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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69화 (69/205)

69화. < 건국 (10) >

“라힐 전하셨군요. 다시 소개를 올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사피스 오스피스, 대영주 직속 마법병단 모네모의 단장입니다.”

사피스가 로브에 달린 견장에 손을 얹으며 내게 예를 표했다.

다음으로 이목구비가 반듯한 이십대 청년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인사를 올렸다.

“모네모 수석마법사 발카사르입니다. 라힐 전하를 뵙습니다.”

발카사르는 크록 장군들에게 둘러싸이고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마력을 슬쩍 끌어올리고 있는 게 오히려 실력을 선보일 기회가 찾아오기를 벼르는 듯했다.

“발카사르는 스트리아령이 백 년 만에 배출한 천재입니다. 제 수제자이지만, 실력은 이미 한참 전에 저를 뛰어넘었습니다.”

사피스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랑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발카사르는 예의상 겸양을 표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는 두 팔을 슬쩍 벌리며 자신을 향한 찬사를 즐겼다.

“모네모의 디나입니다. 라힐 전하를 뵙습니다.”

디나는 갈색머리를 구름처럼 틀어 올린, 고위귀족다운 화려한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굳이 술법을 쓰지 않아도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녀는 내게 인사를 하면서도 발카사르의 잘생긴 외모에서 도통 눈을 돌릴 줄 몰랐다.

“디나도 제가 아끼는 제자입니다. 발카사르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수석을 맡고 있었을 재기 넘치는 아이입니다.”

“제 재능은 발카사르님께 비하면 태양 앞의 등불에 지나지 않는답니다.”

디나가 겸손하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주술사나 전사들을 자신보다 아랫줄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대부분의 에사인이 마법사 출신이었다.

그들은 결코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전사가 명예를 위해 죽는다면, 마법사는 자존심을 위해 죽었다.

그 자존심덩어리들이 입을 모아 찬양하는 걸 보니, 저 잘생긴 청년이 잘나기는 한 모양이었다.

“모네모의 제이드입니다. 대한민국 국왕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이드는 기특하게도 나라이름을 예습해왔다. 대한민국이란 발음이 내국인 못지않게 또박또박 들렸다.

제이드는 야위고 창백한 삼십대 남성이었다. 그는 크록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한사코 시선관리를 하는 중이었다.

사피스 단장은 제이드를 위해서는 아무런 멘트도 해주지 않았다. 다른 제자에 비해 내세울만한 장점이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저는 대한민국의 왕이 아닙니다. 오해를 하실까봐.”

“실례했습니다. 국명을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사피스가 제이드를 대신하여 내게 물었다.

“아직 신생국가라 국명을 정해지 못했습니다. 잘못 찾아오신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과 뿌리를 같이하기 때문에, 황국과 대한민국이 맺은 조약은 이곳에서도 유효합니다.”

“어차피 저희가 받은 명령도 라힐 전하와 접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스트리아령이 전하께 큰 신세를 졌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저희가 전하께 뵙자고 한 이유는...”

“잠시, 저 분은 소개 안하시나요?”

아직 소개받지 않은 마법사가 남아있었다. 이십대 중반의 어수룩한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그는 크록들 때문에 고개를 들지조차 못하는 중이었다.

그를 언급하자마자 자상하기만 하던 사피스의 태도가 일변했다.

“네 이야기다, 오르기.”

“예, 예?”

사내가 더듬거리며 반문했다.

“국왕폐하의 안전이지 않느냐, 네 소개를 해야지!”

“히익...!”

사피스가 매섭게 다그치자, 오르기는 팔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움츠렸다. 굵은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사피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보다시피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입니다.”

“괜찮습니다.”

“제 생질입니다만, 누이가 죽고 난 뒤엔 제가 맡아서 길러왔지요. 실력은 어디 가서 모네모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수준입니다. 누이의 소망대로 키워내지 못한 것 같아 늙은이의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사피스는 오르기를 매우 엄격하게 훈육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여 내 면전에서 흉을 봐도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이렇게 다섯 마법사의 소개가 끝났다.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묘한 감흥이 일어났다.

