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 건국 (14) >
“하.......이놈이나 저놈이나 귀찮게만 하는군.”
제이드는 오르기가 자신에게 맞서려는 걸 보며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오르기, 네 상대가 아니다!”
발카사르가 녹초가 된 몸을 추스르며 다급하게 외쳤다.
“스승님이 당한 걸 보고도 모르겠냐? 제이드는 여섯 번째 권능의 비호를 받고 있다. 나 같은 천재가 아니고서는 그를 막을 수 없어...!”
발카사르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르기가 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짙게 깔린 구름이 그에게 화답하듯 천둥소리를 내었다.
곧 바람을 타고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손바닥을 펴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받아보았다.
눈송이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손바닥 안으로 스며들었다. 손바닥에서는 따스한 온기만이 느껴졌다. 실존하는 물질이 아닌, 마법으로 창조된 환상이 었다.
“이것은.......이 마법은 그 여자의 것인데......”
제이드가 발치에 사박사박 깔리는 눈을 내려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지금껏 둘이서 작당하고 숨겨왔단 말이냐? 그 여자의 재능과 기술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제이드가 사납게 되물었다. 오르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냉기의 결정체가 그의 머리 위 허공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제이드는 재빨리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는 로브 안주머니에서 얇은 책자를 꺼내들더니, 다른 손으로는 오르기를 가리키며 소리 높여 외쳤다.
“심판자께 고하나이다! 여기 당신의 신성한 재판정을 더럽히는 죄인이 있사오니, 입을 열면 거짓을 토해낼 뿐이며, 율법을 가벼이 여기었고, 혼미한 마음으로 악행을 일삼았으며!”
제이드가 한 마디씩 말을 끊을 때마다 그를 둘러싼 마력이 계단식으로 증폭되었다. 그가 뿜어낸 열기는 오르기의 냉기를 몰아내며 자욱한 안개를 형성했다.
심판자 그니르의 힘은 불꽃과 관련이 깊었다. 죄를 근본적으로 정화하기 위해서는 죄를 지은 부위를 불살라버려야 한다는 게 그가 세운 교리의 기틀이었다.
“막시무스, 가서 인간들을 지켜라.”
나는 막시무스에게 건준위 위원들을 보호할 것을 명령했다. 오르기와 제이드의 충돌이 임박했다. 마법사는 전사처럼 몸으로 치고받지 않았다. 방어마법으로 수비를 견고히 한 뒤, 서로를 가진 최고의 기술로 후려치는 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막시무스가 방패를 내민 채 쿵쿵 달려나갔다. 건준위 위원들은 이미 사방팔방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오르기의 공격마법이 작렬한 게 그때였다.
콰자자자작.
거대한 얼음의 창이 포탄처럼 날아가 도시를 일직선으로 관통했다. 붉은볏나무로 만든 가옥들이 사정없이 찢겨나갔다.
뻥 뚫린 통로에는 얼음기둥이 흰 서리를 내뿜으며 서릿발처럼 자라났다. 그 모습이 흡사 종유동굴을 연상시켰다.
오르기의 공격은 단발성에 그치지 않았다. 두 번째 얼음의 창은 완성이 훨씬 빨랐다. 세 번째, 네 번째에 이르러서는 딜레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눈발이 마법의 연사를 돕고 있었다.
“미, 미친.......”
발카사르의 입에서 비속어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스케일이 다른 전투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사피스가 입이 닳도록 말했던 ‘백 년만의 천재’란 오르기를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그는 오르기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발카사르를 통해 전해주었던 것이다.
“라힐님, 인간이 너무 막나가는 것 같습니다, 큼.”
크롱크가 좁은 눈을 영활하게 굴리며 말했다. 크롱크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타고났다. 그는 상황이 보이는 것처럼 오르기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니르의 신성한 불로 너희의 죄를 정화하겠다!”
제이드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모습은 휘날리는 눈발과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오르기가 무리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오르기는 분노에 사로잡혀 가진 힘을 두서없이 쏟아내는 중이었다.
그의 마력은 제이드를 압도하고도 남았으나, 승부는 마력의 크기만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경험과 냉정함'
암살자의 신조는 이런 싸움에서도 유효하다.
제이드는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을 만큼만 보호마법을 유지하며 침착하게 공격을 버텨내었다.
그는 실로 노련한 투사였다. 반면 오르기는 제대로 된 싸움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에게 단 한 차례의 경험만이라도 있었다면 전투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을지도 몰랐다.
“죽어, 그만 죽으라고!”
오르기가 힘을 쥐어짜내며 절규하듯 소리쳤다. 얼음의 창은 이제 연발도 아니었고, 크기와 위력이 몰라보게 줄어들었다. 바닥이 없을 것만 같았던 마력이 마침내 고갈을 앞두었다.
“쿨럭...”
오르기가 허리를 휘청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입가를 타고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계돌파 현상.
마법사가 마력을 가진바 이상으로 쥐어짜낼 때 자연계에 지는 빚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 빚은 고스란히 육신에 대한 부담으로 되돌아왔다.
“나쁘진 않았다.”
제이드가 보호마법을 물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니르님의 심판을 피해갈 순 없다. 똑똑히 잘 보거라. 네 어미와 같은 최후가 준비되어 있으니.”
제이드가 소환한 불의 장벽이 파도처럼 뻗어나갔다. 오르기는 망연자실하게 선 채 그것을 쳐다만 보았다. 나는 등에 찬 양손검을 꺼내며 오르기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후우웅.
