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정체성 (3) >
영상은 거기서 끊겼다. 그 이상 유의미한 증언을 끌어내지 못한 듯했다. 나는 오르기를 돌아보며 물었다.
“정체성과 관련됐을 법한 에사인이 누가 있을까요?”
오르기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길레악이 있겠습니다만, 그녀는 황제의 수좌이니 용의선상에서 배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길레악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네요.”
소미가 맞장구쳤다.
첫 번째 권능, 길레악.
그녀는 타인의 정신을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 때문에 오래 전부터 그녀의 사제들은 자신의 의지로 신실한 것인지, 세뇌를 당한 것인지 찜찜한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황제의 오른팔이 중국을 도울 리가 없으니, 정체성이란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능력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크롱크, 패잔병을 찾아내거든 지체하지 말고 내게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큼.”
“아니면... 중국군 포로를 한 명 잡아와도 좋을 것 같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무리하지는 말고.”
“무리하지 않아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큼.”
크롱크가 볏을 활짝 펼치며 의욕을 드러냈다.
다소간의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포로를 한 명쯤 나포할 필요성이 있어보였다. 상대의 능력을 모른 채 술법을 겨루자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잠깐의 휴식을 끝내고 행군을 재개했다.
스트리아로 가는 길은 멀고도 길었다. 사흘을 야숙한 끝에 우리는 마침내 지평선을 잇는 장대한 성벽과 마주할 수 있었다.
“와아......."
소미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영상 속의 성벽이 마천루처럼 높아보였던 건 시점의 문제가 아니었다.
스트리아 시를 둘러싼 장벽은 기엔 시의 것보다도 더 높았다.
수십 년 전 이 세계의 일부일 때는 당연하기만 한 정경이었으나, 환생해서 한 차례 기억을 세탁하고 나니 감탄사가 연발로 나왔다.
“...정말 대단하네요.”
소미는 나보다 더 감격한 것 같았다. 그녀는 눈동자를 빛내며 휴대폰 셔터를 잇달아 터뜨렸다.
“이렇게 멋진 곳인 줄 알았더라면 진작 와봤을걸.”
“넌 도시에서 살았다고 하지 않았었어?”
“아시잖아요, 저 천민이었던 거.”
그녀가 미묘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성벽을 바깥에서 보는 건 처음이에요.”
“아."
나는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게 암살자로 살아온 경험이 있긴 하나, 그렇다고 하여 계층이 다른 삶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진 않았다.
“괜찮아요, 이젠 다 지나간 일이니까.”
그녀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밝게 웃었다.
“오빠가 말해줬잖아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돕는 에사인이 될 거라고. 저 정말로 힘내고 있거든요.”
“잘하고 있더라. 지금처럼만 하면 문제없을 거야.”
막간의 포토타임이 끝났다. 들판에서 숙영중이던 군인들이 뿔나팔을 불며 법석을 피웠다. 난데없이 후방이라 여겨지던 쪽에서 군대가, 그것도 크록들로 이뤄진 대군이 나타났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나는 군대를 제자리에 대기시킨 후 소미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오르기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보호마법을 시전할 준비를 마쳤다.
길들여진 탈것을 탄 세 명의 지휘관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왼쪽에서부터 전사, 마법사, 주술사로 추정되었다.
그들은 십 미터 근방까지 다가와 내게 소리쳤다.
“어디서 온 군대요? 소속을 밝히시오.”
“나는…”
“이 분은 에신 공화국의 국왕이십니다. 예의를 갖추시죠.”
소미가 갑자기 목소리를 극적으로 높이며 그들을 압박했다.
“에신 공화국? 그런 나라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속히 소속을 밝히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요.”
“...예의를 갖추라 했습니다.”
소미의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순간 응집된 마력이 그녀의 몸에서 흰 빛무리의 형태로 발산되었다.
마법사가 두 팔을 다급히 뻗으며 방어마법을 전개했다. 주술사는 일곱 권능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탈것에서 굴러 떨어졌다.
