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70화 (70/205)

70화. < 건국 (11) >

오르기는 자신의 재능을 숨기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자존심으로 죽고 산다는 마법사가 왜 재능을 숨기는 것일까. 동네방네 떠들어도 모자랄 판국에.

마법의 세계는 철저한 실력본위다. 남에게 얕보이면 돌아오는 건 경멸뿐이었다. 실제로 그는 삼촌인 사피스 단장에게 미운오리새끼처럼 수십 년간 구박을 받아왔다.

“알겠습니다, 원치 않으시다면야.”

나는 그를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저희는 그럼 물러가보겠습니다.”

“예, 편히 쉬시죠.”

마법사들이 자리를 떠났다. 나는 펜대를 빙글빙글 돌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시급을 요하는 사안만 추려도 서류로 탑을 쌓아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길을 잃고 헤매던 오르기의 황갈색 눈동자가 머리에서 자꾸만 맴돌아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어디선가 그런 눈을 봤던 것 같았다. 안개처럼 흐릿한, 다시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기억이었다.

이틀 후, 관청 회의실에서 건국준비위원회 총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로비를 위해 본국에 나가있는 위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불참자가 절반이 넘었다.

당장 인사추천 리스트를 절반으로 줄이는 문제 때문에 위원장인 김형식 교수와 부위원장 장효진이 참석하지 못했다.

때문에 이 자리는 간략히 상황만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다.

“애국가 진척상황을 알 수 있겠습니까?”

머리카락을 사자갈기처럼 풀어헤친 중년 남성이 손을 들었다.

“샘플 버전을 가져왔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그가 녹음해온 노래를 태블릿 PC로 재생했다. 나를 비롯하여 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이 노래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박자감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군가 같은 노래였다. 삽질을 할 때 노동요로 틀어놓으면 제격일 듯했다. 정글 한가운데에서 맨땅에 헤딩 중인 신생국가에겐 이보다 좋은 멜로디가 없을 것 같았다.

라힐님이 보우한다는 대목은 후반부에 들어갔다. 곡의 하이라이트인, 사운드가 막힘없이 올라가는 파트였다.

이윽고 연주가 끝나자, 우리는 그를 위해 박수를 쳐주었다. 몇몇 사람은 기립을 하기도 했다. 그는 왕년에 잘나갔던 밴드 멤버답게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여유롭게 즐기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더 손볼 것도 없이 이대로 가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곡을 작곡했지만 이보다도 의미 있는 작업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자리에 앉자, 나는 새로이 교체된 의사봉을 두들기며 말했다.

“현재 황국에서 온 마법사들이 두 번째 포탈을 열기 위해 작업중이라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오늘부터 8일 후,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를 거치지 않고 민간 기업과 직접 통상을 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독자적인 외교행위라고 볼 수 있으므로, 저는 이 날을 건국기념일로 선포하고자합니다. 이에 관하여 의견이 있으신 분은 발언해주십시오.”

회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은 서로 쑥덕거리기만 할 뿐 발언을 하지는 못했다.

“이견이 없으시다면 다들 찬성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발언하겠습니다.”

고령의 남성이 손을 들었다. 퇴임한 경찰간부 출신으로서, 1기 내각에 치안자문위원으로 합류가 내정된 자였다.

“말씀하세요.”

“총리대행님, 아직 대한민국 국회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내각에 들어올 사람들도 선발이 완료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시기에는 이른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언제가 적당한 시기라고 보십니까?”

“최소한 국회의 승인은 받아야...”

“여러분은 아직도 우리가 속령이나 만들자고 여기 모였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가 자신 없는 투로 말끝을 흐렸다.

“우리는 대한민국과 동등한 관계에서 공화국 연방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일어서지 못한다면 연방정부의 구성원으로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우리 공동체가 전쟁과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한민국 국회의 한가로움을 방관할 만큼 우리 처지가 한가하지 못합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건준위 위원들 중에서도 많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일국의 창건자가 된다는 의식이 부족했다. 수틀리면 대한민국으로 돌아가 쌓아둔 재산으로 호의호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그들을 계속 압박할 작정이었다.

