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정체성 (2) >
“송구하오나 가급적 빠른 시일이었으면 합니다. 환자가 워낙 중태인지라...”
“정 급하면 차량을 따로 내어드리죠.”
“차량이라면 마족의 이동도구 말씀이십니까?”
“예, 반나절 안에 기엔 영지까지 도착할 겁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주군.”
오르기가 절박한 투로 말했다. 물론 나는 그를 위해 해주지 못할 게 없다. 그는 장차 모든 마법사들의 위에 군림할 잠재력을 지닌 자이니.
그러나 본인에겐 그런 자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는 오랜 세월 메소드 연기를 해온 탓에 너무 주눅이 들어버렸다. 저 외모에 재능이면 세상에 아쉬울 게 없을 텐데, 그는 볼 때마다 버림받은 강아지마냥 죽상이었다.
“마침 비서실장이 오는군요.”
박이나 실장의 구두굽 소리가 홀 전체에 또각또각 울려 퍼졌다. 왕성에는 정해진 출근시간이 존재치 않았으나, 그녀는 언제나 이 시간, 정각 아홉 시에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안녕하세요, 총독.......대통령님.”
그녀는 무심코 인사를 하다가 서둘러 인사말을 수정했다. 김형식 총리 덕에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잘 쉬셨습니까. 실장님.”
“네, 덕분에요.”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 수석마법사를 위해 차량 한 대만 수배해주시죠. 기엔 영지로 화급히 환자를 이송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박이나님!”
오르기가 서툰 한국어로 인사하자, 박이나가 보기 드물게 활짝 웃었다.
“오르기님. 앞으로 그런 일은 그냥 제게 말씀해주시면 되어요.”
박이나는 에신어를 제법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녀가 내게 전속된 기간을 고려한다면 기적이라 여겨질 만큼 빠른 언어습득능력이었다.
그나저나 나한테는 저런 웃음을 안 보여주던데.
잘생긴 사람은 얼굴만 쳐다봐도 재밌다는 게 바로 이런 건가.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에서 축전을 보내왔어요. 확인해보시겠어요?”
박이나가 내게 다가와 두꺼운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종이 상단에는 반짝이는 금박이 봉황의 형상으로 입혀져 있었다.
- 우리는 에신 민주공화국의 건국과 박봉팔 대통령의 취임을 진심을 담아 축하합니다. 우리는 대통령께서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할양 받은 권력을 양국간의 우호와 협력증진을 위해 아낌없이 발휘해주시리라 기대합니다...
나는 축전을 위에서부터 죽 훑어보았다. 낯간지러운 외교적 수사의 끝에는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이름과 서명이 굵은 글씨로 박혀 있었다.
“이게 벌써 올 줄 몰랐군요.”
“아직 국회의 비준이 남아있긴 하지만, 대통령께서는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보시잖아요. 그런 분이 하려는 일을 막을 순 없다는 것 정도는 그쪽도 이젠 깨달았을 테니까요. 막을 수 없다면 협력해서 잘해보자는 뜻으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나도 그들과 잘해보고 싶다. 나는 연방제가 궁극적으로는 두 나라 모두에게 이득이 되리라 믿었다.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무척 골치 아픈 곳에 위치했다. 군사력이나 경제규모는 남부럽지 않을 레벨에 올랐으나, 주변국들이 워낙 막가는 놈들뿐이라 뭘 하려고해도 바깥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독자적인 움직임으로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우리의 막대한 천연자원은 수출입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대한민국 경제에 활로가 되어줄 것이다.
군사적으로도 우리는 대담한 행보를 이어나갈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직할령이나 속령은 아니니, 혹여 예기치 않은 마찰이 발생하더라도 대한민국은 1차적인 책임소재를 피해갈 수 있으리라 보았다.
“답신을 해야 할까요?”
“저는 하는 걸 추천드릴게요. 그쪽이 절차를 건너뛰는 성의를 보였으니 대통령께서도 뭔가 보여주셔야 오고가는 정이 있겠죠?”
“흐음......”
박이나는 내 얼굴을 읽고 속마음을 귀신같이 캐치했다.
“제가 초안을 써드릴 테니 보시고 첨삭해주셔요.”
“알겠습니다.”
나는 글쓰기를 싫어했다. 싫어하고 싶진 않았으나 재능이 없었다. 직장에서 허구헌날 깨졌던 것도 서류작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알현실 바깥에 아침 일찍 포탈을 건너오신 빈객이 계세요.”
“누굽니까?”
“에신 프로젝트 멤버이신 진소미님...”
“들어오시라고 하시죠.”
나는 박이나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전 안으로 한 소녀가 걸어들어왔다.