전사는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아 체면을 지켰으나, 내가 봤을 때는 기세에 압도되어 꼼짝도 하지 못한 듯했다.
소미의 아우라는 나조차도 압박을 느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일개 지휘관이 받아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소미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그럴 것 까진 없지 않았니.”
“아니에요, 이래야만 해요.”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녀에게서 일찍이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가면이 돌아온 것을 발견했다.
방금 전, 과거를 회상하며 슬퍼하던 소녀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자리는 일국의 왕을 위해 충성을 마다않는,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만 같은 강력한 주술사가 대체했다.
“오빠는 저 이상으로 잘해내고 계세요. 에사인으로 향하는 여정이 달리기라면 오빠만큼 빠른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이건 제 전문분야니까, 배울 게 하나쯤은 있을 거예요.”
“어떤 걸?”
“쇼 엔터테인먼트.”
소미의 입꼬리가 쌔액 올라갔다.
“사람들이 오빠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두시면 안 돼요. 에사인이 되려면 언행과 마음가짐으로 따를만한 존재라는 걸 보여주셔야죠. 오빠는 마음가짐을 갖춘 분이지만, 언행이 너무 친근하다는 단점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가짐보다는 언행으로 남을 판단하기 마련이거든요.”
나는 소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직위나 능력을 내보이는 걸 의식적으로 절제하고 있었다.
재벌이나 정치인들이 발목을 잡았던 것도, 처음부터 나란 사람을 명료하게 인식시켰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오르기가 수십 년이나 계속해온 바보연기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듯이, 나도 오랜 세월 평범한 삶에 적응하려 노력했던 영향이 남아 있다고 보아야할 것 같다.
“가서 에신 공화국의 국왕이 왔다고 전해드리면 됩니까?”
마법사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그들은 어느덧 탈것에서 내려와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소미가 만들어낸 학습효과였다.
“그래, 너희들의 대영주에게 라힐이 찾아왔다고 전해다오.”
“알겠습니다.”
그들이 몸을 돌려 사라지자, 소미가 나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잘하셨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면 돼요. 오빠가 위엄이 서야 오빠를 따르는 사람들도 기가 살죠.”
그녀의 가면은 어느 새 감쪽같이 사라졌다. 과연 세계를 주름잡는 쇼 엔터테이너다운 변화무쌍함이었다.
잠시 후 우리는 도시 안으로 안내되었다. 입장이 허락된 건 나와 소미, 오르기뿐이었다. 크롱크는 도시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중국군 포로를 잡아오는 임무로 달래기로 했다.
스트리아 시는 기엔보다 훨씬 번창했을 뿐더러, 아직 전화를 겪지 않아 건물들도 멀쩡하고 사람들도 활력이 넘쳤다.
우리는 공용탈것을 타고 대영주의 성으로 직행했다. 벌써 많은 인파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성 앞까지 나와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금세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기다리고 있었다.”
정기호가 썬글라스를 벗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냐, 연락이 없기에 팔다리 하나쯤은 떨어져나간 줄 알았더니.”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들어가서 찬찬히 얘기하지. 그리고 일전에는 바빠서 소개를 못했다. 내 사촌이다.”
“이판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힐 전하.”
갈색 고수머리를 한 잘생긴 사내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예를 표했다. 그는 고대 로마인처럼 치렁치렁한 상의를 입고 있어 몸매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다부진 상체근육이 상당한 연마를 거친 전사임을 짐작케 해주었다.
“이판은 가리움 영지의 영주이자 영주연합군의 임시대표를 맡고 있다. 기엔 시를 수성할 때에도 큰 공을 세웠지. 전생의 내가 유일하게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남자였다.”
“농담을 들으니 형님이 살아 돌아왔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나는군요, 하하.”
이판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판은 정기호의 지지자이자 이졸데에게 맞서는 파벌의 수장인 듯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기엔 시가 시체들에게 넘어갔을 공산이 크니, 나도 일정부분 신세를 졌던 셈이다.
