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건국 (12) >
나는 이쯤에서 복면을 벗었다. 오해가 깊어진다면 정말로 누구 하나는 죽어나갈 것만 같았다.
“당신은.......”
오르기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라힐 전하가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를 시험하셨군요.”
오르기는 여전히 마력을 끌어올린 채 나를 경계의 눈초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일부러 엉뚱한 곳을 찔렀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를 해칠 의도가 없다는 걸 보이기 위해 검을 검집으로 되돌렸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꼭 확인해야만 하는 게 있어서 부득이하게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렇게 티가 나던가요?”
“아닙니다, 연기는 정말로 완벽하시더군요. 다만 제겐 타인의 거짓말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으로 당신이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찮게 알게 되었죠. 저는 공동체의 수장으로서 당신의 의도를 알아둬야만 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됐다고요?”
“제게 아무런 보상도 필요 없다고 말했을 때.”
오르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굳이 묘사를 하자면 울고 싶은데 웃음이 나오려는 사람 같았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기를 몇 차례 반복하더니, 검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고개를 젖혔다.
나는 아직도 그의 변신이 신기했다. 단지 눈빛과 자세만 변했을 뿐인데 완전히 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심지어 그는 발카사르보다도 더 호남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디나는 남자를 잘못 골랐던 것 같다.
“말씀하기 곤란한 사정이라면 오늘 일을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우린 서로 못 봤던 겁니다.”
"...그냥 가시면 안 됩니다.”
오르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는 결심을 굳힌 것인지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전하께서도 관련된 일입니다.”
“제가 말입니까?”
나는 의아하게 반문했다. 나는 그를 비롯한 다섯 마법사들과 아무런 안면이 없었다.
“이야기가 깁니다. 설명을 드리려면 제 개인사로부터 출발해야합니다.”
“말씀하시죠.”
“저는 죄인의 아들입니다. 제 부모님은 처형되었고, 가문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저는 귀족의 후계에서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었죠.”
“고위귀족을 처형했다고요? 그런 법은 제가 알기로는...”
나는 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에신의 법이 엄격하긴 하나, 귀족이자 마법사인 자를 처형하려면 반역죄 정도는 나와야만 했다.
“에사인이 되려고 한 죄입니다.”
그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잠시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다.
처음에는 그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에사인이 되려고 한 게 죄가 된다는 소리는 전생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황국에 그런 법이 있었습니까?”
“‘누구도 황제가 정한 질서를 부정해서는 아니된다.’ 법전 첫 페이지에 존재하는 조문입니다. 질서를 부정하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있지 않고, 처벌규정도 존재하지 않기에 사문화되었죠. 그러나 심판자 그니르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이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에사인이 되고자하는 행위를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합니다.”
여섯 번째 권능, 심판자 그니르.
그를 따르는 율법의 수호자들이 지랄맞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다.
그들은 필요악이었다. 법정이 공정할 것이란 보장을 해주는 동시에, 법을 내세워서 사람들의 숨통을 지나치게 죄였다.
사회의 오물인 오데르의 신도들과는 자연히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왜 저는 그 사실을 몰랐을까요? 저도 에신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습니다만 에사인이 되려하는 게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행동이 죄가 된다고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릴 때는 제 부모님께 죽어 마땅한 다른 중죄가 있었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제게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재능이 있는지 감시하려 드는 것을 보며 서서히 깨닫게 되었지요.”
문득 마법병 단장 사피스가 오르기를 구박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 실력은 어디 가서 모네모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수준입니다. 누이의 소망대로 키워내지 못한 것 같아 늙은이의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내 면전에서조차 면박을 서슴지 않던 모습이 부자연스럽기는 했었다. 그때는 내가 명목만 국왕일 뿐 내세울만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고위귀족으로서 할 말을 다 하는가보다 싶었다.
“사피스는 당신을 도우려던 거였군요.”
“예."
오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이 저를 야박하게 대해준 덕분에 초라한 목숨을 부지해올 수 있었습니다. 삼촌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제게 마법의 길을 열어주기도 하셨습니다. 세상이 뒤집어질 날을 대비해 힘을 키워야한다고요.”
오르기는 여섯 번째 권능을 속이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실력을 갈고 닦으며 목숨을 건 열연을 펼쳤다.
범상치 않은 사연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황을 듣자하니 당신을 감시하는 자가 근처에 있는 것 같은데, 누굽니까?”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다는 천재, 발카사르.
그런 발카사르에게 홀딱 빠진 여마법사, 디나.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미리 예습해왔던 남자, 제이드.
셋 중 하나를 고르라면 제이드를 꼽겠다.
발카사르의 중2병 감성은 진짜였다. 디나는 그런 발카사르에게 온통 정신이 팔려있어서 누굴 감시할 처지가 못 됐다.
반면 제이드는 존재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잠깐 전에 봐놓고는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자, 암살자가 되기엔 최고의 재목이었다.
“제이드입니다.”
역시.
