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정체성 (4) >
“쇼 엔터테인먼트계의 유망주도 계시죠.”
소미가 나를 쳐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소미는 황국 내에 가진 기반이 전무했다. 이 일을 잘만 활용한다면 우리의 이름을 널리 알릴 디딤판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은 방법이라도 떠올랐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지.”
“힘으로 밀어붙이겠다고?”
“우선 이판이라는 놈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 아까 네가 그놈더러 믿고 등을 맡길만한 사람이라고 했던 말, 사실이냐?”
“전생에선 그랬었다.”
정기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나는 그의 담배가 아직까지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에신에 규명해야 할 미스테리가 존재한다면 정기호의 안주머니부터 뒤져봐야 할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쭉 함께 자랐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한 지붕아래 살면서 형제처럼 지냈다. 특히 영지를 관리하는 일에 내가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복잡한 일들은 놈에게 위임을 하고 잊어버렸지. 사실상 나는 대영주가 아니었다고 보면 된다.”
“그놈이라고 딱히 영지관리를 잘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나았다고 본다. 이판은 자기 패거리들을 늘리기 위해 대영주의 권한을 남용했다. 그러나 이 점을 가지고는 놈을 탓할 생각이 없다. 놈에게 칼자루를 쥐어준 게 나였으니.”
정기호가 허공에 담배연기를 흘려보냈다. 그의 눈빛은 희뿌연 연기만큼이나 흐릿했다.
“모든 게 전생의 업보다. 이판에게 권력을 쥐어줘서 영주연합을 키운 것도, 동생이 나를 미워하게 된 것도. 돌이켜보면 나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말아먹는 후레자식이었던 셈이다.”
“너 후레자식 맞어.”
내가 발 빠르게 긍정했다. 정기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담뱃재를 바닥에 툭툭 털며 말했다.
“정정하지, 오데르의 자식보다는 그래도 양심이라는 게 있었다.”
“그래도 우린 의리가 뭔지는 알았거든.”
“동물도 무리를 짓곤 한다.”
“이판이라는 놈은 왜 널 지지해주는 거냐? 그놈 계산대로라면 네가 대영주가 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이판은 아직 이졸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이졸데에게 불리한 판을 짠 뒤, 결혼을 조건으로 딜을 하려는 거지. 자기 말 한 마디면 수십 영주의 표가 오간다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나.”
“너는 들러리라는 거네.”
“놈은 나를 어떻게 퇴장시킬지 계획을 다 짜놨을 거다. 내 목을 성벽 어느 곳에 걸어놓을지도. 예전부터 나보다 훨씬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었다. 내가 전생에 야즈였다고 밝혔을 때는 눈물까지 흘리더군. 동생이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또 그놈의 거짓말을 바보처럼 믿었겠지.”
정기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암만 상남자라고 해도,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상처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졸데는 그런 놈을 감싸준 거지?”
- 스트리아가 안녕을 찾는다면 그때는 제가 먼저 그에게 진실을 털어놓겠습니다.
어느 날 밤, 이졸데가 입술을 고집스럽게 다물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날 그녀는 이판의 명예를 한사코 끌어안았을까? 이판이 마냥 못된 놈이기만 하다면 진실을 털어놓고 같이 해결책을 궁리했어도 좋았을 텐데.
“그것까진 모르겠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이 원래 사귀던 사이였다는 게 전부다. 내가 죽은 전후로 둘의 관계에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 아이라도 가졌는지, 그건 알 바 아닌 것이고.”
“그렇군.”
죽음이란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극적으로 바꿔놓기 마련이다. 죽음이 그럴진대, 환생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얌전하던 테일리시가 돌아온 내게 얼마나 절박해졌던지.
정기호의 환생은 이졸데의 삶에도 커다란 충격파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녀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거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건 지금은 그녀가 우리를 편들고 있다는 점이겠다. 과거 그녀가 어땠는가는 굳이 캐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자.”
“뭐든지.”
“카룩카이하고 료헤이는 어디로 갔냐?”
“카룩카이는 서부전선을 살피러 나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간단한 정찰임무조차 믿고 맡길 사람이 없더군.”
“료헤이는?”
“그 친구는 자기 본진이 어떻게 됐는지 훑어보고 오겠다고 한다. 후방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부전선으로 향할 수는 없을 테니.”
