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 건국 (9) >
크롱크의 영민한 눈이 아래위로 활달하게 움직였다. 막시무스는 조각상처럼 우뚝 선 채 아래를 굽어보는 중이었다. 김형식 교수와 장효진은 그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몸 둘 바를 몰라했다. 그들은 아직도 크록이란 존재를 버거워했다. 나는 내 자식들이라 그런지 귀엽기만 하다만.
“국회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습니다. 내달 정기국회가 열리는 대로 통과시키겠다고 합니다.”
김형식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통과란 공화국과 연방제 안건을 일컬었다. 삼경그룹 회장을 꺾은 게 지렛대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두 건준위 위원을 덤덤하게 치하했다.
국회의원들에게는 재벌그룹 총수가 꿇고 들어온 게 충격적인 일일지 모르나, 내 적은 기업인도, 정치인도 아니었다. 흉신이 곳곳에서 발호하는 마당에 언제까지나 과거의 권력에 발목을 잡혀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1기 행정부를 구성할 인사추천 리스트입니다.”
김형식 교수가 테이블 위에 쌓인 두꺼운 서류더미를 가리켰다.
“많네요.”
“약 2천명분의 인사검증기록입니다. 여야의 교차검증을 거친, 믿을만한 인물을 위주로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믿을만한.’
진짜로 믿을만한 놈은 한 줌도 안 될 거라는 데에 내 손모가지를 걸겠다.
아마 두 사람은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아파트 서너 채는 족히 늘렸을 것이다.
보나마나 어떻게든 녹봉을 먹어보겠다는 쌀벌레 같은 놈들만 우글대겠지만, 곧 알게 되겠지, 심판의 에사인 아래에서 공직을 맡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일이 검토하기엔 너무 많은 양이로군요. 그냥 두 분을 믿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형식 교수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장효진은 뭐가 불만인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추측컨대 김형식 교수와 딜이 잘 안 된 듯했다. 청탁을 받은 사람들을 다 꽂아주지 못했다던가.
“다만 숫자를 좀 줄입시다. 천 명만 덜어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
“절반이나요?”
김형식 교수와 장효진이 경악하며 합창을 했다.
“왜들 그러십니까?”
“총독대행님, 외람되지만 이천 명이라는 숫자도 줄이고 줄여서 간신히 도출해낸 결론입니다. 과기부나 통일부, 감사원 등 현시점에서 필요 없는 부서를 모두 제외하고, 정부가 최소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뼈대만 살려놓은 숫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크록이 있잖습니까.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종족을 완전히 배제하시면 안 되죠.”
“하지만 크록은 관료가 되기에는 고등교육을...”
김형식 교수가 크롱크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크롱크는 붉은 볏을 박수를 치듯 펄럭였다. 그는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몰라도, 불편한 내용임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배움이 빠른 종족이니 잘 가르치면 금방 따라올 겁니다. 게다가 여러분은 임명직이니 부담이 없으시겠지만, 저는 선거를 치러야 하는 몸이잖습니까. 뭘 모른다고 배제하기만 하면 민심을 어떻게 잡으라고 그러십니까?”
내가 우려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건.......그렇겠군요.”
김형식 교수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래서 선거를 치르겠다고 한 것이다. 민심만큼 대기 좋은 핑계가 없으니까.
“모든 부처에서 크록과 인간이 1:1 비율을 이루도록 명단을 다시 만들어오세요. 누굴 뽑아야할지 모르겠다면 크롱크와 막시무스에게 의견을 구하시고요.”
“알겠습니다.”
“다른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가서 명단부터 재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위원이 퇴실하자, 집무실에는 크롱크와 막시무스만 남았다.
“크롱크, 시작하자.”
나는 크롱크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크롱크가 즉시 테이블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서류를 모조리 옆으로 치워버리고, 마련된 공간에 자그만 돌 다섯 개를 올려두었다.
돌 한 개가 나타내는 병력은 천 명. 다섯 개의 돌은 내가 거느린 크록 군세의 총합이 오천 명임을 의미했다.
