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건국 (13) >
세상은 이미 뒤집어졌다. 포탈이 벌집구멍처럼 열리고, 듣도 보도 못한 이차원의 문명이 나타난 그 날부터.
황국은 각지에서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변수를 감당해낼 능력이 없었다. 전쟁에서 이기건 지건 변화는 필연적이었다.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기는 합니다. 그 변화가 지속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르기가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그러면 지켜보시죠.”
“무엇을 말입니까.”
“심판자의 끄나풀들이 이 땅에 새로운 에사인이 생겨나지 못하게 막아왔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지금부터 8일후, 저는 제이드에 의해 어떻게든 국왕노릇을 하지 못하게 될 게 아닙니까? 정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렇게 되는지 지켜보고 나서 결정하시면 됩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자신하시는 겁니까?”
“저도 당신과 똑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벼랑 끝에 서있을 뿐입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똑같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겁니다. 혼자의 힘만으로 에사인이 될 수 있었다면 나라를 세울 일도 없었겠죠."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8일 후 봅시다.”
날짜를 못 박고 나자 시간이 술술 흘러갔다. 하루하루를 쫓기다시피 보내다보니 여드레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있었다.
왕성은 아침부터 임전태세에 돌입했다. 크록 목수들이 급조해낸 투박한 가구들이 너른 홀을 꽉꽉 채웠다.
잘 닦인 접시가 테이블 위로 끝도 없이 날라져왔고, 요리사들은 얼마 되지 않은 재료로 뭔가를 만들어보려 씨름을 하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총독대행님.”
박이나 보좌관이 내게 다가와 사무적으로 인사했다.
그녀는 수수한 회색 드레스를 입은 채 장갑을 낀 손으로 서류를 들고 있었다.
“최종 참석자명단이 나왔는데, 확인해보시겠어요?”
“어디 봅시다.”
박이나가 내게 들고 있던 서류철을 건네주었다. 몇 장 넘기지 않아도 될 만큼 단출한 목록이었다.
“뭐가 없군요.”
“그렇죠?”
김형식 교수와 장효진은 인사추천 리스트를 천 명으로 압축해냈다.
그러나 비밀프로젝트의 정체가 머나먼 격오지로 떠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그들 중 다수가 임용을 고사하고 말았다.
천 명 중에서 참석을 알려온 자는 178명이 전부였다.
“그래도 예상보다는 많습니다.”
“저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와주신다고 하셔서 안도했어요. 건준위분들의 섭외력이 대단했던 것 같아요.”
“정기호는 못 온다고 합니까? 명단에 보이질 않는데.”
“네. 아직까지 연락이 없으세요.”
“카룩카이도 아직입니까?”
“네.......다시 연락을 드려볼까요?”
“아닙니다, 이미 늦었죠.”
알아서 잘 하리라 믿어야지, 지금은 그쪽 상황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나는 박이나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착용했다. 김송화 장인이 납품한 의장용 갑옷이었다.
김송화 장인은 이제 카둔의 인정받는 신도가 되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이 갑옷은 기능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견줄 물건이 없을 만큼 걸출한 작품이었다.
갑옷을 입는 동안 크롱크와 막시무스가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왔다.
“라힐님,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습니다, 큼!”
“위대하신 분이시여, 조국의 건립을 만백성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두 크록이 간만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만 명도 안 되는 인원을 만백성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자.”
나는 두 장군을 좌우에 거느리고 왕성을 나섰다.
크록들이 왕성에서 포탈까지 이어지는 일자형 도로를 점거중이었다.
그들은 창이나 해머, 심지어는 소총이나 미사일 런처 등 갖가지 흉기를 흔들며 한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라힐! 라힐! 라힐!”
구령을 바꾸라고 하길 잘했다.
차마 이런 날까지 방봉팔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다.
며칠 전 보았던 작업장은 온데간데없었다. 목수들이 외벽을 남김없이 뜯어냈기 때문이다.
완성된 포탈 골조는 폭 10미터, 높이 4미터의 위용을 과시했다. 운송용 트럭 3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갈 수 있는 너비였다.
“안녕하십니까, 총독대행님. 이렇게 불러드리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습니다만.”
먼저 와있던 김형식 교수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저도 위원장님이라고 불러드리는 게 마지막이겠군요.”
그는 초대 국무총리로 내정이 되었다. 그는 워낙 여당쪽 인사들과 스킨십이 좋아 앞으로도 중용해볼 수 있는 카드였다.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장효진은 짧고 무덤덤한 인사말을 남겼다. 그녀는 최종명단에 합류하지 않았다. 돌볼 가정이 있다는 이유였다.