“대회의는 언제냐?”
“닷새 후로 예정되어 있지만, 나와 동생이 요청한다면 내일이라도 열 수 있다.”
“그러면 내일로 하자. 질질 끌어서 유리해질 것도 없으니.”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정기호가 장초를 사기그릇에 짓눌러 끄며 따라 일어섰다.
“뜻대로. 하지만 네 플랜에 내가 대영주가 된다는 결말은 없어야한다.”
“안심해. 뭘 믿고 널 시키겠어.”
“그래서 말이다만, 부대에 남는 자리 없냐.”
“부대원이 한 명뿐인 부대라도 괜찮다면야.”
“머릿수는 상관 안 해. 발목만 안 잡으면 된다.”
“실력은 끝내주지. 내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낼 정도니까.”
“그런 사람이 있어요?”
소미가 놀라서 내게 물었다.
“있어, 지금은 부재중이지만.”
공화국 육군 휘하 특수전단.
소속 병사는 단 한명, 료헤이 일병.
두 사람의 죽이 잘 맞는 것 같아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가 되었다.
대회의란 대영주급 영지의 운명을 결정지을 사안이 있어야만 소집되는 특별한 모임이다. 평시에는 사오십년에 한 번, 대영주직의 승계문제가 달렸을 때 개최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대회의의 의사결정구조는 간단했다. 어떤 안건이든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내기만 하면 가결되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시일이 얼마가 걸리건 결론이 나올 때까지 토론을 계속했다. 결론을 내지 못해 2, 3년이나 회의가 길어지는 케이스도 흔했다. 그럴 때는 결투가 가장 심플한 해결책이 되곤 했다.
정기호는 약속대로 하루 후 대회의를 개최했다. 나는 소미와 오르기를 데리고 아침 일찍부터 일찌감치 의사당에 자리를 잡았다.
“작은 국회같네요.”
소미가 내게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곧 벌어질 일들이 기대가 되는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중이었다.
“저희가 이곳에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군.”
오르기가 불안한 듯이 말했다.
“대회의는 원칙적으로 영주가 아니고서는 특별한 경우에만 입장이 허가됩니다. 저희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런 사람 말이죠?”
나는 단상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넌지시 가리키며 물었다. 복잡한 상징이 가득 수놓아진 옷을 입고, 시종일관 엄격한 표정을 풀지 않는 이들.
그들은 일곱 권능의 사제들이었다.
대영주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정치적인 결정에는 반드시 에사인의 재가가 필요했다. 형식적인 절차라고는 하나 결코 생략할 수는 없었다.
“예, 법전에 명시된 예외중 하나가 일곱 권능의 대리자 자격입니다. 아무리 주군께서 에사인으로 향하는 여정을걷고 있다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수석께서 조용히 하고만 계시면 아무도 모를 겁니다.”
“주군.......”
나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가대었다. 오르기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혹시 누가 자신을 알아볼까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이윽고 영주들이 하나둘 의사당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리로 가서 앉지 않고, 파벌끼리 삼삼오오 뭉쳐 오늘 의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도 아는 바겠으나, 기실 대회의에 있어 영주 개개인의 의견은 중요치 않았다. 그들은 부평초처럼 파벌 수장의 의지를 따라 흘러 다닐 뿐이었다.
“누가 보면 대영주가 바뀐 줄 알겠네요.”
소미가 이판을 넌지시 쳐다보며 말했다. 이판의 세력이 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파벌이라는 데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를 둘러싼 영주들이 얼마나 많던지 흡사 목초지에 모인 양떼를 보는 듯했다.
“이졸데님과 야즈님께서 자리에 드십니다!”
근위병이 엄숙한 목소리로 외쳤다. 영주들은 그제야 분분히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이졸데는 붉은 단망토를 늘어뜨린 채 수행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의사당 서쪽 문에서부터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잠을 며칠 설친 사람 같았다. 표정은 당당했으나 눈 밑의 다크서클은 화장으로도 지울 수가 없었다.
반면 정기호는 느긋하기가 수사자가 따로 없었다. 속마음이야 어찌되었건 그는 겉으로는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졸데와 정기호가 앞좌석에 나란히 착석하자, 허리가 구부정한 원로가 지팡이를 짚으며 단상 앞으로 나섰다.