언제나와 같이 어깨어림에 닿는 단발머리.
큼직한 갈색 눈동자엔 장난기가 그득했다.
그러나 나는 소미의 외모나 눈빛 같은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발산하는 마력의 크기가 너무나도 장대하여 흡사 태산을 마주하는 듯했다. 그녀도 나와 떨어져 있는 동안 대단한 진전을 이뤘음에 틀림없었다.
“안녕하세요, 대통령 각하.”
소미가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며 어절 단위로 끊어서 인사를 했다. 나는 왕좌에서 일어나 단상을 걸어내려왔다.
“여긴 어쩐 일이니, 많이 바쁠 텐데.”
“저야말로 오빠한테 묻고 싶은데요. 건국하는 날 왜 저 안 불렀어요?”
“그야 네 스케줄도 있고, 테일리시도 챙겨야 할 테고...”
변명할 말이 궁했다. 기실 내가 그녀를 부르지 못한 이유는 그녀가 나와 동등한 신격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에사인이 에사인을 부려먹는다는 소리는 황제와 일곱 권능 말고는 들어본 사례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에게 아무 자리나 줘서 곁에 두고 싶건만, 내가 먼저 나서서 챙겨주겠다고 말하기가 애매했다.
“이젠 안 바빠요. 테일리시는 선생님들이 알아서 잘 가르치고 있고요. 저는 반년 동안 쉰다고 회사에 말하고 왔으니까.”
“반년이나?”
“왜요, 오빠만 고향 구경하게 두라고요?”
그녀가 검지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건 아니다만.”
“괜찮은 거죠?”
“그래, 괜찮을 것 같다.”
소미가 있어준다면 나야 좋다. 그녀 한 명의 가세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아.”
그녀가 내게 오른손바닥을 쫙 펴서 내밀었다. 그녀는 의아해하는 내 눈을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아이, 저 아이돌 휴업이라니까요. 그럼 알아서 한 자리 주셔야죠.”
“아무거나 상관없어?”
“네."
“그러면 장군해라.”
“네?”
이번엔 소미가 당황할 차례였다.
“남는 자리가 몸 쓰는 일뿐이야. 사무직은 배우신 분들이 다 채갔거든.”
“...상관없어요. 저도 싸워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으니까.”
소미가 앙증맞은 주먹으로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아이돌은 휴업인 게 맞나보다. 문제적 발언이 서슴없이 나오는 걸 보면.
“그리고 시간 남으면 병사들한테 공연도 부탁해볼까 하는데, 어때?”
“장군님더러 지금 공연을 하라고요?”
“퀄리티는 상관 안하마. 어차피 음악같은 거 안 듣고 살던 애들이라.”
소미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졌다. 그녀는 잠시 후 자세를 바로하며 물었다.
“병사라는 게 크록들 맞죠?”
“맞아."
“퀄리티 상관없으면 할게요. 귀여운 크록이 방청객이라면 얘기가 다르죠.”
“고맙다.”
“대신 진짜 편하게 할 거예요. 여긴 스탭들을 부를 수도 없으니까, 벌판에서 생목으로 라이브할지도 몰라요.”
“기대하고 있을게.”
“출발은 언제쯤이에요?”
그녀는 우리가 출진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온 듯했다. 나는 박이나 비서실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5천인의 출병준비를 하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이틀 내로 끝내놓을게요.”
출정을 준비하는 건 비서실장의 일이 아니었으나, 말했다시피 아직 우리 정부에겐 근본이랄 게 없었다.
특히 군을 이끌어야 할 크록 장군들에게 실무경험이 전무한지라, 살림을 도맡아줄 살림꾼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오빠, 그거 알아요?”
소미가 나를 은근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뭘?”
“오빠 처음 봤을 때에 비해서 엄청 변했다는 거.”
“그런가?”
“사람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매력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마치 수백 번 무대 위에 올라본 아이돌처럼.”
“아이돌은 너무 나갔다.”
“흘려듣지 마세요, 현역 아이돌이 평가하는 거예요.”
“휴업중이라며.”
뭔가 변하기는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카리스마야말로 에사인이 되어간다는 증거였으니.
물론 카리스마의 형태는 저마다 다르다. 공포로 억압할 수도 있고, 시스템으로 세뇌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 카리스마의 실체는 아직까지 불분명했다. 사람들이 조금씩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걸 보자면 나쁘게 작용하지는 않는 듯하나.
이틀 후, 서부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다섯 개의 천인대가 편성되었다. 생산활동에 전념할 인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병력이 동원된 셈이다.