나는 다른 위원들과도 일일이 악수를 건넸다. 건준위 위원들은 장효진을 제외하고는 전원 이곳에 남는 걸 택했다. 그들은 나와 함께하며 이 땅에 가득한 잠재력을 충분히 보았던 것 같았다.
위원들과 악수를 끝내고 나자, 내 관심은 자연히 마법사들에게로 향했다.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듯 불안한 얼굴로 시선을 회피하는 오르기.
무표정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는 중인 제이드.
자신의 역작 앞에서 의기양양한 발카사르.
“전하, 참으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한 달을 열흘로 줄였으니 오래랄 것도 없겠습니다만, 제 기준이 범인들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하하.”
발카사르가 실없는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약속드린 자동차는 포탈을 열고 나서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대가 돼서 더는 지체할 수가 없겠군요.”
“그럼 진행하시죠.”
발카사르가 포탈에 가까이 다가섰다. 일순간 그가 두 손을 쫙 펼치자, 등 뒤로부터 붉은 연기가 높게 치솟아 올랐다.
“오오...!”
건준위 위원들이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붉은 연기는 곧 노란색, 파란색 등으로 다채롭게 변화했다.
포탈을 활성화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 쇼맨십이었다.
이윽고 상당한 양의 마력이 포탈의 골조를 둘러싸고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쿠우웅.......
난데없이 허공에서 묵직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골조 중앙의 텅 빈 공간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타격음이 들려올 때마다 현실의 경계가 엷어져갔다. 엷어진 현실의 경계에서 짙은 혼돈의 장막이 생겨나 점차 영역을 넓혔다.
츠츠츠츠.......
마침내 투입된 모든 마력이 소명을 다했다. 장막이 아파트 3층 높이에 달하던 골조를 완전히 집어삼켜 현실과 비현실의 틈새에 가두고 말았다.
발카사르가 뒤로 돌아서며 진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 제 할 일은 끝났습니다.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은 이만하면 만족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나도 함께 박수를 쳐주었다. 지금쯤 그는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나도 비슷한 상황을 겪어봐서 잘 알았다. 그는 남들 보는 앞에서 체면을 구길 수 없다는 일념만으로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이제 포탈이 잘 작동하는지만 확인하면 되겠군요.”
사람들은 이번엔 나를 향해 박수를 몰아주었다. 그들은 가장 빛나는 순간 누가 나서야할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막시무스에게 창을 건네받았다. 손잡이가 감겨오는 게 여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역시 나는 서류와 씨름하는 것보다 몸 쓰는 게 더 적성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라힐입니다.”
나는 포탈 앞에 서서 모두에게 인사를 올렸다.
에신1과 직원이 내 말을 한국어로 동시통역했다.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드리기 죄송합니다만, 보안상의 문제가 발생하여 포탈을 폐쇄하겠습니다. 이후 보여드릴 모습은 포탈폐쇄에 따른 조치이오니 당황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람들이 놀라서 되물었다.
나는 불문곡직하고 창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창날이 부르르 진동하며 검은 빛무리를 뿜어내었다.
나는 창을 들어 포탈의 정가운데를 조준했다. 왼발을 앞으로 힘 있게 내딛고, 오른발은 바짝 뒤로 당겼다.
“그만두십시오!”
누군가가 내 뒤통수에 대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는 들은 체도 안하며 포탈 안으로 창을 쏘아 보냈다. 혼돈의 장막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창대를 집어삼켰다.
“다음.”
막시무스가 곧바로 다음 창을 보급했다.
윙윙윙윙.
마력이 주입된 창이 물 만난 고기처럼 팔딱였다. 나는 이번에도 창을 들어 투척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뒤통수가 타오르는 듯이 뜨거워졌다. 대인공격용 마법이 후방에서 기습적으로 날아왔다.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사나운 광풍이 휘몰아쳤다. 샛노란 화염이 단상을 휘감아 너울너울 타올랐다.
아무런 방어동작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터럭만큼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거대한 크록이 내 앞을 제때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위대하신 분이시여.”
막시무스가 전면을 가린 방패를 내리며 내게 물었다.
마법은 그의 두터운 방패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연기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훌륭했다, 막시무스.”
나는 마법을 쓴 사람을 확인해보았다. 제이드가 두 손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마력의 잔재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제이드, 대체 무슨 짓이냐?”
사피스 단장이 제이드에게 호통을 쳤다.