“여러 훌륭하신 영주님들께 고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스트리아령은 이졸데님의 영도를 받아 무탈하게 꾸려져가고 있었으나...”
여기저기서 비웃음 섞인 항의가 터져 나왔다. 무탈하다는 대목에서였다. 이졸데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초연한 표정이었다.
“스트리아령의 전임 대영주이시자 제일계승권자인 야즈님께서 죽음에서 돌아오셨기에 후계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느 분이 대영주직에 더 적합할지 부디 거리낌 없이 의견을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토론이 끝나면 여러분들의 의견에 일곱 권능의 지혜를 더해 결론을 지을 것입니다.”
노인이 좌중을 한 차례 돌아보았다.
“의견이 있으신 분 없으십니까?”
“......이건 대영주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한 사내가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갈색 머리를 짧게 깎은, 다부진 체격을 가진 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라드.
그는 기엔 영주의 아들이자, 현 기엔 영지의 영주였다. 그는 목까지 붉게 물들인 채 흥분해서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뱉어냈다.
“이게 논할 가치나 있습니까? 이게 정녕 토론할 거리가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졸데님은 일본이 침략했을 때 몸소 탈것을 타고 최전선으로 날아오셨습니다. 검을 뽑아 되살아난 시체들의 목을 치셨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뭘 하고 계셨습니까? 수만, 수십만의 군대를 거느리고도 뭐가 두려워서 영지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했던 겁니까?”
“라드 영주님, 표현을 조금만 순화해주시면....”
“아니,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드가 노인의 말을 거칠게 잘랐다.
“이제 와서 대영주직을 논한다고요? 당신들이 영주직에 적합한지부터 따져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정치적 유불리로 영지민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당신들을 영주라고 불러줄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모두 비겁자에 살인자입니다!”
라드가 격정적으로 외쳤다. 그는 열정이 넘쳤으나, 어린 만큼 뜨거운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러면 불리해지는 건 이졸데였다. 노회한 인간들이 드글대는 정치판에서는 속마음을 내보이는 게 오히려 좋지 않았다.
“라드 영주님, 너무 흥분하셨군요. 아무래도 최근 당하신 부친상이 영주님의 판단력을 흐려놓은 것 같습니다.”
이판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드럽게 말했다.
“여러 영주님을 대신하여 제가 한 말씀 올리자면, 저희는 서쪽에서 다가오는 진정한 위협에 대비해야만 했습니다. 고작해야 시체들이 걸어 다니는 것 정도에 병력을 할애할 여유가 없었죠. 그 정도는 노련한 기엔 영주가 알아서 잘 처리해낼 것이라 믿었으나, 불운하게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믿었다고요? 몇 번이나 요청했습니다! 몇 번이나!”
“요청이야 왔었죠. 하지만 그런 요청은 동서남북에서 매일같이 들어옵니다. 심지어 북부전선에서조차 지원요청이 들어오는 마당입니다. 라드님께서는 영주직을 맡은 지 얼마 안 되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그런 요청에 일일이 반응했다가는 정작 중요한 것, 영주민의 안전을 놓치게 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라드님도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저희도 기엔의 성벽 아래에서 함께 싸웠습니다. 야즈님에 의해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후엔 지체하지 않고 군대를 하나로 모았죠. 저희도 라드님의 손실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잿더미가 된 다른 스무 개의 도시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저희가 에사인이 아닌 이상 항상 옳은 결정만 내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판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 드높았다. 라드는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잠시 그들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오른손을 들었다.
“발언권을 신청합니다.”
노인이 이 맛살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실례지만 어느 곳의 누구신지...”
“에신 공화국의 라힐입니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이판은 불편한 심기를 대놓고 표출하는 중이었다. 그는 이 자리를 위해 짜둔 시나리오가 있었다. 나는 배역이 없을 시나리오였다.
“정숙해주십시오!”
노인이 소란을 가라앉힌 뒤, 내게 다시 말했다.
“죄송하지만 전하께서는 외부인이시라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으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문을 살펴보니 예외조항이 몇 가지 있더군요.”
“제가 알기로 전하께 해당되는 조문은...”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 간단하기 짝이 없는 법조문 어디에 날 위한 구절이 존재하나 싶겠지.
딱 하나 있었다.
사제와 영주를 제외한, 나 같은 놈을 위한 자리가.
“저는 야즈의 대전사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로 해결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