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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74화 (74/205)

74화. < 정체성 (1) >

드디어 에신 공화국이 건국되었다. 사흘 전 발발한 전투 때문에 일곱 명이 추가로 사표를 쓴 것 말고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일곱 명만 사표를 썼다는 게 의외였다. 그때 나는 초대내각이 텅 빌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간밤에 평안하셨는지요, 총독대행님.”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학자풍의 남자가 인사를 하다 서둘러 말을 수습했다.

“죄송합니다, 이제는 대통령이시죠.”

나는 왕좌에 앉은 채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예. 총리께서도 편히 보내셨습니까.”

그는 초대내각의 살림꾼이 될 남자, 김형식이었다. 그는 나를 보좌하기 위해 교수직도 내려놓았다고 한다.

학계에서 나름 명망이 있던 인물이라, 저쪽 세계에서는 그의 사표가 이슈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도 왕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연장자를 높은 자리에서 굽어보고 있노라니 마빡이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주문한 침구는 새로운 포탈이 완공되어야만 도착합니다만, 이곳이 여생을 다할 곳이라 생각하니 잠이 솔솔 오더군요, 허허."

김형식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여담이지만 발카사르가 연 포탈은 하루만에 철거되었다. 대신 오르기가 더 넓은 포탈을 열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포탈 골조는 오르기의 능력에 맞춰 6차선 넓이로 제작되는 중이었다.

“지내기 나쁘지 않으시다니 다행입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박이나 비서실장에게 뭐든 요청하시면 됩니다.”

“당장은 떠오르는 게 없군요. 나중에라도 필요한 게 생긴다면 꼭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덕담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은 어떤 안건을 가져오셨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기 다소 저어됩니다만, 엊그제 벌어졌던 전투 때문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건준위 위원들은 대부분 전후세대로서, 누군가가 죽어나가는 걸 실제로 본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 모가지를 깡통 따듯 따버리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제이드가 먼저 우리를 죽이려 들었다는 당위성이 있다한들, 심정적으로 납득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니.

“뒷말이 나오지 않으려면 후속조치를 잘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뒷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우선 해당하는 법조문을 만들어야합니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대통령께서 행하신 조치는 대한민국 법제상으로는 정당방위 요건을 충족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형법을 섣불리 건드리면 법을 악용할 우려가 커집니다. 때문에 저는 대한민국 헌법 20조를 바꿔 적용할 것을 건의 드립니다.”

“헌법 20조가 뭡니까?”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라고요?”

“그렇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우리가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는 한 계속 허용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제가 나름대로 연구를 해온 바 에신은 정교분리가 불가능한 사회더군요. 그렇다면 법도 그러한 실정을 반영해서 만들어져야합니다. 법이란 시대상을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물이니까요.”

“이를테면 심판자의 권위를 어디까지 인정하느냐가 법에 담긴다는 말씀이시로군요.”

“예. 신법이 인법 위에 선다면 많은 문제가 간단히 해결됩니다. 신은 인간의 삶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지만, 인간의 사법체계로 신을 교화하거나 벌을 주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그렇다면 제이드란 자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도 신법과 신법의 충돌이 낳은 부산물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대담한 발상이십니다. 사람들이 납득할지는 의문이지만.”

정교분리의 원칙.

프랑스 혁명 이후 근대국가의 헌법조문에 앞다퉈 채택된 이념이다.

이걸 버리자는 건 법학자를 그만두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물론 김형식은 이미 교수직을 던지고 온 몸이긴 하다만.

“실제로 황국은 여러 신들과 함께 살아가는 점을 고려하여 독자적인 법체계를 발달시켜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황국의 법조문을 참고하여 우리 고유의 법제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리하시죠, 어차피 총리께 부탁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에 따르는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법을 반포하려면 국민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의회가 필요합니다. 허나 저희는 아직 선거를 치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므로, 부득이하지만 제대로 된 국회가 출범할 때까지는 임명을 해서라도 임시국회를 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회라...”

달가운 단어는 아니었다.

여당이니 야당이니 하는 소리가 내 평생 도움이 될 일이 드물었다는 것을 돌이켜본다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의회정치의 순기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설령 내가 진정한 에사인으로 거듭난다고 한들, 복잡한 현대사회가 자아내는 수많은 이해충돌을 항상 올바르게 판단한다고 자신하진 못했다.

“좋습니다. 의회 없이 공화국을 자처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면 추천은 어떻게 하시겠는지...”

“마침 적임자가 있습니다.”

나는 근위병에게 에신어로 지시를 내렸다.

“가서 크롱크와 막시무스를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근위병이 철판에 휘감긴 꼬리를 질질 끌며 두 장군을 찾아 나섰다.

머지않아 크롱크와 막시무스가 나란히 홀에 입장했다. 오늘도 여전히 위엄이 넘치는 막시무스에 비해 크롱크는 심통이 난 어린아이 같았다.

"부르셨습니까, 위대하신 분."

막시무스가 방패로 홀 바닥을 짚으며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그는 운하 건설작업을 감독하다 온 것 같았다. 진흙이 정강이 높이까지 잔뜩 묻어있었다.

“라힐님, 어쩐 일이십니까?”

크롱크는 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두 갈래로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는 워낙 맡고 있는 임무가 많아 하던 일을 짐작키 힘들었다.

“너희에게 의견을 구하마. 우리는 제이드란 자의 시신을 심판자 그니르의 본거지와 통하고 있으리라 추측되는 포탈로 던져 넣었다. 그니르는 나의 도발을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니르는 심판자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막시무스가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위대하신 분께서는 언제나 옳고 그름을 꿰뚫어보시며, 우리가 지은 죄과의 무게를 낱낱이 달아보십니다. 심판자란 오롯이 위대하신 분만이 누릴 수 있는 칭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의 선지자가 거짓된 심판을 일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큼.”