“스트리아령으로 패잔병들이 떼거리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큼. 형제들 말로는 전투에서 진 인간들의 꼬락서니가 아주 한심하다고 합니다. 쓸만한 정보를 거의 뽑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큼.”
“그래도 아무것도 없진 않았을 거 아니냐.”
“있습니다, 중국군 장수가 무적의 울토르를 무찔렀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큼. 또한 중국군 병사들은 모두 불멸자라 죽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제 판단으로는 인간은 감정적일 때 인지능력이 크게 하락하므로,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큼.”
정기호가 편지에 써두었던 소문들이었다. 나도 그게 다 맞는 말이라고 여기진 않았다. 그러나 울토르가 패주했다는 소식만큼은 간과할 수 없었다.
울토르는 다른 에사인과는 격이 달랐다.
마음을 조종하는 길레악, 미래를 예견하는 아바르, 꿈을 지배하는 로켄.
오직 세 권능만이 무적자 위에 서는 게 허락되었다.
“크롱크, 판단은 내가 할 테니 너는 계속 정보를 수집해라. 지금으로서는 적이 가진 힘을 간파하는 게 최우선과제다.”
“알겠습니다, 큼.”
“막시무스, 너는 천인대 하나를 스트리아령으로 올려 보내라. 카룩카이의 오백인대와 합류하여 영지를 수비하도록.”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건축은 어떻게 되어가나?”
“지금까지 총 6천호의 집이 지어졌습니다. 배양시설이 멈췄기 때문에 궁전의 완성에 총력을 기울이는 중입니다.”
결국 배양시설이 가동을 중단하고 말았다. 식량공급이 한계를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궁전의 내부는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큼. 저희는 위대하신 분을 모실 날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게 벌써 완성되어간다고?”
“그렇습니다. 형제들은 인간 기술자들과 함께 마무리작업을 하는 중입니다.”
“...가서 직접 보도록 하마.”
나는 두 크록을 데리고 관청을 나섰다.
크록 목수들은 숙련도가 오르며 점차 특유의 건축양식을 완성해갔다. 통나무를 깍지 끼듯 교차시켜 짐승 뿔 형상의 골조를 세우고, 굵은 덩굴을 밧줄처럼 꼬아 여기저기에 주렁주렁 달아두었다.
이렇게 지어진 집이 몇천 채에 달했다. 뾰족한 기둥이 끝없이 솟아있는 정경이 흡사 거대한 가시나무의 숲에 발을 들인 것만 같았다.
“운하도 곧 완성됩니다. 근처 강에서 물길을 끌어들이기 위해 길을 트는 중입니다.”
운하도 대단한 역사지만, 압권은 역시 궁전이었다. 크록들은 그야말로 궁전에 목숨을 걸었다. 그들의 주거지가 가시나무의 숲이라면, 궁전은 가히 가시나무의 세계수라 칭할만했다.
휘오오오오.......
소슬바람이 궁전 앞마당을 쓸고 지나갔다. 사슴뿔 형상으로 휘어진 지붕 꼭대기엔 새들이 노닐었다.
궁전은 정말로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외관상으로는 거의 완성된 것 같아 보였으나, 공사만큼은 여전히 한창이었다.
까마득한 벽에 붙어 꼬물대는 저 자그만 점들이 죄다 크록 인부들이었다. 그들은 아름드리 통나무를 어깨에 짊어진 채, 변변찮은 안전 장비 하나 없이 아파트 수십 층 높이를 기어 올라갔다.
“인간이 만든 집은 너무 초라합니다, 큼. 그런 얇고 낮은 건물로는 라힐님의 위대함을 천만분의 일도 담아내지 못합니다.”
아직 계약기간이 남은 내 자취방은 10평도 채 되지 않았다. 혼자 살다보면 그것조차 넓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스케일이 커도 이렇게 커버리면 외려 현실감이 없어진다.
궁전 앞마당은 연무장도 겸했다. 칠흑 같은 비늘을 두른 전사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중병기를 휘두르는 중이었다. 그들은 수련에 몰두하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가슴을 두들기며 예를 표했다.