“제이드는 그니르가 양성하는 비밀조직의 일원입니다.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잔인하게 탄압하고 있죠. 이 땅이 근 천 년 내에 새로운 에사인을 만들어내지 못한 데에는 그들의 공이 큽니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쪽은 이미 세상을 지배하지 않습니까. 굳이 비밀리에 활동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 점이 의문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모든 에사인이 그니르의 독단적인 행동을 지지하는 게 아닐 것이란 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강철의 에사인, 카둔은 소미의 여정을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있다. 술법을 빌려 쓰는 것도 눈감아줄 만큼.
운명을 관장하는 아바르는 내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아바르와 개인적으로 친한 울토르까지 감안한다면 우리에게 우호적인 에사인을 셋 이상으로 잡아도 좋을 것 같다.
“두 번째 이유는 희망입니다.”
“희망이요?”
“변화하지 못하는 세계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혼돈을 싫어하면서도, 혼돈이 가져다주는 희망이 체제를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나 노력만 하면 신분을 넘어서서 성공할 수 있고, 성공하는 걸 넘어서서 에사인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기길 바랍니다.”
“그것 때문에 저와도 무관하지 않은 일이라고 하신 겁니까? 제가 에사인이 되고자 하니까요?”
“예."
오르기가 긍정했다.
“저는 고작해야 가능성이 있는 후보군중 한 명일 뿐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혼돈이 이 세계에 불러일으킨 격변 그 자체이십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수가 있나. 나름대로 황국과 잘 지내보려고 애를 써왔건만.
그러나 심판자 그니르의 존재는 나도 불편했다.
단지 전생에 암살자여서 그가 싫은 게 아니다.
심판자라니, 컨셉이 너무 겹치는 거 아니냐고.
“저는 오랜 세월 성공적으로 그들을 속여 왔습니다. 제이드는 더 이상 저를 예전처럼 열심히 감시하지 않습니다. 그가 굳이 사절단의 일원이 되기를 자처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보입니다. 추측컨대 그는 전하를 위한 특별한 계획을 준비해왔을 겁니다.”
“암살입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암살이라면 이골이 나있다. 웬만한 시도는 자면서도 간파해낸다 자신했다.
“아니오, 그들은 결코 암살을 하지 않습니다. 사후에 신격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망한 이후에 추종자들에 의해 신격화되어 에사인으로 등극한 전례가 존재합니다.”
“암살이 아니라면 어떤 방법으로 저를 막는다는 겁니까?”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중 하나가 포탈을 사보타지하는 작전이다.
내가 아약을 죽여서 포탈이 열리는 걸 막으려고 했듯이, 제이드는 발카사르를 죽여서 내 계획을 저지한다는 것이다.
포탈이 취소되면 식량을 들여올 수도 없고, 식량을 수급하지 못하면 크록을 불려서 신이 되겠다는 야망도 좌초되고 만다.
“포탈의 완성을 저지하는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잠시 전하의 행보를 늦출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보다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해결책을 추구할 것입니다.”
“어떤 방법인가요?”
“제 어머니가 당한 방식이 유력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전하를 비참한 패배자로 만들어, 전하께서 그간 쌓아온 신화를 정면에서 박살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건국기념일.
함께 신세계를 개척할 자들이 빠짐없이 모이는 자리였다. 과연 그곳에서 날 꺾는다면 신화는 종언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섬뜩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의문은 남아있었다.
“제이드가 그럴 실력이 됩니까?”
“그니르는 일시적으로 추종자의 힘을 몇 배나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어머니도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마법사였으나 속수무책이셨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귀중한 정보로군요. 말씀해주지 않으셨더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했겠습니다.”
“제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르기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고백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전하께서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한다고 해도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당신은 살아서 부모님의 복수를 해야 하는 입장이 아닙니까? 제가 뭐라고 위험을 감수하겠나요.”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이드를 죽이실 건가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르기의 말이 옳다면 심판자 그니르는 대단한 원리주의자였다. 그는 황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오른 이날 이때에, 자신들의 편임에 분명한 나를 찍어내려 안달이었다.
그 정도로 정세판단을 못하는 에사인이라면 실로 여섯 번째 권능이란 이름이 아까웠다.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니르의 행보를 잠시 늦출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겠죠.”
"근본적인 해결책이 존재할까요?”
“이런 건 어떻습니까. 저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그니르의 추종자를 비참하고 무기력한 패배자로 만드는 겁니다. 최소한 이곳에서만큼은 심판자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하지만.......”
그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왜요, 못할 것 같습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기 하나 합시다. 제 계획이 성공한다면 더 이상 자신을 숨긴 채 살아가는 걸 그만두시죠.”
“예?”
“왜 제이드가 당신에게 흥미를 잃었겠습니까. 당신의 모습이 이미 비참하고 무기력한 패배자이기 때문이겠죠. 그런 삶을 언제까지나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하면 오래 하셨으니, 이제는 떨치고 일어납시다. 제가 당신의 방패막이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보이겠습니다.”
"......."
그는 말없이 번민했다. 그의 황갈색 눈동자가 또다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지속해온 겁쟁이 연기가 그의 영혼에 일부 스며들고 만 것이다.
“고민이 되나보군요.”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힘주어 물었다.
“아직도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