매서운 검풍이 불의 장벽을 둘로 쪼개놓았다. 궤도를 벗어난 불꽃은 나와 오르기를 스쳐 지나가 포탈 골조에 옮겨 붙었다. 가공할 마력의 업화가 차원의 장벽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타오르는 불의 장벽에 둘러싸인 채, 나와 오르기는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복잡한 감정이 뒤얽힌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드디어 혼자 일어서셨군요.”
나는 오르기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보여주었다.
"이젠 제가 증명할 차례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방패막이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죠."
나는 양손대검을 사선으로 늘어뜨리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아, 비늘 달린 종족의 왕이 드디어 나서는군.”
제이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는 그의 도발에 이상하리만치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제이드 같은 부류는 지구에나 에신에서나 흔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성을 던져버린 자들. 수없이 만나본 족속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기분을 묘하게 긁는 중이었다.
“불경한 짐승들의 목자야, 그니르님의 심판이 도래했다. 네 죗값은 전신을 공양해야만 치를 수 있을 것이다.”
제이드의 몸을 휘감은 화염이 더욱 거세졌다.
나는 검극으로 땅을 긁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걸으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이 더러운 기분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타올라라!”
화염의 장벽이 세차게 솟구쳤다. 공터 전체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것만 같은 엄청난 기세였다. 어디에서인가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총독대행님!”
박이나 보좌관의 비명이었다. 나는 대검에 마력을 있는 대로 집어넣어 전방을 향해 힘차게 휘둘렀다.
응징의 일격.
깊은 죄업을 담은 검날이 대지를 철천지원수 대하듯이 후려쳤다.
쩌저저적.......
섬뜩한 소리와 함께 지표가 검은 속살을 드러내었다. 지면이 힘의 진행방향을 따라 쭉쭉 갈라지며 석주처럼 위로 솟아올랐다. 화염장 벽은 검압이 만들어낸 진공에 휘말며 신기루처럼 소실되고 말았다.
“세상에...”
아마 디나 같은데, 누구의 목소리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나는 나대로 놀라는 중이라.
최근 내 힘이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긴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건 늘어난 지구력이었다. 적지 않은 마력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준비운동을 시작한 듯한 고양감이 들었다.
“이런 힘은.......이건 보고받은 것과 다른데...”
제이드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나는 율법의 수호자다. 심판자께서 이미 내 승리를 안배하셨다!”
그가 심판자를 또다시 언급하자, 나는 비로소 그가 자꾸만 거슬리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는 유죄다.”
“뭣이?”
불의를 정의로 포장한 죄.
그니르는 나와 내세운 가치가 비슷했다. 심판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상 그와 나는 양립이 불가능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각을 차분히 정리했다. 바야흐로 이 세계에 새로운 법칙이 정립되고 있었다.
나는 새로이 탄생한 법칙을 따라 마력을 배열해보았다. 나는 오른손을 뻗어 완성된 술식을 발동했다.
응보의 족쇄.
마력을 사용하는 기술 중 하나를 무조건적으로 봉쇄한다.
억지로 족쇄를 깨뜨린다면 족쇄의 파편이 적을 내부에서 타격한다.
제이드는 자신이 어떤 술법에 걸려들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나를 노려보며 재차 불의 장벽을 일으켰다.
“타올라라, 죄인이여!”
그러나 일어나는 변화는 없었다. 그는 당황하여 몇 번이나 주문을 시도했으나,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끌어내지 못했다.
“왜지, 갑자기 왜 마법이 나가지 않는 것이지? 그니르시여,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제이드, 남길 말을 듣겠다.”
그가 황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잠깐, 마법이 나가지 않...”
그의 목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나는 십 미터 거리를 이격하고 검풍만으로 그의 목을 베어냈다.
“막시무스!”
나는 사람들을 지키러 떠났던 거인을 호출했다. 거대한 크록이 내게 다가와 방패로 땅을 짚으며 말했다.
“분부를 내리십시오, 위대하신 분이시여.”
“영내에서 황국인 한 명이 원인불명의 사고로 사망했다.”
나는 불타는 포탈 골조를 턱끝으로 가리켰다.
“우리 소관이 아니니, 왔던 곳으로 보내주어라.”
“알겠습니다.”
나는 대검을 검집으로 되돌리며 오르기에게 다가갔다. 오르기는 검은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린 채 죽은 제이드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제의했다.
“수석마법사, 어떻습니까?”
“예?”
“아실지 모르시겠지만 오늘이 우리의 건국기념일입니다. 마침 수석마법사 자리가 공석이어서요.”
“그렇군요......”
오르기가 무심코 주변을 곁눈질했다. 기껏 지어놓은 집들은 아이스크림처럼 얼어버렸고, 포탈은 화관마냥 타오르는 중이었다. 야심차게 만들었던 팔차선 도로는 응징의 일격을 맞아 골짜기로 화하고 말았다.
나는 무너진 도로 끝에 김형식 교수가 매달려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다리가 느린 탓에 미처 도망을 치지 못했던 듯했다.
“마침 국무총리도 저기 있군요.”
박이나 보좌관도 보였다. 그녀는 포탈 뒤에 숨어있었다. 포탈이 뭐든지 빨아들이는 것에 착안한 현명한 대처였다.
“수석마법사에, 국무총리에, 보좌관과 장군들도 있으니, 그냥 여기서 건국을 선포해도 되겠습니다.”
나는 대검을 들어 힘차게 땅을 내리찍었다. 또 땅이 쪼개지지 않을까 우려했는지 몇몇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