크롱크가 흥분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막시무스는 석상처럼 우뚝 선 채 말을 이었다.

“그러나 황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그를 적대하기란 어렵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바르고 공정한 모습을 보여 그를 따르는 자들의 신앙의 근간을 흔들어야합니다.”

크롱크가 붉은 볏을 흔들며 캇캇 웃었다.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얕은 생각입니다. 인간들은 우리가 조금 나아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간단히 신앙을 바꾸지 않습니다, 큼. 싸우지 않고 그니르를 무너뜨리려면 여론을 조작하는 방법이 가장 간단합니다. 자고로 거짓말 하나를 덮으려면 수십 배의 진실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제가 이런저런 말들을 지어내서 그 놈을 쫄딱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큼.”

“그건 협잡이다, 도마뱀.”

“하얀 거짓말이라는 거다, 못 배운 덩치놈아, 큼.”

두 크록이 서로를 헐뜯기 시작했다. 나는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만하면 됐다.”

나는 크롱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크롱크, 너는 이제부터 야당 당수다. 같이 국회를 꾸릴 크록들을 추천해라. 당명은 네가 알아서 정하도록 하고.”

나는 이어서 막시무스를 돌아보았다.

“너는 여당을 맡아라. 각자 140석씩 나눠주도록 하마. 두 정당이 280석씩 해먹고, 나머지 20석으로는 인간 교섭 단체를 만들면 되겠다.”

“라힐님, 이 머저리는 여당과 야당이 뭔지도 모릅니다. 이런 중대사는 조금이라도 더 고등한 크록에게 맡겨져야 옳습니다, 큼.”

“위대하신 분이시여, 명을 내려주신다면 감히 당신의 뜻에 의문을 품은 저 경망스러운 파충류를 제 손으로 처단하도록 하겠습니다.”

퉤엣.

크롱크가 주둥이를 오므리며 독침을 쏘듯 침을 발사했다. 막시무스는 바닥에 박아둔 방패를 옆으로 돌려 공격을 가뿐하게 막아내었다.

완벽했다.

두 크록은 모름지기 국회가 갖춰야할 모습을 완벽하게 시연해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방금 임시국회가 구성을 마친 모양이로군요.”

지켜보던 김형식이 촌평을 남겼다.

“저는 그러면 법률을 만들기 위한 밑작업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느냐에 따라 달렸지만, 기본적인 뼈대를 잡는 것만 해도 족히 반년은 걸리리라 여겨집니다.”

“총리님을 믿겠습니다.”

김형식이 알현실을 떠났다. 크롱크와 막시무스도 하던 일을 찾아 떠나자 대전에는 나와 근위병들만이 남겨졌다.

왕좌란 이렇게나 고독하다.

백성들로부터 민원이 잇따라 들어오고, 고위귀족이 찾아와 야망을 어필하고.

영화에서 봤던 그런 일들은 아직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다. 왕권의 보장을 위해 하루속히 통신망을 깔아야 할 듯했다. 심심하면 웹서핑이라도 하게.

뚜벅뚜벅.

훤칠한 사내가 홀을 가로지르며 다가왔다. 신생공화국의 초대 수석마법사 오르기였다. 건국기념일날 창공으로 날아오른 그는 문자 그대로 한 마리의 백조가 되었다.

쑥 들어간 T존과 우수에 찬 황갈색 눈동자, 갈기갈기 풀어헤친 머리카락.

보는 각도에 따라 고뇌하는 예술가 같기도 했고, 패션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모델 같기도 했다.

이런 양반이 지구로 간다면 나처럼 칼 들고 설치지 않아도 외모만으로 너끈히 에사인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주군을 뵙습니다.”

오르기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내게 인사했다.

근본이 없는 나라라 아직 호칭조차 통일하지 못했다.

한국어를 쓰는 사람, 에신어를 쓰는 사람이 따로따로라 내각의 구성원들끼리 소통이 안 되는 것도 문제였다.

“포탈은 어떻게 되어갑니까?”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신 덕분에 종래보다 더 큰 포탈이 순조롭게 만들어지는 중입니다. 닷새 후면 통행이 가능하리라 예상됩니다.”

“사피스 단장은 좀 어떻습니까?”

오르기의 낯빛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용태가 좋지 않습니다. 적대적인 마력이 신경조직까지 침투하여 몸달래풀만으로는 회복이 어렵습니다. 신체기능을 수복하려면 치료술을 터득한 주술사가 필요합니다.”

‘치료술을 터득한 주술사.’

그의 표정이 어두운 원인이었다.

이 땅에 만병통치약 같은 마법의 풀은 존재하지만, 만병을 고치는 마법의 주문 따위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치료술사라함은 변화의 에사인을 따르는 사제를 일컬었다.

그들의 술법은 보는 관점에 따라 치료라 여겨질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암환자의 종양을 없애진 못한다. 다만 종양을 변화의 에사인 취향의 다른 기관으로 바꿀 수는 있었다.

눈, 촉수, 더듬이라던가 편모 따위로.

“살고는 봐야죠.”

“예, 반드시 살려내야 합니다. 사피스 삼촌은 제게 부모와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마침 잘 됐군요. 곧 군대를 몰아 북쪽으로 떠날 참이었습니다. 그때 같이 가십시다.”

나는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친우를 떠올렸다.

정기호와 카룩카이.

게다가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간 료헤이까지.

웬만한 일로는 그들의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

서부전선에서 변고가 생겼거나, 대회의 일정이 꼬여가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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