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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64화 (64/205)

64화. < 건국 (5) >

- ...너 나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거냐?

- 일 가지고 장난치겠냐.

- 진짜 장난 아니지?

- 네가 사모해 마지 않는 유진씨를 걸고 맹세하마.

- 네 멋대로 유진씨 존함을 걸지 마라. 아무튼 연결은 해줄 텐데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나는 네가 전화를 걸었다는 것도 모르는 일이야.

- 연결이나 해.

이상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부장이 연결되기를 기다리며 잠시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여영진 부장.

낙하산으로 꽂혔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보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아랫사람을 쥐어짜내는 데에 업계에서 가히 탑을 다툴만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수단과 방법을 불문하고 어떻게든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부하들은 실망시켜도, 클라이언트를 실망시키는 법이란 결코 없을 자였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딱 그런 인물이었다. 촉박한 일정에 맞춰 결과물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

- 연결한다.

이상민이 짧고 다급하게 한 마디를 남겼다. 그 태도가 흡사 다잉메시지를 연상시켰다.

잠시 후 통화 대기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난데없이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언젠가 그와 나의 관계를 시스템에 비유했던 게 떠올랐다. 한 번 시스템의 일부가 되고 나면 시스템이 부여한 권위가 의식을 좌우하게 된다며.

이 두근거림은 예전과 같은 초식동물로서가 아니라, 사냥감을 기다리는 입장에 더 가까웠다.

- 예, 여영진입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 안녕하십니까, 외교부 정책홍보실입니다.

나는 일부러 직급과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름을 먼저 밝히면 믿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내가 궁금한 건 그가 내 목소리를 기억할까하는 여부였다.

- 아, 외교부시군요.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는지요?

- 보안 프로젝트라 유선상으로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오후 5시까지 외교부 청사에 방문해주신다면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 5시 말입니까? 지금 시간이...

그가 당황하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 시각이 3시 30분이다. 이상민의 말마따나 이 때가 하루중 가장 바쁠 때였다. 전화 한 통만 가지고 오후 스케줄을 비워버리기에는 리스크가 너무나 컸다.

- 괜찮습니다. 사무실 앞으로 차량을 보내드리죠.

- 예?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 보안 프로젝트니까요.

- 잠시만요, 주실 수 있는 정보가 정말로 아무것도 없으십니까? 이게 너무 갑작스럽다보니...

- 죄송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습니다. 아, 삼경그룹과 한국제철 회장님께서 참가하시는 프로젝트라는 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 ........

그가 숨을 죽였다. 삼경그룹은 대한민국 정재계를 좌지우지하는 공룡이었다. 그들의 심사를 거스르고는 사업을 할 수가 없었다.

- 일단 임원분들께 상담을 드려보겠습니다. 최소한 보고 정도는 올려야 자리를 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해합니다만, 시간을 더 드릴 수 없는 점은 거듭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일단 도착하시면 로비에서 에신1과 담당자를 찾으시면 됩니다.

- 에신1과요?

- 예. 곧 청사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날 스카웃하던 이범영 과장 심정이 이랬을까하는.

혼자 모든 비밀을 끌어안은 채 뭣도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었겠냐고.

나는 외교부에 연락해서 관용차량 한 대를 수배했다. 마침 적당히 잘 빠진 중형세단이 한 대 놀고 있었다.

그것 하나는 아쉬웠다.

내 목소리를 기억하기만 했어도 리무진을 보내줬을 텐데.

총독대행이란 직위는 아직 대외적으로 공표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야의 합의로 추인한 자리이니만큼 비공식적으로나마 정부조직도에 자리가 나있기는 했다.

내 위치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사이였다. 선출되지 않은 자리 중에서는 가장 큰 권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속하는 하부조직이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이름뿐인 직함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안에서는 그랬다.

- 에신 총독령 총독대행 박봉팔

이 봉황 자개명패는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는 외교부 청사에 마련된 집무실에서 여영진 부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베이스캠프에 위치한 집무실엔 들른 적이 있었으나, 청사 집무실은 처음이었다. 인테리어가 완벽히 일치했기에 처음 들르는데도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띠리리리.

책상 위에 올려둔 내선전화가 울렸다.

- 예, 말씀하세요.

- 총독대행님, 방문객이 오셨습니다. 애드라이너 사업부 여영진 부장님입니다.

젊은 여성이 다소곳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도 적응이 되지 않는 변화 중 하나였다.

그녀는 건준위와 회의를 할 때도 나서서 서류를 돌리는 등 자연스레 나타나 내 비서역을 자처했다.

워낙 바쁘게 돌아다닌 탓에 여러모로 도움을 받고 있는데도 아직 이름조차 물어보지 못했다.

- 들어오시라고 해요.

- 네.

잠시 후 노크소리와 함께 방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서는 사내를 흥미진진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했다.

다소 사치스런 정장과 비싼 시계.

숱이 듬성듬성한, 왁스로 반들거리는 머리.

긴장을 했는지 관자놀이가 땀으로 흥건했고, 만면에는 접대용 미소를 가득 품고 있었다.

그는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까지 내 이름을 알지 못했다. 내 존재는 외부에서 유추할 수 없게끔 철저하게 지켜졌기 때문에.

“안녕하십니까, 총독대행...”

그는 명패를 쳐다보며 인사를 하려다가 눈꺼풀을 몇 차례 끔뻑였다. 마치 신기루가 눈앞을 가리고 있다는 듯이.

이윽고 그의 고개가 내게로 향했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최종적으로 얼굴에 도착한 시선은 못이 박힌 듯 도무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때 그가 얼마나 놀라고 있는가는 벌어진 입의 크기로 짐작해볼 수 있었다.