“잘 지내봅시다.”
나는 이판과 인사를 나눈 뒤 소미와 오르기를 소개했다.
“여긴 우리의 신임 장군님이신 진소미, 그리고 이쪽은 네가 없었을 때 합류한 마법사이시다. 귀한 몸이시니 잘 받들어 모셔.”
“간만이네요, 팀장님.”
소미가 방긋 웃으며 정기호에게 아는 척을 했다.
“오르기입니다. 모자란 재주나마 공화국의 번영을 위해 진력을 다하고자합니다.”
“가만.......”
정기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오르기를 살펴보았다. 오르기의 전 소속을 감안하면 안면이 없진 않을 것이다. 반면 오르기는 정기호가 과거 주군의 환생이라는 걸 짐작도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뵙게 되는군요.”
금발 머리카락을 길게 땋은 여성이 내게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일국의 국왕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나봅니다.”
정기호의 여동생, 이졸데였다.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었던 기억이 났다.
“예, 그랬지요.”
“그때는 경황이 없어 이제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스트리아령 전체가 전하께 큰 신세를 졌습니다.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대영주의 직분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힘껏 돕도록 하겠습니다.”
이졸데가 모두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했다. 주변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떠도는 공기에서마저 악의가 느껴졌다.
나는 귀족들이 두 그룹으로 갈라져있음을 읽어냈다. 이졸데를 지지하는 그룹과 정기호를 지지하는 그룹.
그들은 가문의 흥망을 건 도박을 벌이는 중이었다.
확실한 건 정기호를 지지하는 그룹이 훨씬 크다는 점이었다. 이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사내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판이라는 자가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에 분명했다.
“그럼 눈치 없는 동생은 이만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회포를 푸시기를.”
이졸데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판은 이졸데의 뒤를 따라 자연스레 퇴장했다.
정기호는 우리를 성 깊숙한 곳에 있는, 보안을 보장할 수 있는 응접실로 데려갔다. 그는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등을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짓도 못해먹겠군.”
그가 빈 잔에 향이 강한 과일음료를 넘치도록 부었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간단히 목을 축였다.
“슬슬 털어놔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 속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일지 몰랐다.”
“잃어봐야 고마움을 안다고 하지.”
“드디어 날 죽인 진범을 알아냈다.”
“누군데?”
“이판이다.”
“아까 그분요? 친척이라던?”
소미가 놀라서 되물었다. 정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짧게 한 마디를 남겼다.
“어쩐지 웃는 게 너무 살갑더라니.”
“널 보러 내려가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도시 바깥에서 죽으면 어디 가서 억울하다고 말도 못해보기 때문이다. 한 번 죽인 놈을 두 번 죽이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나.”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죽이려고 든다냐? 너 나름 괜찮은 놈이잖아. 재수가 조금 없다는 것 빼고는.”
“대영주의 아들로 태어난 죄다.”
정기호가 차갑게 조소했다.
“이판은 이졸데를 원했다. 걸리적거리는 나를 치워버리고, 그 점을 어필해서 동생의 마음을 살 계획이었지. 문제는 동생이 그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생은 날 싫어하긴 했어도, 암살은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그가 영주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너무 커서 차마 법정에 세울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정통성이 없다고 여겨지던 동생이 이판까지 적으로 돌리게 되면, 그야말로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 신세가 되고 말 테니까.”
“이판을 지금까지 살려둔 이유는?”
“내겐 그의 유죄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 그를 매장할만한 세력도 없고.”
정기호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키를 쥔 건 내가 아니라 이판이다. 내가 전생에 야즈였다는 걸 공인해준 것도 그놈이고, 여동생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도 그놈이다.”
“그런 사정이었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들고 있는 음료를 단숨에 비워버렸다. 시큼한 독소가 목을 타는 듯이 자극했다.
“한 가지는 바뀌었네, 이제 네겐 그놈을 매장할만한 세력이 있지.”
나는 이어서 소미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쇼 엔터테인먼트의 전문가도 와계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