어린놈이 좆같이 군다고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빈자리는 크록으로 채워 넣으면 된다.

그래도 버틴다면 그 자는 믿고 일을 맡겨볼 만할 것이다.

“8일후 왕궁 홀에서 건국 축하연을 개최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노고에 보답하는 의미로, 참가해주시는 모든 분께 드릴 깜짝 선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한 분들께 소식을 두루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의사봉을 세 차례 두드려 폐회를 알렸다.

“이상으로 2회 건국준비위원회 총회를 마칩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갈 길을 찾아 나섰다.

“총독대행님,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박이나 보좌관이 율무차를 한 잔 내오며 말을 걸었다. 그녀는 이번엔 자기 몫의 차도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

“깜짝 선물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 나라에는 아직 돈이 없지만, 땅은 널려있죠.”

“아하.”

“장차 공화국의 심장부가 될 도시입니다. 땅 한 뙤기씩 떼어주면 다들 좋아할 겁니다.”

나는 박이나 보좌관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물론 보좌관님 몫도 있습니다.”

“저요? 저는 한 게 없는걸요?”

“회장님 앞에서 박력이 아주 넘치시던데요.”

“그, 그건.......”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그때는 정말 뭐에 홀린 것 같았다니까요.”

“그만하면 제 보좌관으로 손색이 없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물론 아무런 조건도 없이 퍼주는 게 아닙니다. 헌신을 요구하려면 우선 기반부터 마련해줘야지 않겠습니까. 이 나라가 바로서려면 정말 많은 역경을 넘어야만 할 겁니다.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데 한 몸 바치겠다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땅이 될 겁니다.”

“합리적이네요.”

“어때요, 박이나씨는 땅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나요?”

“당연히 총독대행님과 함께하고 싶죠. 그래도 아빠한테 물어는 봐야겠어요.”

그녀가 눈웃음을 치며 아버지를 언급했다. 표정만 봐서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남은 차를 홀짝이다가, 그녀에게 편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스트리아령으로 보낼 메시지입니다. 정기호에게 전달하라고 하시면 됩니다.”

“네."

편지 내용은 여느 때처럼 간단했다.

- 8일후 건국 축하연이 열린다. 반드시 참석요망. 카룩카이도 데려올 것.

일정상 스트리아령 대회의보다 건국 축하연이 먼저였다. 앞으로도 주구장창 부려먹을 놈이니 자리가 날 때마다 얼굴을 팔아둬야만 했다.

“다른 도와드릴 일은 없으실까요?”

“없습니다...만.”

나는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네?”

“아닙니다, 볼일 보세요.”

나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마법병단장 사피스는 오르기가 자기 조카이며, 누이가 죽는 바람에 데리고 키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사망했다고 해서 양육권이 곧장 친척에게 넘어가진 않는다. 오르기는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아버지마저 잃었음에 틀림없다.

- 누이의 재능의 반의 반만이라도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속을 썩이지 않았을 테죠.

게다가 오르기의 어머니는 생전에 아주 강력한 마법사였다.

대체 어떤 사연으로 고위마법사를 배출한 귀족가문이 어린 아들을 책임질 사람조차 남기지 못한 걸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방황하던 갈색 눈동자에 대한 실마리가 잡혔다.

오르기는 구박을 받아서 슬퍼하는 것도, 크록 때문에 공포에 찌든 것도 아니었다.

그 눈은 세상 전부를 속이려는 자의 눈이었다.

암살자로 오랜 세월 살아오며 그런 눈을 단 한 번 봤었다. 황국 전체가 뒤집어질만한 일과 연루됐었던 살행이었다.

망할...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를 뻐근하게 잡아당겼다.