“보, 봉팔이?”

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간만입니다, 여영진씨.”

나는 그에게 씩 웃어주었다.

“네가 왜 여기에...”

“일단 앉으시죠.”

그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여영진씨는 제가 그다지 반갑지 않으신가봅니다.”

“아니, 그렇지는.......물론 반갑습니다, 하하하.”

그는 내게 경어를 쓰느라 상당히 무리하는 중이었다. 입가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요즘도 일이 안 풀린다고 해서 부하직원을 걷어차고 다니십니까?”

“아닙니다, 다 지나간 일이고, 저도 그 점은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가 땀을 주륵주륵 흘리며 변명을 주워섬겼다.

나는 이해한다는 듯이 넉넉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반성하신다니 잘 됐군요. 부하직원의 사기는 업무능률과 직결되니 개선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예, 개선하겠습니다.”

내가 그를 빤히 쳐다보자, 그가 마지못해 나머지 말을 뱉어냈다.

“...총독대행님.”

나는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황당할 것이다.

허구헌날 정강이나 까이고 다니던 놈이 갑자기 총독대행이란 듣도 보도 못한 타이틀로 나타났으니.

그러나 외교부 청사 한가운데에 떡하니 집무실까지 차렸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러다간 그를 놀리는 데에 중독될 것만 같다. 하지만 오늘 그를 소환한 건 갑질이나 돌려주자는 목적이 아니었다.

“이상민 팀장에게도 들으셨겠지만, 부장님과 접촉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애드라이너가 제가 한때 몸담았던 직장이기도 했고, 부장님과 옛 동료들의 일처리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보안을 요구하는 프로젝트가 있습니다만, 일일이 인사검증을 할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어서요.”

“이해했습니다.”

업무적인 얘기로 넘어가자 그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나도 그 편이 대하기에 편했다.

나는 책상 위에 올려둔 서류더미를 뒤적였다. 차수진 박사에게 넘겨받은 연구자료들이었다. 나는 서류뭉치 맨 위에 파일을 뽑아 그에게 내밀었다.

“받아가세요.”

- 에신 식물의 육종기술과 상업성 검토

차수진 박사와 그녀의 연구팀이 작성한, 식물자원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 문서였다.

육종기술 파트는 넘기고, 상업성이 우리가 다뤄볼 부문이었다.

나는 나눠준 서류의 복사본을 펼쳤다.

“72쪽 첫 문단을 읽어보세요.”

그가 서류를 뒤적이며 페이지를 찾아갔다.

“몸달래풀. 어느 곳에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다년생초이며, 둥근 잎사귀를 지녔고, 빨간 꽃을 틔운다. 현재까지 효능이 입증된 증상은 발열, 발진, 설사, 두통, 소화불량 등이며, 세포재생을 돕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몸달래풀은 지구로 치면 민들레와 흡사할 만큼 흔한 잡초로서, 떠도는 마력을 잎사귀에 소량 저장하는 성질이 있었다. 때문에 연구팀이 밝혀낸 효능은 실상 마력이 가지는 효과에 가까운 셈이었다.

“다음 페이지도 읽어보시죠.”

“붉은볏나무. 정글지대에 넓게 분포한 수종. 표면 강도와 구조가 시중에 통용되는 목재의 3~5배에 달할 정도로 단단하며, 부패와 변형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상적인 건축자재로 사료됨.”

붉은볏나무는 크록이 열심히 베어대는 중인 바로 그 나무였다. 토착 크록들은 이 나무로 갑옷도 만들어 입고 다녔었다.

나는 그에게 몇 가지 연구결과를 더 읽게끔 했다. 하나하나가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을 정도로 큰 상업적인 잠재력을 가진 상품들이었다.

“어떻습니까.”

“돈이 되겠군요. 아주 멋진 물건들입니다.”

여영진 부장이 영혼 없는 감탄성을 내었다.

별 것 아닌 풀떼기를 불로초처럼, 평범한 원목을 외국에서 직수입한 고급스런 이미지로 포장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만병통치약과 모든 원목을 대체할 꿈의 자재를 접하고 있다는 걸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삼일 드리겠습니다. 서류에 기록된 모든 물품에 대한 카탈로그와 PPT를 준비해주세요. 포인트는 지금까지 없던 압도적인 효능과 효용에 맞춰주시면 됩니다.”

“삼일이오?”

여영진 부장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물론 맨입으로 드리는 부탁이 아닙니다. 귀사는 앞으로도 에신1과가 추진하게 될 국책사업에 우선적으로 배당이 될 겁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회사 매출을 안정적으로 키우는 데엔 나랏일만한 게 없죠.”

그가 갈등하는 게 읽혀졌다. 그는 나 때문이 아니라 삼일이라는 시간 때문에 고민하는 중이었다.

“어렵겠습니까?”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그러려면 팀원들을 전부 이 건으로 돌려야합니다. 맡고 있는 프로젝트를 일방적으로 드랍하면 회사 신용이......"

여영진 부장이 곤란하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나랏일과 저울질을 할 정도면 대기업 하청을 맡고 있음에 분명했다.

“인력을 보조해드리죠. 박사학위를 가진 연구원 다섯 명이면 되겠습니까.”

그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면 이틀 내로 줄여볼 수도 있겠습니다.”

“좋습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고요. 삼일 후 삼경그룹 회장님을 비롯한 재계 총수님들 앞에서 준비하신 자료를 발표하게 될 겁니다. 그때 좋은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제가 발표를 한다구요?”

그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내 명패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제가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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