왕좌에 처음 앉았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마법사는 한 명 한 명이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어야만 양성이 가능한, 일종의 전략무기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그들에게 예우를 받는다는 건 정말이지 각별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제 용건을 듣고 싶군요. 무슨 일로 먼 길을 오셨는지요.”

사피스가 대표자격으로 대답했다.

“대한민국과 에신을 잇는 포탈이 너무 좁아 왕래하는 문제가 크다고 알고 있습니다. 허나 기존의 포탈을 확장하는 건 마법의 메카니즘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전하께서 원하시는 위치에 새로이 포탈을 열어드리고자 합니다.”

사피스가 눈짓하자, 백 년 만에 나타난 천재 발카사르가 당당히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어떤 크기를 원하시는지 말씀만 하시죠, 이 발카사르에게 불가능이란 없으니!”

발카사르가 가슴을 쫙 펴며 선언했다.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화법,

흔히 말하는 중2병식 화법이었다.

물론 발카사르는 언행일치가 가능한 능력의 보유자였다. 여느 망상병 환자들과 같은 취급을 할 순 없다.

“좋습니다. 관료들에게 지시를 내려두겠습니다. 크롱크, 김형식 교수에게 가서 전해라. 포탈이 들어설만한 적임지를 검토하라고.”

“알겠습니다, 큼.”

“며칠 시일이 걸일 테니, 그동안 여러분들께서는 이곳에서 편히 머무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사피스는 어전에서 물러나며 제자들에게 충고를 잊지 않았다.

“너희는 다른 데 정신 팔지 말고 발카사르가 하는 걸 잘 봐 두어라.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배움이 될 게다.”

“예, 스승님.”

오르기는 일행의 맨 끝에서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잠시 후 사피스로부터 걸음걸이를 똑바로 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구박을 받을 때마다 거북이처럼 움츠러드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크롱크. 숙소를 배치할 때 오르기와 사피스의 방을 가급적 멀리 떨어뜨려놓아라.”

나는 크롱크에게 추가로 지시를 내렸다. 이것이 내가 낯선 남자에게 베풀 수 있는 호의의 전부였다.

나는 며칠 동안 건준위 위원들과 토론을 벌인 끝에 인천항을 후보지로 최종 낙점했다.

인천항은 수도권의 물류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길목이다. 그곳에 포탈을 박아둔다면 물건을 들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출까지도 용이해진다는 이유였다.

이제 남은 공정은 두 가지였다.

발카사르를 인천항으로 데려가서 좌표를 뽑아낸 후, 다시 에신으로 돌아와 포탈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다.

여기에 약 한 달이 소요된다.

일단 포탈의 기반이 다져지면, 예전에 아약이 그랬듯이 발카사르도 무방비상태에서 의식을 집전하게 된다.

우리는 이때 발카사르를 반드시 지켜내야만 했다. 그는 호언했던 대로 대단한 실력을 가진 자였다. 만에 하나라도 그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대체인력을 구할 길이 막막했다.

"...죽겠구만.”

나는 테이블에 두 다리를 올려두었다.

정확히는 쌓인 서류더미 위에.

새로운 포탈이 뚫리는 일정이 가시화됨에 따라 자연스레 내 일도 불어났다. 나는 연일 쌓이는 서류더미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가뜩이나 전자결제시스템이 없으니 모든 게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마당이었다.

나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며 사피스의 손에 들려온 편지를 펼쳐보았다. 그간 경황이 없어 확인을 미뤄둔 편지였다.

- 요청한 마법사를 보냈다.

굳이 발신인을 확인할 필요가 없을 만큼 특징적인 문체였다.

- 엊그제 동생을 죽이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래야 대영주직에 도전하는 사람이 없어질 거라며.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굳어져간다. 특히 날 죽인 자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해야한다는 게 고역이다. 동생은 상대적으로 처신을 잘하고 있다.

대회의가 열리기까지 시일이 많이 남았으니, 나는 협잡꾼들을 피해 네가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조만간 얼굴을 보자.

