기준으로 판단하자면 그는 야즈였다, 정기호인 동시에.
“일리가 있군. 나는 진즉부터 저 자가 수상하다고 생각했지. 포탈이 열린 후 곳곳에서 죽었던 자들이 되돌아오고 있지 않나. 그런 자들에게 얼마 전에 대영주를 잃은 우리 영지가 얼마나 먹음직스럽게 보이겠나?”
“저 국왕이라는 자와의 관계도 수상합니다. 그가 황제를 섬기지 않으며, 이차원에서 온 마족의 수족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 영지를 제 손으로 들어 남의 나라에 바치는 꼴이 아닙니까?”
영주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정기호를 매도하다 못해 나까지 끌어들이려는 중이었다.
나는 이판의 얼굴에 비로소 승리의 미소가 깃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발언을 신청합니다.”
“전하께서는 대변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전사 자격으로 입회중이실 텐데요.”
“대전사는 말 못한다는 법도가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뭐 어떻습니까.”
내가 뻔뻔하게 나오자, 사회를 보던 노인이 도리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말씀하시죠, 라힐 전하.”
“감사합니다.”
내가 나서자 좌중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들이 다소간 내 눈치를 보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들은 내가 평범한 전사나 주술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판님께서 야즈와 형제처럼 친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만, 형제처럼 친한 것과 진짜 형제는 다릅니다. 마침 진짜 형제 되시는 분이 여기 계신데, 굳이 돌아서 의견을 구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이졸데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지금껏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사태를 지켜만 보던 중이었다.
"......."
이졸데가 금빛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정기호를 쳐다보았다. 치켜뜬 삼백안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의사당 안에 쥐 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녀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했다.
첫째, 정기호가 야즈라는 걸 부정하는 길.
그 경우 그녀는 이판을 비롯한 다수파벌의 지지를 뒷배로 삼아 안정적인 재집권이 가능해진다.
이판과 결혼하는 것도 그리 큰 패널티는 아닐 것이다. 애당초 귀족에겐 연애결혼이라는 개념이 존재치 않았으니.
둘째, 정기호가 야즈라는 걸 인정하는 길.
양심은 떳떳하겠으나 권력은 물 건너간다. 하루아침에 끈 떨어진 연 신세로 전락하여 환생한 오빠의 자비심에 기대는 처지가 되겠지.
그야말로 얻을 게 아무것도 없는 선택지였다. 이판은 이미 이졸데에게 첫 번째 길을 주문해놓았을 것이다.
그녀도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 길인지 잘 알았다.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권력을 위해 천륜을 저버리던가? 남들 다 하는 부정인데 본인이라고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졸데님, 그가 야즈가 맞습니까?”
이판이 미소를 잃지 않으며 물었다.
“이 사람은...”
이졸데의 입술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미소는 날카로운 삼백안 때문에 어딘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내 오라비가 맞다.”
일순간 이판의 미소가 사라졌다. 서둘러 입꼬리를 끌어올리긴 했으나, 흔들리는 눈빛은 복구가 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한다. 그는 이졸데가 자신처럼, 본인의 이득을 우선할 것이라 굳게 믿었던 것 같았다.
“모두 잘 들으라.”
이졸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나는 이 자가 내 혈육인 야즈임을 일곱 권능 앞에서 엄숙히 선언하겠다. 내 판단에 의문이 든다면 누구든지 좋으니 도전하라.”
터억.
그녀의 뒤에 선 곰 같은 사내가 묵직한 전투망치를 두 손에 올려놓았다. 용기의 에사인인 다가트의 문신이 헐벗은 상체에 그득했다.
요른.
스트리아 가문 직속 전사단, 큰망치 전사단의 수장.
그는 이졸데의 대전사이자, 정기호의 살아생전 호적수였다. 그는 매 같은 고리눈을 부릅뜨며 영주들에게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아시겠지만 본인은 야즈님과 하루가 멀다하고 연무장을 뒹굴던 사이요. 말은 속일 수 있어도 실력만큼은 속일 수가 없지. 일합만 겨뤄도 뻔해지는 것을, 뭣하러 구질구질하게 앉아서 떠들고들 있는 거요.”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야즈의 정적이어야 할 이졸데와 요론이 지원유세에 나섰으니 더 이상의 토론이 무의미했다.
단 한 명, 이판만이 백기를 들지 않았다.
“하하, 이러면 제 입장이 난감해지는군요.”
“할 말이 더 있소?”
사회를 보는 노인이 이판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혈육이라고 해서 서로를 잘 알 것이란 주장은 아랫것들한테나 통할 편견이 아닙니까? 저는 야즈님과 이졸데님이 생전에 그리 친하지 않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게다가 실력 얘기도 그렇습니다. 야즈님이 익힌 검법은 황국군 장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울토르의 검이 아닙니까. 그런 기술을 가진 자는 당장 제 부하들 중에서도 백 명도 넘게 추려낼 수 있습니다.”
“본인이 그런 하수들과 야즈님을 분별하지도 못할 것 같소?”
“무턱대고 신뢰할 수가 없다는 뜻이지요.”
“지금 본인을 뭘로 보고...!”
짝.
나는 박수를 쳐 요론의 말을 끊었다. 나는 등 뒤에서 양손검을 꺼내 의사당 바닥에 한 뼘 깊이로 꽂아 넣었다.
“토론 결렬이로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노인이 나를 예의주시하며 대답했다. 영주들은 토론이 결렬되었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짚어볼 게 있습니다. 앞서 한 가지 안건이 더 있었지요. 누가 전임 대영주를 죽였느냐하는.”
“예."
“야즈, 누가 널 죽였냐?”
나는 정기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정기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판이다.”
이것이 사전에 정기호와 내가 합의한 작전이었다. 이졸데에게 증언을 얻고, 증언을 토대로 증거를 찾아내고, 굳이 귀찮게 돌아갈 필요가 없겠더라는 거지. 그냥 중간다리 다 뛰어넘어서 이판한테 덮어씌우면 되는데.
“뭐라고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판이 실소했다. 그는 팔을 벌리며 영주들을 돌아보았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왜 사랑해 마지않던 야즈님을 죽인단 말입니까?”
“그 이유는 차차 알아가야죠.”
“정말 당황스럽군요. 대체 왜 제게 이러시는 겁니까. 저는 야즈님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일곱 권능께 맹세코 떳떳합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꽂아둔 대검 손잡이를 쥐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바르가 인정한 제 권능 앞에서도 맹세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