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건국 (4) >
소원이라고?
그런 걸 들어주는 게 에사인의 일과이긴 하다만, 그녀는 내 사적인 영역에 한 발을 걸친 존재였다. 크롱크나 막시무스의 민원을 접수할 때와는 압박감의 차원이 달랐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테일리시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져갔다.
“알았어, 들어줄게.”
나는 고심 끝에 결심을 내렸다.
그래, 에사인이 되겠다는 놈이 성도님 소원조차 못 들어드려야 말이 되겠냐.
전직 암살자 감성에 저 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할 것도 아니고, 가로수공원에서 손잡고 산책을 하자고 할 것도 아니고, 끽해야 잘 드는 검이나 한 자루 사달라는 거겠지.
“약속한 거지?”
“약속했어.”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남의 거짓을 밝혀낸다는 놈이 자기가 한 말을 씹어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얘기 다 끝난 거죠?”
지금껏 지켜만 보던 소미가 내게 물었다.
“그래, 그런 것 같네.”
“그럼 테일리시님은 저를 따라오세요.”
“어디로 데려가려고?”
“우선 쇼핑부터 해야죠. 아이돌을 지망하는 분이 이렇게 옷을 못 입으면 큰일나지 않겠어요?”
“......그렇겠네.”
나는 차수진 박사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그녀는 이로서 대한민국 원탑 아이돌이 공인한 옷 못 입는 여자가 되고야 말았다.
“쇼핑이 끝나면 샵에도 가야하고, 대표님께 인사도 드려야겠고, 허락 맡고 나면 숙소로 안내해줘야죠.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오빠는 오빠 볼일 보시면 돼요.”
소미가 테일리시를 향해 몸을 빙글 돌리며 검지를 들어보였다.
“그리고 테일리시님께 드리는 첫 번째 규칙. 여기서는 에신어를 쓰지 마세요. 그래야 외국어 빨리 늘어요.”
"...응."
테일리시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살행에 임할 때처럼 전신에서 날카로운 투기를 뿜어내는 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임무를 맡게 된 것인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홀몸이 된 후 한가로이 휴가를 즐겼다.
박병철 장관이 추천했던 한강유람선은 혼자 탔다. 테일리시가 소미에게 끌려간 뒤로 소식이 뚝 끊기고 말았기에.
막상 유람선에 오르고 보니 나 빼고 죄다 커플이었다. 난간에 기대 강바람을 맞으며 이게 웬 청승인가 싶었다.
배가 막 한강대교 아래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박병철 장관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 박병철이네. 자네가 요청한 경제인들을 수배하려고 하는데, 혹시 특별히 염두에 둔 기업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접촉을 해보겠네. 어차피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으니, 편하게 생각해보게나.
어떤 기업과 협업할지를 정해달라는 말이었다. 공화국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다면 조 단위의 물자가 오갈 텐데, 그런 특혜를 아무 기업에나 퍼줄 수는 없으니까.
마침 나는 외교부공무원이 되기 전엔 마케터로 일을 했었다. 유통업과는 직무상 필연적으로 얽힐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갑과 을이라는 형태로.
유통업은 특성상 대기업이 주도하기 마련인데, 나는 바람만 불면 날아갈 중소기업 말단이라 대기업 위세에 허리를 펴고 다니기가 힘들었다.
물론 회사 내에서도 허리를 펴고 다니기가 힘들었다. 성질 더러운 부장에, 끝이 없는 클레임에.
오죽하면 이런 말을 우스갯소리로 주고받았겠어. 마케터와 중소기업 말단, 두 용어를 합성해서 나온 용어가 단말마라고.
- 따로 알아본 뒤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래처를 정하기 전 먼저 정리를 해야 할 인연이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엮인 악연이었다.
나는 박병철에게 답신을 보낸 뒤 하선했다. 강변을 따라 난 산책로를 걷고 있노라니 소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걸음을 재촉해 한적한 곳부터 찾았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려면 보안이 우선이었다.