“라힐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사피스가 방 밖에서 내게 물었다. 나는 편지를 서둘러 품 안에 갈무리했다.

“들어오시죠.”

다섯 명의 마법사가 우르르 들어섰다.

오르기는 오늘따라 표정이 더 침울해보였다. 사피스에게 또 구박을 받아서 그러는 것일 테지만, 나는 더 이상 그의 사정에 오지랖을 부릴 여유가 없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늦은 시간에 송구합니다만, 방금 대한민국 관료분의 안내를 받아 인천항이란 곳을 다녀왔습니다. 좌표를 받아왔으니 허락해주신다면 지체하지 않고 작업에 들어 가볼까 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로군요. 저야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습니다. 포탈 설치까지는 한 달이 걸린다고 했던가요?”

“열흘입니다. 저를 평범한 마법사들과 똑같이 보시면 곤란합니다.”

발카사르가 대답했다. 예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고서.

“...알겠습니다. 열흘이로군요.”

조금 재수가 없으면 어때, 일만 잘해주면 장땡이지.

“대신 저 혼자만으로는 될 일이 아니니 크록들을 인부로 부릴 수 있어야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밖에도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뭐든 좋으니 제게 요청하세요.”

“저는 전하께 약소한 보상을 청하고자 합니다.”

“어떤 보상 말인가요?”

“마족의 이동수단인 자동차라는 물건에 흥미가 있습니다. 상당히 편리해보이더군요.”

“...좋습니다. 안 될 것 없죠.”

포탈을 뚫는 값이 고작해야 차 한 대라니, 남는 장사도 이런 장사가 없다.

물론 기름은 셀프다. 자기 잘난 맛에 사시는 분이니 주유는 알아서 잘 하시겠지.

“다른 분들도 가지고 싶으신 게 있으신지요?”

“저는…”

“쓸데없는 소리.”

오르기가 입을 열 때였다. 사피스가 냉랭한 목소리로 오르기의 말을 끊었다.

“전하를 도운 건 발카사르 혼자입니다. 저는 배우러 온 입장에서 보상까지 요구할 만큼 예의를 모르는 제자를 두지 않았습니다.”

싸늘했다.

분위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을 만큼.

나는 사피스의 태도가 조금 심하다고 느꼈다. 방금은 자기 조카를 야단치고자 국왕인 내 호의마저 뭉개버린 셈이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다. 오르기님도 분명 가지고 싶으신 게 있을 텐데요.”

나는 나 자신에게 진실의 추를 시전했다. 이쯤에서 사실여부를 가려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어, 없습니다.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거짓이다.

“눈치 보지 마시고 말씀해주세요.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마족의 물건을 구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모, 모자란 마법사입니다. 저는 보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오르기가 굵은 땀을 흘리며 변명을 주워섬겼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당황하는 얼굴을 살펴보았다.

방금은 어느 대목에서 진실의 추가 작동한 거지?

모자란 마법사인가, 아니면 보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건가.

진실의 추는 화자의 양심을 기준으로 사실여부를 판단한다. 전자라면 그는 사피스의 모진 구박을 받아가면서도 스스로를 높게 평가해 왔다는 말이 될 테고, 후자라면 그는 진심으로 자기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는 소리가 된다.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지금은 얼른 숙소로 돌아가서 눕고 싶네요. 마족의 잠자리는 너무 편안하거든요. 제가 고를 수만 있다면 두말 하지 않고 침구라고 말할 텐데.”

디나가 졸린 투로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확인차 오르기에게 다시 질문했다.

“오르기님도 뛰어난 마법사가 아닙니까? 모네모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누이의 명성과 제 고집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했습니다. 누이의 재능의 반의 반만이라도 있었더라면 이렇게 까지 속을 썩이지 않았을 테죠.”

“마, 맞습니다. 저는 재능이 없습니다.”

...거짓이다.

나는 글썽이는 오르기의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갈팡질팡하는 황갈색 눈동자 안에 내가 모르는 것이 깃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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