나는 암살자 시절 쓰던 장검을 챙겨서 서둘러 포탈이 만들어지는 작업장으로 향했다.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에 해가 지면 바깥은 그대로 암흑천지가 되고 말았다.

작업장은 여전히 성업중이었다. 마법으로 생성된 광원이 널찍한 건물 안을 훤히 밝혔다.

포탈 골조는 사차선 도로를 놓아도 넉넉할 만큼 폭이 넓었다. 과연 장담한대로의 스케일이었다.

나는 머지않아 마법사들도 찾아내었다. 그들은 포탈 골조 근처에서 발카사르의 작업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오르기, 한 눈 팔지 말거라. 너는 남들이 걸어서 가는 곳을 가려면 뛰어야만 한다.”

사피스가 여느 때처럼 오르기를 엄하게 꾸짖었다.

“네, 삼촌.”

“여기서는 스승님이라고 부르라지 않았느냐!”

“히익...! 죄송해요, 스승님!”

오르기가 얼굴을 가리며 용서를 구했다. 이제는 내막을 짐작하는 바라 그들의 대화가 기묘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어둠속에 모습을 숨긴 채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날이 완전히 저물자, 크록 인부와 마법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오르기는 마지막까지 작업장에 남았다. 공부를 더 하고 오라는 이유였다.

나는 주변에 오르기 말고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서자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급조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누, 누굽니까?”

오르기가 어눌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르릉...

나는 대답대신 검을 꺼내들었다. 잘 관리된 검날이 마법광을 반사해 섬뜩한 빛을 발했다.

“가,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나는 마법사입니다. 나는 당신을 해칠 수 있습니다!”

여전히 혼란스럽기는 했다.

저 꽉 막힌 듯한 목소리,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

이게 정말 연기로 가능한 수준이 맞나?

내가 지금 오스카상을 탄 배우를 상대하고 있나?

진실의 추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를 결코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죽어라.”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검에 마력을 실었다. 마력으로 요동치는 검을 앞으로 내지르자, 희뿌연 소닉붐이 검극을 중심으로 동심원의 형태로 방출되었다.

빠우우우.

극한으로 압축된 검압이 귀청이 찢어질 것만 같은 폭음과 함께 뻗어나갔다.

나는 순수한 마력만으로 오데르의 창 이상의 위력을 구현해냈다.

그러나 놀라운 건 오르기의 대응이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다섯 개의 환영을 만들어내더니, 그중 하나가 내 품에 깊이 파고들었다.

맞을만하다.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동시에 냉기를 동반한 강력한 충격이 옆구리를 강타했다. 마치 들소에게 받힌 것만 같았다. 나는 충격을 상쇄하기 위해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야만했다.

“...흐음."

나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팔다리를 순차적으로 움직여보았다.

역시 뻐근했다.

다년간 마법사와 싸워본 경험에 미루어보아, 나는 방금 엄청난 기술에 직격당한 게 틀림없었다.

오르기의 반응은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놓았다.

“어떻게 그걸 맞고도 멀쩡할 수가.......”

오르기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도 그의 실력이 믿기지가 않았다. 불과 며칠 전에 파워업을 해냈다고 자신하던 참이다. 데미지를 주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다시 피할 자신은 없을 만큼 까다로운 마법이었다.

나는 이쯤에서 복면을 벗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무서웠습니까?”

하지만 오르기의 말이 한 발 앞섰다.

“내가 그 여자의 피를 물려받았을까봐, 당신들의 알량한 권력이 흔들릴까봐, 그렇게나 자신이 없었던 겁니까?”

“잠깐...“

“정녕 저까지 죽여야 속이 후련하겠습니까!”

연기를 그만둔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위축된 등을 펴자 키가 저렇게 컸나 싶을 정도로 허우대가 좋았다.

그의 두 손에서 싸늘한 냉기가 휘몰아쳤다. 아까 환영도 그렇고, 그가 구사하는 모든 마법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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