- 안녕, 소미야.
- 오빠, 합격했어요!
소미가 기쁜 듯이 외쳤다. 나는 밑도 끝도 없는 합격소식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합격? 뭐를?
- 회사 오디션요. 테일리시가 합격했어요.
- 그걸 벌써 합격했다고? 오디션은 내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 어제 말씀드렸던 건 케이블채널하고 합작해서 만드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고요, 테일리시가 합격한 건 데일리 오디션이에요. 평일마다 수시로 연습생을 선발하는 시스템이죠. 여길 통과해야 연습생이 될 수 있어요. 원래는 대표님께 말씀을 잘 드려서 건너뛰려고 했는데, 동생님이 워낙 의욕이 넘쳐서 시험을 치르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 걔가 오디션을 뚫었다고? 어떻게?
- 직접 보시겠어요?
동영상 하나가 전송되어왔다. 테일리시의 오디션을 녹화해둔 영상이었다.
널찍한 방이 보였다. 한쪽에는 긴 테이블을 두고 세 명의 심사위원이 나란히 앉았고, 반대편에는 연습생을 지망하는 듯한 소년소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테일리시도 보였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 우뚝 선 채 쏟아지는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외모는 합격이네요."
사십대 여성 심사위원이 깐깐한 목소리로 평가했다.
“이만하면 센터를 맡겨도 되지 않겠습니까?”
왼편에 앉은 남자 심사위원이 흡족한 듯이 물었다.
“그냥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자기만의 분위기가 있어요. 딱 내 스타일이네요.”
오른편의 남자도 맞장구를 쳤다.
당연하지, 누구 부하인데.
영상을 시청중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손바닥에는 이미 땀이 흥건했다. 마치 자식의 데뷔를 응원하는 부모가 된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면 무대를 보겠습니다. 마이크 전달해드리세요.”
스탭이 테일리시에게 다가가 마이크를 쥐어주었다. 테일리시는 마이크를 일종의 무기로 오해한 듯했다. 마치 검을 쥐듯이 파지하고 있었다.
"자신 있는 노래가 있습니까?"
소미가 중간에서 통역에 나섰다. 심사위원들은 정체불명의 언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아시아 곳곳의 이런저런 언어를 듣는 게 일상이었으니.
“아는 노래가 없다고 하네요.”
소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는 노래가 없다고요? 단 한 곡도 말입니까?”
“네."
심사위원들이 황당하다는 듯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켜보던 지망생들의 민심도 흉흉해졌다. 외모만 믿고 들이대는 년이라는 거겠지.
“좋습니다. 춤은 출 수 있겠죠.”
“춤도 사실...”
소미가 겸연쩍게 대답했다.
“못 춥니까?”
“못 춘다기보다는 아는 춤이 없다고 해요.”
여성 심사위원의 심기가 급격히 불편해졌다. 몇몇 지망생들은 야유를 날리기도 했다.
“아무리 소미씨 추천이라지만, 노래도 안 되고 춤도 못하겠다는 건 의아하군요. 여기는 젊은 청춘들이 미래를 걸고 진검승부를 벌이는 곳이에요. 최소한 자기가 이루고자하는 꿈에 대한 열정은 보여야지요. 얼굴 하나만으로 뽑힌 아이돌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건 소미씨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선생님.”
소미가 그녀를 향해 구십도로 허리를 숙였다.
지망생들이 술렁이며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심사위원이나 소미나, 그들 입장에서는 감히 쳐다도 볼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선배였다. 두 사람이 이렇게 충돌하는 건 쉬이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소미가 이윽고 허리를 펴며 심사위원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분이 가진 게 외모만은 아니에요. 선생님께서는 제게 춤에 감정을 담아내야한다고 가르치셨죠. 이분은 몸짓으로 표현을 하고자하는 열정과 재능이 있어요.”
“표현에 대한 열정이라고요? 춤을 춰보지도 않았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게 있단 말인가요?”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보시고 판단해주셔요.”
“.......알겠습니다.”