발카사르는 상황 자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이드의 반응이었다. 그는 오르기처럼 한순간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스산한 살기가 전신에서 흘러나오면서, 평범하기만 하던 인상이 냉혹한 살인자의 얼굴로 바뀌었다.
“어떻게 알았나?”
“뭘 말이냐? 아, 포탈 좌표가 바꿔치기됐을 거라는 거?”
나는 대답 대신 발카사르를 쳐다보았다. 그는 뒤늦게야 대화 내용을 이해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천재가 잘못된 좌표로 포탈을 열었다고요?”
“좌표를 직접 받아오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때는 제가 바쁘던 터라.......하지만 저 같은 사람이 좌표나 따자고 발품을 팔고 다니는 건 이상하잖습니까? 평범한 마법사들이 주변에 없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하는군.”
나는 창을 바닥에 꽂으며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잡설은 이쯤하지. 나 라힐은 황국의 마법사 제이드를 기망과 살인공모죄로 체포하겠다. 양국간의 조약에 따라 재판은 황국의 법정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구나.”
제이드의 눈동자가 붉어져갔다. 범상치 않은 마력이 그의 전신에서 너울거렸다.
“나는 여섯 번째 권능의 수호자다. 그니르님의 의지가 곧 법이거늘, 감히 누가 우리를 법으로 심판할 수 있다는 말이냐? 나야말로 너를 처단하겠다. 너는 사회혼란을 야기하고 여섯 번째 권능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 죄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제이드의 마력이 끝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르기가 경고한대로 그에게는 마력을 순간적으로 몇 배나 증폭시키는 술법이 존재하는 듯했다.
“빌어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가 잇몸을 드러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크롱크, 전투를 해보고 싶다고 했지?”
크롱크가 붉은 볏을 사납게 펄럭였다.
“그렇습니다, 큼. 막시무스가 덩치만 큰 머저리라는 걸 똑똑히 보여드리겠습니다.”
“가봐.”
크롱크가 붉은 볏을 기쁨으로 활짝 펼쳤다. 그의 무기는 장검 두 자루였다. 그는 마치 춤을 추듯 화려한 움직임으로 공격자세를 취했다.
크롱크는 고작해야 생후 두 달 남짓한 신세대 크록이었다. 그는 그 짧은 기간 동안 누구에게도 배운 바 없이 자신만의 검술을 창조해냈다.
“기다려주십시오!”
갑자기 사피스가 제이드와 크롱크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흰 수염을 부르르 떨며 제이드를 나무랐다.
“이게 무슨 망발이더냐, 제이드! 우리는 스트리아 대영주님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왔다. 우리가 받은 명령 어디에 여섯 번째 권능이 있으며, 언도받은 권한 어디에 멋대로 법을 집행할 권리가 있느냐?”
“비키시지, 노인네.”
제이드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장님. 여기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나도 사피스를 말렸다. 그는 오르기를 지키기 위해 수십 년간 못된 삼촌 연기를 해왔다. 그가 이 타이밍에서 무리하는 것도 그런 연기의 일부이리라 예상되었다. 그는 이 문제가 외교적 마찰로 비화되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막으려는 자는 그런 상식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모네모의 단장으로서 명령하겠다. 당장 무릎을 꿇고 전하께 죄를 빌어라!”
“비키라고 했을 텐데!”
제이드의 손에서 눈부신 화염이 폭출되었다. 화염은 사피스의 방어마법을 산산이 깨뜨리고 노구를 휘감아 활활 타올랐다.
“단장님!”
“스승님!”
여기저기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르기가 재빨리 나서서 주문을 상쇄했으나, 사피스는 이미 치명적인 화상을 입어 생사가 불분명했다.
“잘 봤겠지, 심판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는 누구든지 이렇게 된다.”
제이드가 사피스의 몸뚱이를 발로 차 밀어버렸다. 사피스는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힘없이 나뒹굴었다.
“크롱크.”
제이드가 내게 다가서려 할 때였다.
“잠시 기다려라.”
나는 튀어나가려던 크롱크를 제지했다.
제이드의 뒤에서 한 사내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황토빛 눈동자가 분노에 차 섬뜩하게 빛났다.
검은 동공에는 단 한 번도 그 끝을 가늠해보지 못한 장대한 마력이 깃들어있었다.
오르기.
그는 고귀한 태생을 잊은 채 오리들 틈바구니에서 구박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때가 오면 그는 창공을 향해 날개를 펼쳐야만 했다.
“제이드.”
오르기가 두 눈에서 메마른 눈물을 흘리며 제이드에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숨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