다수의 크록들로 채워진 조잡한 임시국회가 출범한 날, 우리는 간단한 출병식을 치른 후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급유 문제로 차를 가져가진 못했으나, 도로가 예전보다 훨씬 넓어져 있어서 걷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이번 출진을 함께하는 장군들은 다음과 같았다.
소미, 크롱크, 오르기.
크롱크는 나만큼이나 바쁘신 몸이었으나, 제이드를 내가 처리해버렸다는 불만으로 주둥이가 댓 발이나 튀어나와있었기에 부득불 최종 엔트리에 포함이 되었다.
우리는 기엔 영지에 도착해 잠깐의 휴식을 가졌다. 기엔의 젊은 영주 라드는 대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스트리아로 떠났다고 했다. 라드뿐만이 아니라 정기호, 이졸데, 카룩카이, 료헤이도 스트리아로 향했다고 전해졌다.
“라힐님, 잠시 행군을 멈춰야합니다, 큼.”
기엔 영지를 완전히 벗어났을 때였다. 크롱크가 내게 쉬어갈 것을 요청했다.
“전군, 정지!”
“여기서 쉬어간다, 정지하라!”
장교들이 고함을 치며 대열 사이를 돌아다녔다. 나는 외진 수풀에서 크롱크의 부하로 짐작되는 정찰병 한 명이 기어 나오는 걸 발견했다.
나는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그곳에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는 마력을 극도로 억누른 데다가 주변 환경과 비늘 색까지 맞추고 있어서 탐지가 거의 불가능했다.
“크롱크, 네 부하들이 몸 색깔을 바꿀 수 있었나?”
“그렇습니다, 큼.”
“그런데 차수진 박사는 왜 그걸 몰랐지?”
“저희가 굳이 얘기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큼.”
“......그렇군.”
하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먼저 이러저러한 능력이 있다고 이실직고하는 것도 이상하다.
“고생했다, 형제여.”
크롱크가 부하에게 노랗고 자그마한 물건을 넘겨받았다. 깜찍한 인형 모습의 캐릭터 USB였다.
“뭐냐, 그건.”
정말로 알고 싶었던 건 언제부터 그런 팬시상품에 관심이 있었냐는 것이었다. 크롱크는 새삼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닷새 동안 스트리아 부근을 정찰한 영상자료입니다, 큼.”
“여기서 틀 수 있겠냐?”
크롱크가 가방에서 노트북을 주섬주섬 꺼냈다. 그는 가져온 노트북에 USB를 삽입하여 영상을 재생할 준비를 마쳤다. 기계장치를 다루는 솜씨가 동호인 생활 십 년은 해본 듯 노련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동영상을 보기 위해 다른 장군들과 함께 크롱크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 치지직.......지직.......
몇 초간 화면깨짐 현상이 있었다. 잠시 후 스트리아 도시의 높다란 벽이 나타났다. 영상이 제공하는 시점이 상당히 낮았다. 암살형 개체의 눈높이가 가뜩이나 낮은데다가, 땅에 엎드린 채 촬영을 한 탓인 듯했다. 안 그래도 높다란 성벽이 낮은 시점과 결합하니 마천루처럼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카메라는 스트리아 주변 평야에 주둔중인 군대를 중점적으로 잡았다. 족히 이삼십만은 될 법한 대군이었다.
"영주들의 연합군이로군요.”
오르기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감상은 사뭇 달랐다.
“이런 병력을 두고 지원을 안 왔단 말이지?”
영주연합은 킬데인과 일본의 연합군을 양과 질로 찍어 누를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대영주직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이 얼마나 심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곧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아주 더럽고 협소한 건물 안이었다. 한 초췌한 사내가 찢어진 털가죽과 사슬갑옷을 걸친 채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저건 북풍의 전사단원이 아닌가요?”
오르기가 자신 없는 투로 물었다.
북풍의 전사단은 울토르가 이끄는 직속 전사단이다. 무적의 에사인을 보좌하는 만큼 그들도 위명이 대단했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허름해진 복식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높은 위명과 매치될만한 게 조금도 없었다.
특히 저 넋이 나간 듯 얼빠진 얼굴이.
“중국군을 본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가 카메라 뒤에서 사내에게 질문했다. 발음이 깔끔한 것으로 추정컨대 크록은 아니었다.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카메라 뒤에 선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계속했다.
"당신은 중국군과 싸웠습니다. 누가 이겼나요? 울토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중국군이 부리는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어떻게 싸우던가요?”
사내의 눈동자가 갑자기 아래위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보이고 있었다. 카메라가 그의 입술을 코앞까지 줌인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발음으로 간신히 한 단어를 만들어냈다.
“정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