여성 심사위원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손짓하자 무대에 비트가 깔리기 시작했다.
소미는 테일리시를 돌아보았다. 이때 그녀가 에신어를 썼기 때문에, 그녀가 테일리시에게 한 말은 오직 나만이 알아들었다.
“테일리시, 시작하자.”
“네, 언니.”
두 사람은 뭔가 짜온 게 틀림없었다.
뭔가 터무니없는 걸.
드디어 테일리시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 춤 같기는 했다.
그러나 결코 춤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격렬했다.
그녀는 가상의 적을 상정하여 검술을 시연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의 검로에 존재하는 적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았다. 인체의 급소만을 집요하리만치 파고드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검술이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앞에 서있었다면 지금쯤 온 몸이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졌을 것이다.
파아앗.
테일리시가 심사위원들을 향해 마이크를 쭉 뻗었다.
검무를 마무리하는 찌르기 동작이었다.
동시에 세 심사위원의 앞머리가 훌러덩 까뒤집어졌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서류들이 사방팔방으로 나비처럼 나부꼈다.
연습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찌릿찌릿한 투기가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방금 춤이 아니라, 죄업이 하늘에 닿은 암살자의 사냥술을 본 것이다.
한 남자 심사위원이 넋이 나간 듯이 중얼거렸다.
“거, 걸 크러쉬.......”
영상은 여기까지였다.
- 어때요?
소미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 선생님들이 동생님께 완전히 반하셨어요. 오늘은 춤을 가르쳐주신다고 하루 종일 붙어계시지 뭐예요. 저때는 안 그러시더니.
- 잘 됐다니 다행이다. 이래도 되는 건가하는 의문은 남지만.
- 좋은 게 좋은 거죠. 선생님께서도 진검승부를 원하셨으니까요.
그 진검이 이 진검을 의미하진 않았을 것 같다.
아무튼 정식으로 연습생이 되었다니 축하할 일이었다.
- 테일리시한테 전해줘. 항상 응원하고 있다고.
- 네, 그럴게요. 오빠도 몸조심하시구요.
통화가 끝났다.
나는 벤치에 앉아 휴대폰에 저장된 주소록을 뒤적였다. 테일리시가 잘 해내고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나도 슬슬 임무에 시동을 걸어볼 때였다.
나는 입사동기인 이상민의 번호를 찾아내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곧 수화기 건너편에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녕하십니까, 애드라이너 사업팀 이상민 팀장입니다.
항상 술에 꽐라가 돼서 연예인이나 영업하던 놈이 각 잡고 일하는 걸 접하니 되게 신선했다.
그나저나 이놈이 언제 팀장이 됐다지?
내가 퇴사하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몰라도, 그에겐 기회로 작용했던 듯했다.
- 나다, 봉팔이.
- 뭐냐, 너. 번호 바꿨냐?
- 이건 업무용 폰이다.
- 저번에는 용역업체 알바 뛴다더니, 그새 취직했냐.
-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 축하한다. 야, 미안한데 내가 지금은 정신이 없다. 지금 이 시간이 제일 바쁜 거 알잖아. 며칠 내로 자리 한번 마련해보자. 그때 네 이야기도 털고, 우리 유진이 근황도 풀게.
- 상민아, 여영진 부장 아직 퇴사 안했지?
- 퇴사는 무슨, 전보다 더 잘나가고 있다. 그런데 부장님 소식은 왜 묻냐?
- 왜긴, 비즈니스 때문이지. 마침 우리 쪽에 큰 건이 들어왔는데, 기왕이면 예전에 몸담았던 회사 실적을 올려주는 게 낫지 않겠니.
-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의리 있는 놈이었냐.
그가 수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역시 눈치가 빠른 놈이었다.
- 아무튼 가서 전화 바꿔달라고 해. 혹시 내 이름 대면 안 받을지도 모르니까, 우리 사무실 이름으로 전해다오.
- 어디라고 하면 되냐?
- 외교부 정책홍보실.