한 명으로 시작된 의례는 순식간에 번져나가, 이윽고는 약 천여 명의 병사들이 한 몸이 된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방봉팔, 방봉팔, 방봉팔!”
“막시무스.”
“말씀하십시오, 위대하신 분이시여!”
막시무스가 우렁차게 대답하며 내 앞에 대령했다. 그는 내게서 출진명령이라도 바라는 듯했다.
“경례를 짧고 굵게 통일시켜라. 내가 너희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위대하신 분이시여, 저희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제가 반드시 솎아내어 벌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란 말이야, 알아들었지?”
“...알겠습니다.”
그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했다. 그 증거로 평소 전봇대처럼 꼿꼿하던 허리가 다소 처져있었다.
“들어가자.”
궁전에는 문이랄 만한 게 없었다. 뻥 뚫린 입구로 걸어 들어오면 그만이었다.
나는 약 백 미터 길이의 홀을 가로질러 드디어 옥좌에 도달했다.
높다란 단상 위에 거대한 짐승의 두개골을 깎아 만든 옥좌가 자리했다.
좌우에는 나의 장군들이 도열해있었다. 그들은 잡졸들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저 우두커니 선 채 흠모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뚜벅뚜벅...
나는 두 측근을 떼놓고 계속 걸어갔다.
널찍한 홀에 오직 내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나는 단상을 올라가 마침내 옥좌를 마주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뜨거운 염원이 느껴졌다. 너무 뜨거워서 등판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이젠 나도 느낄 수 있다. 내 힘은 예전보다 한층 더 강해졌다. 이 자리에 나를 앉히려고 목숨을 마다않는 자들이 기천 명이나 불어난 덕이었다.
나는 옥좌에 앉아 아래를 굽어보았다.
경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크롱크.”
나는 조용히 크롱크를 불렀다.
“고생했다, 정말 멋진 걸 만들어냈구나.”
크롱크가 볏을 부딪치며 캇캇거렸다. 그는 정말 기쁠 때나 저렇게 웃곤 했다.
그가 좋아해 준다니 다행이긴 하나, 나는 아직 이 자리가 이르다고 여겨졌다.
왕관의 무게를 감당하려면 정착지를 최소한 지금의 백 배 이상으로 키워내야만 했다.
문득 미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주 작은 죄업의 변화가 마치 거미줄에 닿은 날벌레마냥 미세한 파동을 만들어냈다.
곧 크록 한 명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다급한 투로 보고를 올렸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스트리아령에서 찾아온 사자가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들라고 해라.”
약 십분 후, 화려한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나는 턱을 괸 채 그들을 유심히 관찰해보았다.
상당히 젊은, 이십대에서 사십대가 주축인 마법병단이었다.
정기호가 포탈을 열기 위해 보낸 자들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홀의 입구에 서서 잠시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나누었다. 그들은 차마 크록들이 가득한 홀을 가로지를 용기가 없는 듯했다.
곧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노년의 마법사가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이윽고 크롱크와 막시무스가 선 라인까지 당도하여 어정쩡하게 걸음을 멈추었다.
킁킁.
크록 장군들이 코를 벌름거렸다. 그들은 젊은 마법사들이 풍기는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감지해냈다.
크르르르.....
삐죽삐죽한 송곳니 사이에서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마법사들은 사색이 되어 마치 방진을 짜듯 서로 들러붙었다.
“잘 와주었습니다, 스트리아령의 마법사 여러분들.”
나는 따뜻한 말로 그들을 맞아주었다.
죽어가던 손님들의 얼굴에 한 줄기 희망이 떠올랐다.
노년의 마법사가 서둘러 나서며 내게 고했다.
“저는 황국 마법사 사피스라고 합니다. 스트리아 대영주 이졸데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실례지만 귀공께서는...”
“라힐입니다. 직위는...”
나는 몇 가지 단어를 떠올렸으나, 대부분 에신어에 없는 표현이었다.
“일단국왕이라고 해둡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